제Ⅱ부 유적현황편
〔1〕 동구지역
1. 현존사찰
1. 증심사
가. 위치 : 광주직할시 동구 운림동 56번지
나. 寺格 :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송광사 末寺
다. 연혁
증심사는 광주의 鎭山인 무등산(1187m)의 서쪽 기슭에 위치한 광주의 대표적 불교도장으로서, 1984년 2월 17일 이곳 증심사 일원은 문화재자료 1호로 지정되었다.
증심사의 사명은 「新增東國與地勝覽」(1530)이나 「遊瑞石錄」(1574년)등의 기록에는 “證心寺”라 하였고 “重修藥師殿記”(철종 7 : 1856년)나 「光州邑誌」(1925년)에는 “澄心寺”라 하였는데, 언제 어떤 연유로 징심이라 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증심사는 9세기 중엽 澈鑑(哲鑑)선사가 초창한 고찰로 寺誌에 의하면 고려 선종11년(1094년) 慧照國師가 중창하였고, 조선 세종25년(1443) 金倣이 삼창하였으며, 정유재란으로 불타버린 뒤 광해군원년(1609) 釋經․修裝․道光 3대선사가 4창하였다고 한다. 그 후 몇 차례의 보수를 거치면서 근년에까지 이르렀으나, 6․25의 전화(1951. 4. 22)로 오백전과 노전(사성전)을 제외한 대웅전․명부전․극락전․회승당․翠栢樓 등 조선중기의 건축물들이 모두 소실되었고, 이들 전각에 봉안되어 있던 불상과 정화를 비롯하여 범종․탑 등의 귀중한 문화재들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증심사의 현존 건물은 오백전을 비롯하여 대웅전을 비롯하여 대웅전․지장전․비로전․강원․종각․일주문 및 승방 등이 있으나 전화를 피한 오백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1970~80년대에 복원된 건축물들이다.
라. 증심사의 건축적 특성
1) 배치
증심사의 가람배치는 계곡의 방향을 따라 동↔서의 축선을 기준으로 하였으며, 경사된 지형을 몇 개의 큰 단으로 나누어서 整地하여 건물을 적절히 배치하였다. 또한 주위의 지형과 조화가 되도록 계획되어 있어서 산지가람의 배치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일주문이 있고 경사지를 올라 왼쪽으로 돌면 각종 부도와 비석이 있고 대웅전에 이르는 50여단의 계단이 있다. 대웅전에 이르는 계단 왼편에 80년대에 지어진 종각이 있으며 계단을 올라감에 따라 점차적으로 전개되는 대웅전의 광경은 보는 사람을 압도하여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게 한다. 대웅전앞 중정 좌우에 요사체가 있으며 중정에서 동쪽으로 몇 개의 계단을 오르면 마침내 정면 5간․측면 3간의 대웅전에 이르게 된다. 대웅전 우측에는 정면 5간․측면 2간의 지장전이 있다. 이어서 대웅전 뒤로 몇 개의 계단을 오르면 통일신라시대의 증심사 3층석탑이 있으며, 탑 옆으로 난 계단을 올라 오백전이 있고 탑 좌측으로 2m높이의 축대위에 비로전이 위치해 있다. 그리고 오백전 옆으로 석불과 탑이 나란히 놓여 있다.
대개 산지사찰은 주변의 지세에 순응하여 배치되기 때문에 축의 개념과 대칭의 개념이 평지사찰에 비해서 엄격히 준용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예이다. 증심사 역시 일주문을 지나 중정에 이르는 진입을 위한 과정적 공간이 지형을 따라 몇 번 꺾어서 올라가며, 평지와 같이 정리된 중정부분은 축과 좌․우 대칭성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대웅전 뒤의 부분은 오백전과 지장전․비로전 등이 서로 규모에 맞지 않게 배치되어 약간 헤이된 후기적 배치의 인상을 준다.
2) 증심사 오백전
이 오백전은 대웅전 뒤편의 높은 축대 위에 위치한 서향한 전각으로 정면 3간․측면 3간의 단층맛배지붕의 기와집이다. 거친돌 허튼층쌓기의 기단 위에 원주를 세위 쇠서를 둔 翼工式 건축으로, 처마는 겹처마이며 양측 박공에는 풍판이 없는 五梁架이다. 현재 무등산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조선시대의 목조건축물로서 조선 세종 25년(1443)증심사를 삼창한 김방이 오백나한과 십육제자상을 조성․봉안하고 국태민안을 기원하기 위해 지은 것이라 전한다.
오백나한이란 오백비구 또는 오백상수라고도 한다. 아나한과를 중득한 이로 존경과 공양을 받을 만한 오백의 성자로서 석존의 제자에 오백인이 있다하며, 혹은 부처님 멸도하던 해에 왕사성 칠엽굴에서 행한 제1결집에 참여한 오백의 比丘, 또는 불멸 600년경 가습미라에서 열린 비바사론 결집에 모인 오백의 나한이라고도 하는데, 후세에 중국․우리나라․일본에서 이 오백나한에 대한 숭배가 성행하였다.
조선시대에 이러한 오백전이 조성된 예로서 전남지방의 경우 이곳 증심사가 유일한 예이며, 다소 그 성격은 다르나 現勢現劫의 천불을 조성․봉안한 예는 해남 대흥사의 천불전을 볼 수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라 하겠다. 또한 이 오백전의 결구수법은 조선 세종 12년(1430)에 건립된 강진 무위사의 극락전(보물13호)과 같은 계통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어 건축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1989년 3월 20일 시지정 유형문화재(13호)로 지정되었다.
3) 일주문
일주문은 80년대 초에 건립된 것으로 세벌대 기단위에 막돌로 초석을 놓았으며, 지름 75㎝의 배흘림 원주위에 昌枋과 平枋을 놓고 포작을 하였다. 원형기등 앞․뒤에는 작은 팔각기둥이 있으며 斗栱은 내․외 삼출일 다포식으로 주문포작은 정면에 2개가 있는데 살미첨차(山彌簷遮)의 쇠서부분이 급하게 반곡되어 있으며 연봉은 초각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현란하게 단청되어 있고 지붕은 팔작집이다.
4) 대웅전
정면 5문․측면 3문의 단층팔작지붕이며, 다포식으로 어간이 협문과 퇴문의 2배정도 되는 것이 특징이다. 조선조 중기에 중창하였던 것이 6․25의 전화로 불타 1971년에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기둥은 배흘림이 약간 있는 원형기둥으로 이루어졌으며 양 끝 四隅部의 기둥이 평주에 비해 지름이 10㎝정도 크다.
창호를 살펴보면 어간은 솟을빗살창이 달린 4分閤門이고 퇴간과 협간은 2분합문으로 나뭇잎 모양의 빗살문이다. 그 아래 부분은 청판을 대고 당초문을 그렸다. 기둥위에 용두와 주제를 놓았는데 용두를 밖으로 노출시켰고 내부로는 용꼬리부분을 설치하였다. 측면의 전면 외진문에 외짝교살창문을 설치했는데 그 옆벽에 목우도를 그렸다. 또한 창방과 평방을 결구하고 그 위에 포작을 놓았으며 외삼출목, 내오출목의 다포양식이다. 첨차단면은 直切되었고 교두부분은 완만하게 곡면을 이루고 있는데 첨차는 栱眼이 없는 것이 특색이다. 첨차위에 小累를 얹고 대첨차를 놓았다. 도리는 8각형 도리이고 처마는 겹처마이다. 내부가구는 천장이 설치되어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무고주 7량으로 보인다. 내부는 고주가 없이 평주와 내진주를 연결시켜 대들보를 놓고 그 위에 동자주를 세운다음 종량을 얹고 종량에 수평으로 우물천장을 가설하였다. 오출목부분에서 우물천장까지는 빗천장을 가설하였다.
5) 지장전
지장보살을 봉안하는 곳으로 대웅전의 우측에 있다. 정면 5간․측면 2간의 단층팔작지붕이며 다포식이다. 다듬돌 주초위에 원형기둥을 놓았으며 기둥은 약간의 배흘림이 있다. 기둥위에는 창방을 놓고 평방을얹은 다음 외2출목․내삼출목의 다포식 포작을 하였다. 창은 무늬 없는 빗살창이고 천장은 우물천장이며 처마는 겹처마이다.
6) 비로전
막돌 주초를 놓고 기둥을 세웠는데 대웅전보다 더 높은 곳에 정면 3간․측면 2간의 단층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기둥위에는 주심포형식을 갖춘 익공식 포작을 架構했으며 외2출목의 7량집이다.
7) 승방
대웅전을 마주보고 섰을 때 우측에 있는 승방은 두벌대 기단위에 초석을 놓고 방형기둥을 세운 것으로서 마치 민가를 연상케 하는 건물이다. 井字살문 옆에 회벽을 발랐는데 지붕은 우진각 지붕으로 단청을 하지 않았다.
8) 종각
증심사 종각은 경사축대위에 외벌대 기단을 두고 원형다듬돌 초석을 쌓아 그 위에 배흘림이 뚜렸한 기둥을 세운 80년대 초의 건물이다. 건물의 기능상 벽면을 만들지 않고 목재살로 벽면을 대신했으며 창방위에 복화반을 놓고 장설을 얹은 다음 그 위에 도리를 가구했다. 포작은 익공식 포작이며 다포식이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써 겹쳐마이며 서까래와 도리사이에 갈모산방이 있다.
이 밖에 증심사에는 현재 공사가 진행중인 요사체가 2동이 있으며 범종각 뒤편 언덕 위에는 1동의 요사체가 있다.
마. 유물
1) 증심사 철조비로사나불좌상
현재 증심사 비로전에 봉안되어 있는 이 철불은 6․25의 火魔를 면한 증심사의 유일한 국가지정문화재(보물131호)이며, 신라말의 철불로서는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사나불좌상(국보117호, A.D. 858)과 함께 매우 희귀한 예의 조각작품이다.
세부의 조각기법을 살펴보면 상호는 원만한 타원형이며 머리는 螺髮에 肉髻가 높이 솟아있다. 반개한 눈과 우뚝한 코 굳게 다문 입술 등은 다소 근엄한 표정이며, 목에는 삼도의 표현이 뚜렷한데 양쪽 귀는 매우 짧아졌다. 법의는 通肩이며, 복부에 裙衣를 一端이 보여진다. 전체적인 衣褶의 표현은 간결한 평행단장의 융기선으로 처리되었다.
手印은 진리와 이론은 관장하는 비로사나불의 특징인 智拳印을 結하였는데, 보림사 비로사나불이나 철원 도피안사의 불상이 왼손 인지를 세워 그 끝을 오른손으로 가볍게 감싸진 모습인데 대하여, 이곳 증심사 불상은 바른손을 밑에 대고 왼손이 위가되는 변상이며 또한 인지의 끝을 감싸진 형태가 아니라 손과 손을 직접 맞대고 있는 점이 매우 특이하다 하겠다. 불국사 금동비로사나불좌상(국보26호, 8세기경)의 예에서도 바른손이 왼손 밑으로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으나 이 불상도 바른손의 인지를 세우고 그 끝을 왼손으로 가볍게 감싸쥐고 있다. 한편 최근에 소개된 해남 은적사의 철조비로사나불좌상의 경우는 10세기경의 작품으로 추정되는데 바른손이 왼손 밑으로 가는 모습과 함께 주먹을 쥔 바른손의 엄지손가락을 곧추세워 왼손 밑에 갖다댄 매우 특이한 형태의 수인을 취하고 있다.
또한 이 증심사의 철불은 결가부좌한 발의 모습에 있어서도 앞서살핀 불국사나 보림사 또는 도피안사의 불상과는 반대로 왼발이 바른발의 무릎 위에 놓여진 降魔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증심사의 철불은 원래는 증심사의 불상이 아닌데 폐사지에서 옮겨온 것이라고 전한다.
불상의 규모는 총고 90㎝, 頭高 28㎝, 두폭 19㎝, 견폭 43㎝, 흉폭 32㎝이다. 조성시기는 통견의와 평행단상의 의습 및 짧아진 귀 등의 수법이 도피안사의 철불과 흡사한 점으로 보아 이 철불도 신라하대의 시대적 유행에 따라 9세기경에 이루어진 작품이라 추정된다.
2) 증심사 석조보살입상
서향한 오백전의 남쪽 공터에 원형의 연화대좌를 갖춘 석조보살입상 1구가 범자7층석탑과 나란히 세워져 있다. 보살상의 규모는 총고 205㎝, 지대석직경 130㎝, 상대석직경 100㎝, 대좌고 55㎝, 불신고 150㎝, 두고 50㎝이다.
세부양식을 살펴보면 원형의 연화대좌는 상․중․하대석 및 지대석을 모두 갖추었다. 상대앙연좌는 11엽의 단판연화문과 2엽의 큼직한 연화당초문이 혼합되어 조각되어 있다. 중대석은 8개의 안상을 돌리고 안상내에 화운문을 꽉차게 조각하였다. 하대복연좌는 두툼한 16엽의 복판연화문을 돌렸다. 지대석 역시 원형으로 측면을 분할하여 연화문을 만들었으나 면분할을 잘못하여 8엽반 즉 9엽이 되었다.
대좌 위의 보살입상을 보면 머리에서 높은 원통형보관을 썼고, 타원형의 갸름한 얼굴은 우아한 기품이 보이며 선각된 삼도 아래에는 목걸이를 彫飾하였다. 법의는 우견편단이며 몸 전체에 조식된 의문은 깊지는 않으나 매우 유려하다. 수인을 보면 왼손은 쫙펴서 왼쪽 가슴위에 올려 놓았고, 바른손은 편채로 내려뜨려 바른쪽 대퇴부 바깥쪽에 붙이고 있다.
이 보살입상의 조성년대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자료는 머리 위의 높은 원통형보관으로써, 이러한 양식은 10세기 고려 불상인 강릉 寒松寺 석조보살좌상(국보124호)이나 오대산 월정사 석조보살좌상(보물139호) 등에서 보여지고 있다. 그러나 증심사 석조보살입상은 전반적으로 간략화되고 퇴화된 조각기법과 경직된 수인의 처리 및 신체의 불균형 등이 나타남으로써 그 조성시기가 다소 떨어짐을 알 수 있으나 고려전기를 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무등산」의 기록에 의하면 전 주지 종산스님의 말을 빌어 “폐사지에서 증심사로 옮겨왔다”고 전하며, 「광주시사(1966년)」에는 “나한전 우측 문인상은 본래 서봉사지에 있었던 것을 고 현준호씨가 사재를 기울여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는 기록이 보인다. 후자의 기록중 ‘문인상’은 현재 오백전내에 봉안된 조상이 아니라, 전각 바깥에 세워진 석조보살입상이 높은 원통형보관을 쓰고 있어 문인상으로 보았던 것이 아닌가 생각되며 이것이 확실하다면 이 석조보살입상은 폐사된 서봉사지에서 반출된 유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1989년 3월 20일 시지정 유형문화재 14호로 지정되었다.
3) 증심사 삼층석탑
현재 증심사 오백전 앞 축대 아래에 세워져 있는 이 석탑은 초층옥개석의 일부가 파손된 것을 제외하고는 각부재가 具存한 거의 완전한 형태의 삼층석탑이다. 또한 이 석탑은 높은 이중기단을 갖추고 탑신의 체감비율이 뚜렷하여 매우 안정감을 보이는 신라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 주고 있다.
탑의 세부양식을 살펴보면 하층기단에는 각면에 3개씩의 細長한 안상을 조식하여 隅柱와 撑柱의 합이 넷이되고, 상층기단 면석에는 우주와 탱주의 수가 각면 셋씩이며, 옥개석 층급받침은 각층 모두 넷씩으로 4:3:4의 양식을 보여준다. 옥개석은 비교적 두터운 편이나 전각의 반전은 다소 심한 편이다. 상륜부의 시설은 노반 위에 覆鉢 대신 옥개석을 얹었으며, 그 위에 방형상의 앙화를 올려놓았다.
전체적으로 9세기의 작품인 승주 선암사의 동․서 3층석탑(보물395호)과 그 양식이 흡사하여, 이 탑 역시 거의 같은 시기인 신라말에 조성된 작품이라고 추정된다. 총고 3.4m의 화강암제석탑이며 1971년 12월에 해체 복원하였다. 현재 시지정 유형문화재 1호로 지정되어 있다.
4) 증심사 오층석탑
증심사 지장전 앞에 세워져 있는 이 탑은 대웅전의 북쪽(비로전의 서쪽 축대아래) 공터에 있었던 것을 현재의 위치로 옮겨놓은 것이다. 4층옥개석과 옥신을 제외한 기단․탑신․상륜부의 각 부재가 구존되어 있으나, 기단부의 갑석은 파손이 다소 심한 편이다.
세부양식을 살펴보면, 기단부는 지대석이 높다란 4매의 판석으로 이루어져 하층기단의 역할까지 하고 있다. 그 위에 올려진 기단부의 면석에는 우주와 탱주의 합이 각면 셋이며, 옥개석층급받침도 각층 모두 셋이다. 옥개석은 다소 얇아졌으며 전각의 반전도 매우 심한 편이다.
특이한 것은 초층옥신의 4면 중앙에 14.5㎝ 크기의 돌출된 방형 구획을 만들고 그 안에 8엽의 퇴화된 연화문을 새긴 점이다. 이렇듯 옥신의 각면에 변형된 연화문(또는 화문)을 장식한 예로써 고려시대의 작품인 화순 운주사 9층석탑(보물796호)을 들 수 있는데, 운주사탑에서는 각층의 옥신 4면 모두에 2중의 마름모꼴 구획을 만들고 그 안에 4엽의 화문을 조식하였으며, 옥개석 하면에도 층급받침 대신 선문을 조식하여 더욱 퇴화된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점들을 통하여 살펴볼 때 이 증심사 5층석탑은 2중기단의 전형적인 양식에서 벗어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옥신 면석에 퇴화된 연화문을 장식하고 있는 점 등으로 보아, 앞서 살핀 3층석탑보다도 그 시기가 훨씬 떨어지는 고려시대에 조성된 작품이라 추정된다.
한편 1933년 이 탑을 해체 복원할 때 탑내에서 금동불 2軀와 함께 5층 철탑(高 19㎝)․소형철불 2구․수정 1점․청옥세주 23점 등이 발견되었다. 이 가운데 금동석가여래입상(15.9㎝)은 구 국보 211호로, 금동보살입상(18.2㎝)은 구 국보 212호로 각각 지정되어 증심사에 보관되어 왔었으나, 6․25전란의 와중속에서 그 행방을 알 수 없게되어 문화재 지정목록에서 해제되고 말았다.
5) 증심사 범자7층석탑
이 범자7층석탑은 서향한 5백전의 남쪽 공터에 석조보살입상과 나란히 세워진 소형의 석탑이다.
세부양식을 살펴보면, 일매석으로 된 방형의 지대석 겸 기단위에 7층의 탑신을 올렸고, 상륜도 연봉형의 일석재를 얹어놓아 기단부와 상륜부가 거의 생략된 매우 퇴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탑신부 각층의 옥개석 또한 층급받침이 생략되었는데 전각의 반전은 매우 심한 편이다. 그리고 각층 옥신의 체감비율이 작아 전체적으로 매우 세장한 느낌과 함께 안정감을 잃고 있다.
그러나 이 탑에 있어서 가장 특징적인 요소는 탑신부 옥신 각면에 조출된 화문과 범자문이라 할 수 있겠다. 초층의 옥신 4면에는 퇴화된 화문을 조출하였고, 2층부터 7층까지는 층마다 각기 다른 범자를 새겼는데 각층 4면에 새겨진 범자는 동일문자이다. 이러한 진언문의 범자가 문양으로써 조식된 것은 범종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조선의 시대적 특징 중의 하나이다. 또한 석탑의 양식에 있어서는 공주 마곡사의 5층석탑과 같은 라마탑 계통의 양식을 보이고 있으나, 그 말기적 요소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러므로 이 탑의 조성시기는 조선중기 이후라고 추정되며, 증심사에 현존하는 석탑중에서는 가장 시대가 떨어지는 작품이다.
이 범자7층석탑이 생략되고 퇴화된 양식으로서 석탑의 전형양식에서 상당히 벗어나 있고 시기적으로 다소 떨어지는 작품이기는 하지만, 라마탑 계통의 말기적인 요소를 보여주고 있으며, 또한 옥신 각면에 범자문을 조식한 점 등은 석탑에 있어서는 매우 희귀한 예로서 불교미술사상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고 할 수 있겠다.
지금까지 살펴 본 3기의 석탑 외에도 증심사에는 6․25이전의 사진에 의하면 대웅전 앞에 5층과 7층의 쌍탑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나 현재는 전하지 않고 있음을 애석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6) 월암당대사민성탑
증심사 입구의 석계 우측에는 부도전(비전)이 있는데, 맨 앞열 가장 왼쪽에 위치한 이 부도는 원래의 위치가 아니라 부도와 비를 정리하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부도의 전체적인 양식은 해남 대흥사 청허당부도에서 처럼 8각원당식부도의 양식을 어느 정도 따르려 했으나 시대의 하강에 따른 기법상의 퇴화와 간략화의 모습이 역력하게 나타나 보인다.
세부양식을 살펴보면, 잘 다듬어지지 않은 방형에 가까운 지대석 위에 방형의 중대석을 올려 놓았는데 현재의 지대석은 원래의 석재가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방형의 중대석 4우에는 5개의 연주형을 각출하여 우주를 표현하였다. 4면중 정면과 양쪽 측면은 다소 변형된 연화문을 시문하였으나, 후면에는 인면을 조각하였는데 주목코에 왕방울눈으로 웃는 모습이 흡사 장승의 얼굴처럼 표현되었다. 이 중대석 위에 올려진 상대석은 거의 원형에 가까운 8각의 앙연대인데 정면의 앙연을 중심으로 좌우에 2엽씩 모두 5엽을 조식하였을 뿐 후면은 생략하였다. 앙연의 조각이 매우 치졸하여 상대석과 중대석이 현재 바로 놓여지지 않았다.
상대석 위에 올려진 길다란 8각 탑신의 정면에는 “월암당대사민성(탑)”의 탑호가 있고, 후면에는 “康熙五十四年五月日乙未立”의 명문이 있어 이 월암당부도가 조선 숙종 41년(1715)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옥개석의 처마에는 2단의 연목시설을, 그리고 낙수면에는 기와골을 각각 모각하였다. 우종에는 각기 1용씩 8용을 장식하였는데, 정면의 용두만 고개를 왼편으로 돌렸고 나머지는 모두 전면을 바라본 형태로서, 전면을 향한 용두와 渦雲文처럼 돌려진 용두의 수염이 귀꽃을 조각한 것처럼 보인다. 상륜부는 형식적인 복발위에 삼두용이 여의주(보주)를 받치고 있는 형태이다. 부도의 총고는 2.42m이다.
7) 수월당보문탑
월암당부도 바로 옆에 있는 부도로서 현재 자연석을 지대석으로 삼아 놓여져 있으나 원래의 모습은 아닌 것 같다. 상륜부는 결실되어 없고, 옥개석은 방형인데 4우동에는 용두를 조각하였고 낙수면에는 기와골을 모각하였다. 전각의 반전은 매우 심한 편이며, 처마밑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탑신은 장타원형인데 정면에 “수월당보문탑”이란 탑호만 있을 뿐 조탑년대를 알리는 명문은 없다. 이 탑신을 받고 있는 방형의 상대석은 탑신과 1매석이며 정면을 제외한 3면에 형식화한 연화문을 조출하였다. 이러한 시설들을 龜趺가 바로 받고 있는 것이 매우 특이한데, 귀부의 등갑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고 왼편으로 고개를 돌린 용두의 조각도 매우 치졸한 편이다. 그러나 머리위에 9엽의 연화문을 장식한 것이 이채롭다 하겠으며, 용두의 왕방울처럼 튀어나온 눈이나 눈밑에서 시작하여 턱밑으로 돌려진 수염의 모습등은 석장승의 조각을 보는 것처럼 해학적이면서 서민적인 요소를 느끼게 하고 있다. 이 부도의 조성시기는 앞서 살핀 월암당부도와 거의 비슷한 연대로 추정되며, 부도의 규모는 1.22m이다.
이밖에 부도전에는 1900년대에 세워진 3기의 탑(부도)이 있는데 그 명칭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康津崔氏之塔(갑인삼월십일일입: 1914)
∙曺氏淨行華化塔(대정팔년기미십월일: 1919)
∙大德華安魂塔 大德華 漢陽趙南洙(정묘이월일: 1927)
8) 규봉당부도
이 부도는 증심사 비로전 뒤쪽의 암벽 중앙에 산신각과 함께 세워져 있는데, 원래의 위치가 아니라 주변의 흩어져 있던 것을 수습하여 이곳에 세워 놓은 것으로 보인다. 원형의 지대석 위에 석종형 탑신과 상륜을 안치하였는데 탑신과 상륜은 일매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탑신에는 횡서로 “규봉당”이란 당호가 새겨져 있다. 총고 76m의 소규모 부도로서 극히 간략화된 모습을 보인다.
9) 증심사 산신각
앞서 살핀 규봉당부도와 함께 비로전 뒤쪽의 암벽 중앙에 설치된 소규모 석조전각이다. 총고 1.78m의 석조구조물을 보면, 암벽에 음각된 “서석산신지위”의 명문을 중심으로 2개의 8각 석조기둥(고 125㎝)을 세우고 그 위에 석조지붕(고 53㎝)을 얹은 소규모의 형식적인 시설이다. 이러한 산신각(또는 산신당)은 7성각(당)․3성각(당) 등과 함께 불교가 민간신앙을 흡수해 가는 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인데, 이곳 증심사에는 이처럼 형식적인 산신각이 있지만 원효사에는 본격적인 전각으로서 성산각(7성각: 정면3간․측면2간)이 마련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10) 증심사 翠栢樓址
취백루는 정유재란으로 증심사가 불타버린 뒤 광해군원년(1609) 석경․수장․도광의 3대선사가 증심사를 4창하면서 세운 정문루각이며, 아래층은 4천왕을 모시고 대웅전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사찰경내로 들어갈 수 있도록 되어 있는 2층 건물인데 마루가 깔린 2층 한쪽에는 법고가 걸려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취백루란 누각의 명칭은 취백홍조가 얽혀서 피어있는 아름다운 정경을 묘사한 고려 명종(1171~1197)때의 시인 김극기의 시구에서 취해진 것이라 전하고 있다.
6․25의 전화로 인해 소실되어 버린 이 취백루의 건립연대에 대해 좀더 살펴보면, 광해군 때의 4창보다 125년 전인 萬曆甲戌(선조 7: 1574년)에 쓰여진 제봉 고경명의 「유서석록」에 “취백루에 올라 휴식을 취했다”는 기록이 보여지고 있어, 취백루는 이미 4창 이전에도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혜조국사의 2창 이후였던 김극기 당시에는 없었던 것으로 생각되므로, 이 취백루의 건립은 김방에 의한 3창 때인 조선 세종때가 아니었는가 추정해 볼 수 있겠다.
2. 약사사
가. 位置 : 광주직할시 동구 운림동 산11번지
나. 寺格 :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송광사 末寺
다. 沿革
약사사(약사암)는 증심사로 가는 길에서, 증심사 일주문 전방 50m지점으로부터 오른쪽 계곡의 물줄기를 따라 약 600m쯤 오르면 약사계곡 윗쪽의 분지에 사인봉(세인봉)을 바라보며 자리하고 있다. 무등산에서는 유일하게 6․25의 전화를 입지않은 사찰이기도 하다.
약사사는 원래 “인왕사”라 하였고 철감선사가 증심사의 창건을 위해 세웠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현재 약사사에 보존되어 있는 유물로서 석조여래좌상(보물 600호)과 3층석탑이 모두 9세기 전반기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어, 이러한 약사사의 창건년대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하겠다.
라. 약사사의 건축적 특성
1) 배치
계곡을 따라 무등산 중봉으로 올라가는 도중의 분지에 자리잡은 약사사(약사암)는 증심사와 마찬가지로 약간 틀어진 동․서의 축을 기준으로 배치하였다. 계곡의 일주문을 지나 50여m 정도 가다 왼쪽으로 돌아 들어가면 대웅전앞 중정에 이르는 20여단의 계단이 있고 탑을 중심으로 맞은 편에 정면 3간, 측면2간의 대웅전이 있으며 탑 좌우에는 요사체가 있다. 우측의 요사체는 80년대에 건립된 건물이고 좌측의 요사체는 운림사원이라 명명된 ㄷ자형 던물로 고졸한 느낌을 준 건물이나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다.
2) 일주문
약사사 일주문은 덤벙주초 위에 기둥을 세우고 창방과 평방을 가구하여 그 위에 외삼출목의 주간포를 배치한 다포식 건물이다. 지붕은 겹처마의 팔작지붕으로 기둥 앞뒤에는 4개의 8각기둥이 창방과 평방의 결구부분을 받치고 있다.
3) 대웅전
1980년대에 건립된 대웅전은 정면 3간․측면2간의 단층 8작지붕으로서 현대식 대리석 기단위에 다듬돌 초석을 놓고 원형기둥을 세웠다. 정면3간 모두 4분합 빗살 창문이며 결구부분은 기둥위 창방 바깥쪽으로 용머리 부분이 나와있고 내부로 꼬리부분이 조각되어 있다. 내부는 고주가 없이 양쪽이 변주인 평주위에다 대들보를 얹었다. 대들보와 보간의 평주를 연결시키는 형량은 용의 몸과 머리모양으로 장식된 부재를 연결 하였다. 대량위에 접시대공 모양의 판재를 얹고 그 위에 종보를 가구하였으며 종보와 수평하게 우물천장을 설치하고 우물천장과 내부공포와의 사이에 빗천장을 가설했다. 내부에는 보물 600호인 석불을 안치한 특이한 예를 보여 주고 있다. 우물천장이 있어 가구구조를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평7량으로 보인다.
4) 요사체
우측의 요사체는 정면 6간, 좌측면 5간의 ‘ㄱ'자 형상의 건물로 현대식 유리창문에 포작이 없는 민도리집이며 8작지붕이 ’ㄱ'자 모양으로 휜 지붕형태이다.
좌측 요사체였던 운림선원(사진 59)은 현재에는 없다. 정면 6간, 측면 4간의 단층 8작지붕의 건물로써, 외벌대 기단위에 장주형의 막돌초석을 놓고 원형기둥을 세운 건물이었으나 최근에 과거의 요사체를 헐고 새로이 건물을 신축중에 있다.
5) 운림당
운림당은 대웅전 뒷 편에 있는 승방으로서 주지스님이 기거하는 곳으로 8작지붕의 정면 3간, 측면 1간에 전퇴인 건물이다. 외벌대의 기단위에 다듬돌 초석을 놓고 원형기둥을 세웠으며 포작이 없는 민도리집이다. 창호는 井자살창문이며 전퇴부분에 툇마루를 깔았다. 전체적으로 사찰의 승방이라기 보다는 일반적인 민가를 연상케하는 건물이다.
마. 유물
1) 약사사 석조여래좌상
현재 약사사의 대웅전 내에 봉안되어 있는 화강암제 여래좌상으로 1976년 8월 14일 보물 600호로 지정되었다. 불상과 대좌는 현존하나 광배가 결실되었다.
세부양식을 살펴보면 불두의 肉髻는 낮으막하고 두발은 반나발로서 이마와 귀의 상단을 경계로 한 뒷머리에만 나발이 표현되었다. 상호는 잘 정제되어 원만하며 눈은 반개하였고 두툼한 입술은 미소를 머금고 있다. 법의는 우견편단으로 왼쪽 팔에 걸친 의문은 유려하게 흘러내려 결가부좌한 무릎을 덮고 있다. 결가부좌한 다리는 길상좌를 취하였는데, 오른 발은 왼쪽 무릎 위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지만, 왼 발은 오른쪽 무릎 위에 놓인 오른 손 뒤쪽으로 발가락만 약간 노출되어 있다. 수인을 보면 다섯 손가락을 모두 모은 왼 손을 결가부좌한 발 위에 놓아 단전 위에 오게 하였고, 오른 손 역시 다섯 손가락을 모아 무릎 위에 가볍게 걸쳐 강마인을 취하였다.
허리는 수직으로 반듯하나 고개를 약간 숙여서 아래를 굽어 보게 하였으며, 귀는 다소 짧은 편이나 목은 비교적 굵고 삼도의 표현이 뚜렷하다. 넓고 든든하게 펴진 어깨와 굵고 힘찬 팔은 중량감 있는 두 다리와 함께 남성적인 모습을 보여 주는데 비하여, 짧은 동체와 급격히 가늘어진 허리는 다소 빈약한 느낌을 준다.
대좌는 상․중․하대로 이루어져 있고 8각의 통식을 따랐으나 상대석은 원형이다. 상대석은 단고8엽의 앙연좌로서 연화문 내부에는 화려한 화문을 조출하였다. 중대석은 8각으로 우주만각출하였을 뿐 별다른 장식이 없다. 하대석은 복연대로서 방형의 지대석 위에 올려져 있다. 한 변의 길이가 153㎝인 방형의 지대석은 석탑의 하층기단과 같은 양식을 보인다. 지대갑석․중석․저석으로 가로면을 분할하고, 중석은 양우주와 2개의 탱주로 세로면을 3등분한 다음 각면에 안상을 새겼다. 이 방형의 비대석 위에 1단의 8각받침을 만들어 8각하대석을 올려 놓았는데, 하대석은 복고 16엽의 복연대이며 복연의 조각이 매우 볼륨감 있게 표현되어 있다. 이 복연대는 또 다시 4단의 8각받침을 설치하여 중대석을 받게 하였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 불상은 8세기 중엽에 조성된 석굴암 본존불(국보 24호)의 형식을 따라 신체의 굴곡과 양감을 표현하여는 노력이 역력하며, 의습의 처리도 고려불들에서 처럼 경화되지 않고 비교적 유려하여 신라 전성기의 불상양식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짧은 동체, 급격히 가늘어져 빈약해진 허리 등은 전체적인 균형을 감소시키고 있으며, 넓은 어깨에 비해 짧은 목과 약간 앞으로 숙여진 머리는 위축된 감을 느끼게 한다.
이 불상은 경북 의성의 孤雲寺 석조석가여래좌상(보물246호)이나 경남 합천의 청량사 석조석가여래좌상(보물265호) 등과 함께 9세기에 조성된 작품으로 추정되는데, 이 중에서도 약사사의 불상은 의습의 처리에 있어서 도식화나 경화된 표현이 나타나지 않는 점으로 보아 9세기 전반기의 작품으로 보여진다. 덧붙여서 이 불상은 통일신라불이 희귀한 전남지방에 있어서 그 학술적 가치가 매우 큰 소중한 유물이라 하겠다.
불상의 규모는 총고 2.26m이며, 불신고 1.14m, 대좌고 1.12m, 두고0.37m, 상대석 직경 1.22m, 중대석 직경 0.6m, 하대석 직경 1.35m이고 방형 지대석은 한 변이 1.53m이다.
2) 약사사 3층석탑
현재 약사사 대웅전 앞에 세워진 이 3층석탑은 원래 불완전한 破塔이었던 것을 결실된 탑재들을 보완하여 복원해 놓은 것이다.
복원전에 남아 있었던 탑재들을 보면 기단부에서는 상층기단의 갑석, 탑신부에서는 1․2․3층의 옥개석과 1층의 옥신, 상륜부에서는 노반과 앙화만이 남아 있었다. 이들 탑재들을 통해 살펴보면, 상층기단 갑석에 마련된 옥신괴임의 형태나 각층 옥개석에 보이는 4단의 층급받침 그리고 낙수면의 완만한 처리 및 전각의 반전각도 등이 대구 동화사 비로암, 3층석탑(보물 247호)과 거의 흡사한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동화사 비로암 3층석탑은 탑 안에서 발견된 사리석대의 명문에 의해 신라 경문왕 4년(864) 민애왕의 기복을 위해 건립된 사실이 밝혀진 건립년대가 확실한 신라의 석탑이다.
이러한 양식적인 비교를 통하여 살펴볼 때 이 약사사 3층석탑의 조성시기도 9세기 중엽을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현재 복원된 이 석탑의 모습을 보면 단층의 기단만을 마련하여 탑신부를 받쳐줌으로써, 2층의 기단을 갖는 신라석탑의 전형양식에서 벗어나 전체적인 균형을 잃고 있다.
3) 중수약사전기 및 약사암중건상량문
이 두가지 기록은 모두 1980년 현재의 약사사 대웅전을 중건하기 위해 과거의 약사암 전각을 해체하면서 전각내에서 발견된 문서들이다.
①중수약사전기
이 기록은 약사전의 중수 사실과 함께 관련된 인물 및 중수일시 등을 한지에 墨書로 기록하였다. 그런데 제목과 셋째줄 불상의 명칭을 기록한 내용에서 “藥”자를 모두 “樂”으로 쓰고 있는 것은 오기인 듯하며, 증심사의 사명이 “징심사”로 기록되어 있다. 말미에 쓰여진 「聖上卽阼7年丙辰三月十六日」의 연대는 조선 철종 7년(1856)에 해당하며, 총 15행 223자이다.
②약사암중건상량문
이 기록은 전술한 중수기 이후의 중건사실을 알려주는 전각의 상량문으로 중건의 과정과 중건에 관련된 인물 및 중건일시 등을 한지에 묵서로 기록하고 있다. 말미에 쓰여진 「光武九年秋九月旣望」의 연호는 대한제국 9년(1905: 을사)에 해당하며, 총 14행 268자이다.
2. 폐사지
1. 백천사지
가. 위치 : 광주직할시 동구 지산동 438-2
나. 연혁
광주 법원에서 사례지오여고 쪽으로 가는 도로변 왼쪽에는 신라시대의 석탑이 하나 서 있는데, 이 탑은 보물 제110호로 지정되어 있는 광주동5층석탑이다. 이 탑을 일명 백천사지 석탑이라고도 부르는 이유는 이곳이 백천사지(또는 장원암지)라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귀중한 유물이 현존함에도 불구하고 백천사지에 관한 기록은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다만 「호남읍지(1899)」 및 「광주읍지(1925)」 사찰조의 장원암에 관한 기록중에 “壯元庵: 在州東十里無等山北壯元峯下一名栢川寺”라는 지극히 단편적인 부분만이 보일 뿐이다. 그런데 장원암에 관한 기록을 보면 「輿地圖書(1759)」광주목 사찰조에는 “재주동오리”라 하였는데, 「광주목지」사찰보에는 “재주동십리무등산북장원봉하”라 하여 보다 구체적인 위치를 밝히고 있으나 두 기록 사이에 거리표시가 각각 다르게 나타나 있다. 또「호남읍지」와「광주읍지」의 기록에서는 “재주동십리무등산북장원봉하일명백천사”라 하여 「광주목지」와 동일한 기록을 보이면서 백천사와 장원암을 동일시하고 있다.
그러나 1987년 실시된 무등산 문화유적 지표조사를 통해 장원봉하에서 장원암지로 추정되는 폐사지가 새로 발견됨으로써 이 동오층석탑이 있는 폐사지는 장원암과는 별개의 유적이라 생각된다. 그렇지만 별개의 유적으로 보여지는 이 폐사지의 확실한 명칭을 밝힐만한 자료 또한 미흡한 실정이므로 편의상 이 유적을 장원암지와 구분하여 백천사지라 하였다.
유적의 현재 상황은 현존하는 석탑이외에는 탑 주변에까지 유물들이 들어서 있어 사지의 규모나 성격 파악을 위한 유물수습 등은 거의 불가능한 형편이다. 이 곳에서 1960년 9월 금동종소품 1점이 출토되어 전남대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었으나 1973년 3월 14일 도난당하여 현재는 그 유물을 살필 수 없음이 애석한 일이다.
다. 백천사지 오층석탑
현재 보물 제110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탑은 광주동오층석탑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탑의 양식을 살펴보면 전형적인 2중기단을 갖춘 오층석탑으로서 기단부와 탑신부는 완전하나 상륜부는 노반과 覆鉢 외의 석재는 결실되어 제주가 노출되어 있다. 하층기단의 면석에는 각면에 우주와 撐柱가 각각 둘 씩이며, 상층기단의 면석도 역시 각 면의 우주와 탱주가 각각 둘씩이다. 상층기단 갑석에는 하면에 부연이 있고 상면에는 2단의 각형옥신괴임을 마련하여 탑신부를 받고 있다. 탑신부를 보면 옥개석 층급받침의 수는 초층을 다섯이고 2층 이상은 넷씩이다. 옥신과 옥개석은 각각 1매의 석재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층의 체감비율은 비교적 고른 편이나 옥개석의 폭이 다소 좁아져 고준한 느낌을 준다. 옥개는 낙수면이 짧고 추녀끝은 얇으며 수평을 이루었는데 전각의 반전각은 예리하다.
전체적으로는 신라석탑의 전형양식을 매우 충실히 따르고 있으며 기단부의 양식은 고식에 가까우나, 옥개석의 폭이 좁아져 안정감이 다소 결여된 세장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이 탑의 조성시기는 통일신라 말기인 9세기경으로 추정된다.
1955년 이 탑을 해체복원할 당시에 제4층의 옥신에서 사리구(둥근 靑銅盒)이 발견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이관보존되어 있다. 그후 1961년 재차 보수가 가해져 탑재의 일부를 보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화강암제의 석탑인 이 탑의 규모는 현재고 7.24m이다.
2. 대황사지
가. 위치 : 광주직할시 동구 광산동 현 전남도청 부근일대
나. 연혁
「광주시사(1966)」와 「무등산(1976)」의 기록에 의하면 대황사는 십신사와 같이 11세기에 창건된 고찰로 현재의 전남도청 부근에 있었던 사찰이었는데 구한말에 폐사된 것으로 전하여 지고 있다.
그러나 광주와 무등산 일대의 여러 사암에 대한 자료를 제시해 주고 있는 조선시대의 각종 지리지 등의 문헌자료에는 대황사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구전으로 전하는 대황사의 연혁을 뒷받침할 만한 확실한 물적 증거는 없는 형평이다.
그런데 확실하지는 않으나 이 대황사의 유물이라 전하여 지는 것으로서는 철조비로사나불좌상․미륵입상․재명석등․오층석탑 등이 있다. 이들 중 철조비로사나불좌상은 현재 증심사 비로전에 봉안되어 있고, 미륵입상은 서구 임동(구농고교정, 임동 92-12)에 있는 십신사지 범자비 옆으로 옮겨졌다고 하며, 재명석등과 오층석탑만이 현대의 전남도청내의 정원에 남아 있다. 본 장에서는 도청내에 남아 있는 재명석등과 오층석탑에 대해서만 살펴보고 미륵입상에 대해서는 십신사지 부분에서 언급하도록 하겠다.
다. 유물
1) 재명석등(사진69)
현재 전남도청 현관 앞 정원에 세워져 있는 이 석탑은 원래 광주읍서의 남문내에 있었던 것을 일제때 현 위치로 옮겨왔다고 한다.
이 석등의 형태는 우리나라 석등의 기본형인 8각석등으로서 竿柱石의 형태에 따라 분류하면 8각간주형 석등에 속한다. 석등의 각 부재중 지대석과 보주가 결실되었는데 보주는 현재 다른 석재로 보완되어 있다.
세부양식을 살펴보면, 복연대의 하대석은 마멸이 심해 형태를 알아보기 힘드나 8엽의 연화문으로 보여진다. 그 위에 8각간주를 세우고 단고8엽의 앙연대를 올렸다. 앙연의 상대석 위에 올려진 8각 화사석은 4면에 장방형 화창을 시설하였다. 그 위에 상대석 보다 크기가 작아진 8각 옥개석을 올렸으며, 옥개석 위에는 복발과 앙화가 1석으로 이루어진 상륜부재를 설치하였다.
양식적인 면을 통해 볼 때 이 석등은 대안9년명(고려 선종 10년: 1093년)이 있는 나주서문석등(보물304호)과 같이 신라말 이후의 8각간주형 석등에 속하는 것으로서 그 조성시기는 고려초기로 추정되며, 판독된 명문중 “戊辰”년이 이 석등의 확실한 제작연대라면 고려초기에 해당되는 무진년이 1028년(현종19년)․1088년(선종5년)․1148년(예종2년) 등이므로 나주서문석등과 관련지어 볼 때 11세기를 전후한 시기의 작품이라 생각된다.
2) 대황사지 오층석탑
이 탑 역시 대황사의 유물이라 전하여지는데 현재 전남도청내의 경찰국 앞 정원에 위치한다.
현존하는 탑의 상태는 기단부와 상륜부재가 완전히 결실된 채 5개의 옥개석만이 중첩되어 있다. 옥개석 층급받침의 수는 2․3․5층은 다섯이나 4층은 넷을 보이며 초층은 매몰되어 있는 상태이다.
옥개석의 두께나 크기, 그리고 낙수면의 경사나 우동의 처리 및 전각의 반전각도 등으로 살펴볼 때 단일 석탑의 부재가 아니라 각기 다른 2~3개의 석탑재가 혼합되어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석탑의 조성시기는 이 탑이 완전한 형태가 아니고 더욱이나 각기 다른 석탑재가 혼합되어 있어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옥개석의 두께나 낙수면의 경사, 층급받침의 숫자나 전각의 반전각 등으로 살펴볼 때 대략 고려시대 초기의 작품들이 아닌가 추정된다. 석탑의 현존 규모는 총고 180㎝이고 초층옥개석의 폭은 118㎝이며 5층옥개석의 폭은 93㎝이다.
3. 장원암지
가. 위치 : 광주직할시 동구 지산동 산42번지
나. 연혁
장원암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여지도서(1759)」 광주목 사찰조에 “장원암재주동오리”라 하였고, 「광주목지」사찰조에는 “장원암재주동십리무등산북장원봉하”라고 하여 보다 구체적인 기록을 보여주나 두 기록 사이에는 거리표시가 크게 달라져 있다. 한편 「호남읍지(1899)」나「광주읍지(1925)」에는 “壯元庵在州東十里無等山北壯元峯下一名柏川寺”라 하여 거리와 위치 등은 앞서의 기록을 답습하면서 장원암과 백천사를 동일한 유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런데 1987년에 실시된 “무등산 문화유적조사”를 통해 장원봉(해발 386m) 기슭 해발 약 140m지점에서 새로운 폐사지가 발견되었다. 이 새로운 유적은 장원봉 기슭이란 위치로 보거나 기록에 전하는 치소로부터의 거리로 보거나, 현재 광주동오층석탑이 위치하는 유적보다는 기록에 보여지는 장원암지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생각된다. 뿐만 아니라 장원암지와 백천사지는 동일한 유적이 아닌 별개의 것으로 보여진다(백천사지 부분 참조).
다. 유적의 현황
원래의 장원암지로 추정되는 새로 발견된 유적은 신양파크호텔에서 지산유원지로 들어서는 도로변 왼쪽의 산기슭에 위치한다. 건물지의 규모는 길이 42m․폭 14.5m이며 방향은 서남쪽이다. 전면의 축대는 2단으로 20~30㎝ 정도의 석재를 이용한 거친돌 허튼층쌓기를 보이는데 토사의 퇴적과 함께 파괴가 심한 편이다. 높이는 상단축대가 1.8m 내외이고 하단축대는 1.2m 내외이며 상․하단 축대의 간격은 3m내외이다. 건물지의 동남단과 서남단에 석렬이 노출된 상태로 보아 축대 위에 다시 낮은 기단시설이 마련되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건물지의 규모로 보아 2~3개의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경작지로 이용된 때문인지 초석은 확인되지 않았다.
건물지의 뒤쪽에도 1단의 축대가 있는데 역시 거친돌 허튼층쌓기를 보이며 높이는 1.2m 내외이다. 축대의 석재 사이에 상당수의 와편이 혼입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건물지 동남단에 와편과 토기편 및 자기편이 집중적으로 묻혀 있으며, 주변의 경작지 곳곳에도 와편 및 토기편들이 산재해 있다. 이곳에서 스습된 유물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라. 유물
1) 와당류
수습된 와편은 연화당초문 암막새편․숫막새편․부고 및 문양와편 등이 있는데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연화당초문 암막새편 : 1점의 암막새편이 수습되었다. 중앙에 4엽의 연화문을 중심으로 좌우에 당초문을 거의 대칭적으로 배치하였는데 매우 화사하고 볼륨감있게 표현되었다. 돌출된 상․하의 주연에는 작은 연주문이 일렬로 시문되어 있다. 가는 모래가 섞인 점토를 태토로 사용하였고, 표면은 평면흔으로 물손질의 흔적이 보인다. 현재길이 13.6㎝, 폭6㎝, 두께2.2㎝ 내외이다. 연대는 고려시대로 보여진다.
②숫막새편 : 파편 1점이 수습되었는데, 소문인 주연의 일부만 남아 있을 뿐 내구부분이 모두 결실되어 문양의 형태를 알 수 없다. 굵은 모래가 섞인 점토를 태토로 사용하였고, 표면에는 황포흔과 함께 제과흔이 있다. 소성도가 비교적 낮으며, 두께는 2.3㎝ 내외이다.
③부고 : 기와마루를 구성하는 부고는 완형 1점이 수습되었다. 형태는 장5각형으로 밑변길이 20.3㎝, 높이 7.4㎝(측면4.0㎝, 5.5㎝), 두께 2.5㎝ 내외이다. 양면 모두 물손질한 흔적과 제과흔이 남아 있다. 태토는 굵은모래가 섞인 점토를 사용하였다.
④문양와편 : 모두 파편들인데 문양은 복합문․斜格子文․수지문 등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태토는 대체적으로 굵은모래가 섞인 점토를 사용하였는데 이면에는 繩席痕․세포흔․황포흔․평면흔 등이 고루 나타나 보이며, 두께는 1.6㎝~2.3㎝ 내외이다. 대부분 황갈색을 띠고 있고 만지면 흙가루가 손에 묻어 나온다.
2)토기편 및 자기편
①사기편 : 적갈색 무문토기편이 몇점 수습되었지만 사지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는 것으로 보이며, 그 밖의 대부분은 회청색 경질토기편들인데 기벽에 격자문이 비교적 깊게 시문되어 있다. 이 외에도 섬세한 직선문이 규칙적으로 시문된 토기편도 보이나 격자문과 동질로 생각된다.
②분청사기편 : 수습된 자기편 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분청사기이다. 대부분 내면에는 백상감의 동심원문을 돌렸고, 외면에는 국화문․연화문․초문 등이 시문되었는데, 국화문은 인화문으로서 매우 치밀하게 시문되어 있다.
4. 지산동 사지
가. 위치 : 광주직할시 동구 지산동 산 60번지
나. 유적의 현황
이 폐사지는 지산유원지 보트장 윗쪽의 산기슭 해발 약 140m지점에 위치하는데, 신흥사찰인 동원사에서는 남쪽으로 약 100m거리이다. 현재 동원사 대웅전 앞 정원에 놓여있는 석탑재(옥개석 1점)가 이 폐사지 부근에서 수습된 것이라고 하나 정확한 위치는 확인되지 않았다. 이곳 폐사지 역시 송림사이의 곳곳에 와편이 산재되어 있으나 유원지 공사로 인해 유적의 상당부분이 훼손되고 산사태에 의한 토사의 퇴적이 심해 정확한 규모를 파악하기는 어려운 상태이다. 다만 건물지의 방향만은 주변의 지형조건으로 보아 서향으로 보여진다.
이곳에서 수습된 문양와편을 보면 고기비늘모양무늬와 사선문이 중첩된 복합문이나 마멸이 매우 심한 편이다. 태토는 굵은 모래가 섞인 점토를 사용하였고, 이면에는 황포흔이 있으며 두께는 2.2㎝ 내외이다.
5. 증각사지
가. 위치 : 광주직할시 동구 운림동 산 132번지
나. 연혁 및 유적의 현황
증각사지는 증심사에서 중머릿재로 향하는 도중의 샘터 왼편에 위치한다. 사지 앞에는 현재 대한산악연맹에서 등산인들을 위해 세운 “무등산 산장”이 있고, 1972년 마나슬루 원정에서 조난당한 고 오세근씨의 초혼비가 세워져 있다.
증각사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제봉 고경명의 「유서석록(1574)」에는 증심사에서 중봉(중머리재)을 향해 오르면서 이곳을 거쳐간 사실과 함께 눈에 비친 주변의 모습을 매우 단편적으로 기록하였다. 「여지도서(1759)」에는 “재주동이십리”라 하였고, 「범자교」에는 “구재무등산”, 「광주목지」에는“證覺庵俱在無等山今廢”라 하여 증각사의 위치와 거리에 관한 매우 단편적인 기록만 보일 뿐 창건에 관한 사력을 밝힐만한 자료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유서석록」과 「여지도서」를 통해 16세기에서 18세기 중엽까지는 존속했었던 사찰임을 알 수 있으나, 그 이후의 어느 시기에 폐지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한편 이곳 증각사지는 해방이후 정진덕씨에 의해 천문사가 세워졌다가 무등산 무당촌 철거시에 폐지된 곳이기도 하다.
증각사의 건물지는 샘터의 좌측 언덕위에 있는데, 長 25m․폭 12m의 서향한 건물지이다. 근년에 천문사가 있을 때 이곳은 밭으로 경작되었던 곳으로서 경작으로 인한 파괴가 심하여 다른 遺構를 확인하지 못하였으며, 주변에 흩어져 있는 와편도 무문으로 특별한 문양이 보이지 않는다. 이곳에서 청동제 식기류 등이 수습된 적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확인할 수 없다.
6. 운림동 봉황대 사지
가. 위치 : 광주직할시 동구 운림동 산132-1
나. 유적의 현황
봉황대는 무등산 등산로중 대표적인 휴식처로서 너덜겅 약수터와 전 백운암지의 중간에 위치하며 해발 약 460m 지점이다. 이 봉황대 역시 폐사지로 추정되는데, 주변에는 많은 와편과 토기편 및 자기편이 산재되어 있다. 오랫동안 등산객들의 휴식공간으로 이용되어 온 관계로 많은 지형변경이 이루어져 법당지 등을 확인하기는 어렵다. 봉황대의 전체 규모는 길이 43m․폭 22m이며, 전면의 축대 높이는 3~4m 내외인데 토사의 퇴적과 파괴가 심해 정확히 알 수 있는 없으나 토축 위에 석축을 쌓은 것으로 보여진다. 등산로에 접하여 석축렬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기단시설을 마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대략 2~3개의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건물지의 북쪽 입구에는 최근에 근처의 자연석을 모아 쌓아놓은 돌무더기탑이 하나 세워져 있다.
다. 유물
주변에서 스습된 유물로는 문양와편과 토기편 및 자기편이 있는데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문양와편 : 수지문과 사격자문을 보이는데 수지문 와편은 굵은 모래가 섞인 점토를 태토로 사용하였고 이면은 평면흔이며 두께는 1.8㎝ 내외이다. 사격자문 와편중 1점은 가는 모래가 섞인 점토를 태토로 사용하였고 이면은 황포흔을 보이며 두께는 1.8㎝ 내외이다. 나머지 1점은 굵은 모래가 섞인 점토를 태토로 사용하였고 이면에는 황포흔과 제과흔이 보이며 두께는 2.2㎝ 내외이다.
2) 사기편 및 분청사기편 : 사기편은 회청색 편질토기로서 외벽에는 격자문이 깊게 시문되어 있고 내벽에는 제과흔이 보인다. 분청사기편은 사발편으로서 내벽에는 바닥의 윗쪽으로 백토로 분장하였고, 바닥에는 굽받침의 흔적이 있는데 비교적 깨끗하게 처리되었다.
7. 운림동 전 백운암지
가. 위치 : 광주직할시 동구 운림동 산
나. 유적의 현황
백운암지로 전하여지는 이 폐사지는 앞서 살핀 봉황대 사지에서 중머릿재로 가는 도중의 덕산너덜 서북쪽에 위치한다.
건물지의 규모는 길이 41m․폭 22m이며 방향은 서향이다. 전면축대의 높이는 8m 내외인데 경사진 토대 위에 2~3m 정도의 석축을 쌓아 보강하였으며 석축은 허튼층쌓기를 보인다. 건물지의 후면축대는 높이 1.7m 내외인데 역시 자연석을 이용하였으나 엿모쌓기 형태를 보이고 있다.
건축지의 현재 상태는 기단시설의 석재로 생각되는 생각되는 돌들이 매우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어 법당의 규모 등을 살피기가 곤란하다. 우물은 남․북에 2개가 있는데, 석재로 결구된 남쪽의 샘은 현재까지도 식수로 이용되고 있다. 그리고 축대 가까이에 확돌이 하나 있는데 가로․세로 70㎝, 높이 34㎝ 정도의 자연석재를 지름 46㎝․깊이 10㎝ 정도로 상면만을 가공하여 사용하였다.
다. 유물
건물지 주변에서 수습된 유물은 문양와편과 토기편 및 자기편이 있는데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문양와편 : 시문된 문양은 수지문․수엽문․魚鱗文 및 복합문 등 매우 다양하게 보여지는데, 태토는 모두 굵은 모래가 섞인 점토를 사용하였고 이면에는 평면흔․세포흔 각1점을 제외하고는 모두 황포흔을 보인다. 복합문의 구성은 사선문이 서로 중첩되어 일부 사격자문의 형태를 보이기도 하며, 사선문․어린문․수지문 등이 서로 중첩된 듯한 형태와 수지문과 사선문․동심원문 등이 서로 중첩된 형태 등이 보인다. 전체적으로 두께는 얇은 것이 1.8㎝ 내외이고, 두터운 것은 2.3㎝ 내외이다.
2) 토기편 및 자기편 : 토기편은 회청색 경질토기로써 외면에 격자문이 얇게 시문되어 있고 내면에는 타격흔이 남아 있는데 두께는 고르지 않으나 0.8㎝ 내외이다.
청자편은 사발의 저부로서 내면의 바닥과 굽에 굽받침의 흔적이 있는데 굽처리는 비교적 깨끗한 편이다. 기벽의 두께는 저부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급격하게 얇아지고 있다. 색조는 약간 담황색을 띠고 있다.
백자편은 접시의 구연부와 사발의 저부인데, 사발편은 내면 바닥과 굽에 모래굽의 흔적이 있는데 그 처리가 깨끗하지 못하고 외면의 유약상태도 균일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기형도 매우 투박한 편이다. 조선후기 民窯의 제품으로 생각된다.
8. 기타 유물
1)호남동 천주교회내 연화대석재
가. 위치 : 광주직할시 동구 호남동 67번지
나. 유물의 현황
현재 호남동 천주교회의 입구 왼쪽에는 등나무를 올린 옥외 휴게실이 마련되어 있는데, 이곳에 화강암제의 연화대석 1점과 장대석 2점이 돌담장을 따라 담장 밑에 나란히 놓여 있다.
1점의 연화대석은 복연대로서 일부분이 결실되었는데 현재 규모는 길이 79㎝, 폭43㎝이며 지면 위에 노출된 높이는 9㎝이다. 전면과 좌,우면에 중고복연이 조식되어 있는데 전면에는 모두 6엽의 연화문을 보인다. 2점의 장대석은 소문이며 규모는 1점은 길이 198㎝, 폭 43.5㎝이며 지면 위에 노출된 높이는 9㎝이다. 다른 한점은 길이 106㎝, 폭 34.5㎝이며 현존 높이는 5㎝이다.
이들 복연의 연화대석과 장대석은 불상의 대좌시설로 보여지며 그 조성시기는 대략 고려시대로 추정된다. 이곳 호남동 천주교회는 과거에 현준호씨 저택이 있었던 곳으로 이들 석조유물들은 그 당시 어딘가의 폐사지에서 수습되어 옮겨왔을 가능성이 크지만 그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2) 불노동 노인당내 석탑재
가. 위치 : 광주직할시 동구 불노동 11-2
나. 유적의 현황
현재 불노동 노인당(수녕당)의 정원내에 석탑의 옥개석 1점이 있는데 덩원의 배수시설 사이에 돌다리처럼 양쪽이 걸쳐진 상태로 놓여있다. 옥개석의 석질은 화강암이고, 규모는 83㎝X80㎝의 크기에 높이는 40㎝이며 층급받침의 수는 넷이다. 옥개석의 낙수면 부분이 층급받침 부분에 비해 훨씬 두터워 둔중한 느낌을 주며 낙수면의 경사도 매우 급하다. 옥개석 상면에는 낮은 1단의 각형 옥신괴임이 마련되어 있는데 크기는 39.5㎝X39.5㎝를 보인다.
9. 미확인사지
지금까지 살펴본 외에도 문헌자료에 의하면 훨씬 많은 폐사지가 보여지고 있는데 행정구역상 동구관내에 속하는 것으로서 아직 그 확실한 위치가 파악되지 않은 유적은 다음의 표와 같다.
그 밖의 행정구역상 화순군 이서면에 속하는 규봉암․석불암을 비롯하여 그 위치가 확인된 입석암지․불사의암지․염불암지․문수암지 등의 폐사지에 대해서는 본호에서는 다루지 않았다.
<동구관내 미확인사지>
유적명 |
소재지 |
문헌의 기록내용 |
문헌자료 |
불명암 |
? |
․재주동이십리 ․재증심사동 |
여지도서 광주목지 |
선원사 |
? |
재현동이리평지 |
신증동국여지승람 |
개원사 |
? |
․재주동이십리 ․구재무등산금폐 |
여지도서 광주목지 |
장불사 |
장불치 |
․화순 만연에서 향로봉을 돌아 장불사를 거쳐 염불암으로 찾아왔다. ․재무등산장불치금폐 |
유서석록
광주읍지 |
성적골사지 |
소태동 |
절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근처에 절이 있었음 |
한국지명총람(13) |
절골사지 |
소태동 |
김실북쪽에 있는 골짜기, 절이 있었음 |
〃 |
북당골사지 |
운림동 |
맹맛골서쪽골짜기, 불당이 있었다함 |
〃 |
붓당골사지 |
운림동 |
제1수원지북쪽 골짜기, 불당이 있었다함 |
〃 |
장독께사지 |
운림동 |
천짓당북쪽골짜기, 장독만한 부도가 있음 |
〃 |
도장골사지 |
지산동 |
단사동쪽에 있는 골짜기, 근처에 절이 있었음 |
〃 |
북당골사지 |
지산동 |
단사동북쪽에 있는 골짜기, 불당이 있었다함 |
〃 |
3. 신흥사찰
본 장에서는 1910년대 이후에 창건된 신흥사찰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이곳 동구관내의 신흥사찰은 모두 60여개소에 달하는데 몇몇 예를 제외하면 대부분 1960년대 이후에 창건된 군소사암들로서 사찰의 내력 뿐만이 아니라 그 규모 또한 사격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빈약한 모습을 벗지 못하지 있다.
동구관내의 신흥사찰을 종파별로 살펴보면, 조계종계 사찰이 14개소, 태고종파 사찰이 14개소, 총화종계 사찰이 12개소로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그 밖에 원효종계 6개소․정토종계 2개소, 일승종계 4개소, 법화종계 2개소, 화엄종계 2개소, 진각종과 미륵종계가 각 1개소씩이며 원불교 교당 4개소가 있다.
이들 중 특기할 만한 유물을 갖춘 사찰에 대하여 우선적으로 살펴보도록 하며 기타의 사암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목록표를 통해 정리하고자 한다.
1. 관음사
가. 위치 : 광주직할시 동구 충장로 4가 54번지
나. 사격 : 대한불교 조계종 제18교구 백양사 포교당
다. 연혁
관음사는 1916년(대정 5년) 9월 5일 일승 遠藤眞海가 창건하여 1945년 8․15 당시까지 광종사라 하였는데, 광복과 함께 석파 손상만스님과 문주심행이 입주하여 관음사로 개사하였다.
1951년 석파스님이 입적하고 峯霞스님이 주석하였으며, 1962년 한상인스님이 주지로 취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66년 보문유치원을 개원하였고, 1973년에는 불서의 출판과 보급을 위한 7葉窟을 설립하고 만다나합창단을 창단하였다. 1979년 1월 17일에는 백제범종을 재현하여 진좌하였으며, 1981년 5월 10일에는 사보 관음지를 창간하였다.
현재 관음사의 포교활동을 위한 조직을 보면, 총신도회(불교보문회) 아래에 어린이부(불교연화어린이회․불교보문어린이회)․중등부(광주불교학생회)․고등부(광주불교학생회)․대학부(광주대학생불교회)․鹿苑部(광주청년불교회)․영산부(부녀회)․원주부(극락계노인회) 및 유마부(거사회) 등을 두어 신행활동을 펴고 있다.
라. 유물
1) 전각
관음사의 건물은 본전인 관음전(보광전)을 비롯하여 보문유치원․범종각․寮舍體 등이 있으나 본 사찰의 내력이나 활동에 비해 비교적 협소하고 퇴락한 모습을 보인다.
①관음전 : 관음사의 본전건물로서 보광전이라고도 한다. 정면 3간․측면 2간의 일본식 본조건물인데 지붕은 근년에 슬레이트 골기와로 개조되었다.
이 관음전에는 수점의 정화가 봉안되어 있는데 그중 신중정화는 “대한광무9년을사5월일전라북도 정읍 내장산 靈隱司造成仍以碧蓮庵奉安”이란 화기를 통해 1905년 영은사에서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②보문유치원 : 본 유치원은 1966년 3월 9일 개원되었는데, 시멘트 벽돌 건물에 지붕은 슬레이트 골기와이다.
③범종각 : 관음사의 무등원종을 진좌하기 위해 1979년에 건립된 전각이다. 정․측면 각 1간의 건물로서 원형의 초석 위에 배흘림이 뚜렷한 원주를 세웠으며, 전각의 기능상 벽면을 쌓지 않았다. 겹처마 사모지붕의 건물이다.
2)관음사 무등원종
범종각에 진좌된 무등원종은 백제범종재현의 대원에 의해 이루어진 結晶이다. 1973년 12월의 범종 조성계획에서 1979년 1월 17일 관음사의 진좌되기까지 한상인 스님의 헌신적인 노력과 열성이 담겨진 작품이라 하겠다.
무등원종의 설계상의 모든 비율은 상원사동종을 기준으로 하였는데, 높이는 1,047배, 상부치경은 1,083배, 구경은 1,065배 확대시켜 상원사종의 劣長한 점과 성덕대왕신종의 중후한 점을 보완하였다고 한다.
비천상은 계유명 아미타여래삼존석상의 좌우 秦樂像을 기본으로 하여 두발을 쌍발로 하고 안면은 소녀상으로 하였으며, 상원사동종 비천의 유려한 천의와 쌍좌형을 참고하면서 공주박물관종의 시원스럽고 활기찬 천의의 표현을 강조하였다. 또한 종전의 많은 종들이 전후․사방의 비천이 동일한 단점을 보완하여 大笭과 腰鼓를 1조, 笙篁과 唐琵琶를 1조로 하여 管․絃․吹․打의 사중진을 대좌시켰다.
견대와 구대 및 유곽에 시문된 인동문은 제석사지 출토의 인동문평와와 인동연화문전을 바탕으로 하여 조각하였으며, 幢座의 연화문은 부여 규암리 출토의 연화문전을 번본으로 하였다.
이 무등원종의 규모는 총고 174.8㎝, 구경 96㎝이며 종의 실중량은 1540㎏이다. 또한 고유진동수는 124.2 싸이클/초이고 울림수는 0.8회/초이다.
3) 관음사 석탑재
현재 관음사 범종각내에는 2점의 석조물이 수습되어 있는데, 하나는 인왕상이 조각된 장방형석재이며 다른 하나는 연화문이 조각된 8각 옥개석이다.
이 중 인왕상이 양각된 석재의 성격은 그 규모나 양우주가 없이 중앙에 탱주만 조출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이중기단을 갖는 상층기단중 측면부분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석탑의 상․하층기단 면석이나 탑신부의 옥신부분에 팔부신상․사천왕상․인왕상 등을 조각하여 장식하는 모습을 통일신라 후기에 많이 나타나는데, 전남 지방에서는 구례 화엄사 서5층석탑(보물133호)이나 광양 중흥산성 3층석탑(보물112호) 등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이 탑재에서는 탱주로 구분된 좌우면에 각기 인왕상을 조각하였는데, 좌측상은 마모와 파손이 다소 심한 편이나 우측상은 볼륨감 있는 조각 모습이 잘 남아 있다. 유려한 의습의 처리나 사실적이고 생동감 있는 표현은 신라말기의 조각기법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하겠다. 이 석탑재의 규모는 길이 91㎝․높이 59.5㎝․두께 26.5㎝이며 석질은 화강암이다.
4) 관음사 석등재
이 석등재 역시 범종각내에 놓여 있는데 8각석등의 옥개석이다. 상부의 중앙에 상륜시설을 결구시키기 위한 직경 13㎝ 정도의 원형공이 마련되어 있고, 이 원형공을 중심으로 단고8엽의 연화문을 조식하였을 뿐, 경사가 완만하고 평박한 낙수면에는 기와골의 보각이나 전각 끝의 귀꽃장식 등은 보이지 않는다. 또한 낙수면의 절반 정도를 덮고 있는 연화문의 조식도 도식적이며 평면적인데 8엽 연화문의 사이 사이에 마련된 간고이 지나치게 강조된 느낌을 준다.
옥개석의 크기는 직경 80㎝이고 최대 두께는 22㎝이며, 석질은 화강암이다.
5) 관음사 연화대석
이 연화대석은 현재 관음전 앞에 놓여 일부분이 파손되어 결실된 상태이다. 상․하양면의 다듬어진 상태로 보아 대좌시설의 하대석인 복연대로 생각되며 복연은 중고8엽으로 복원된다. 상면에는 낮은 1단의 8각 각형괴임이 마련되어 있다. 이 복연대의 연화문 역시 매우 평면적이고 도식적인 퇴화된 조각기법을 보이고 있다.
2. 원각사
가. 위치 : 광주직할시 동구 금남로 4가 51번지
나. 사격 :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송강사 포교당
다. 연혁
원각사의 창건은 현재 원각사 경내에 세워진 「송은이공규석․박씨대덕화 헌성기념비」에 의하면, 1914년 4월(불기 2941년 갑인 維夏)에 선암사의 포교당으로서 이루어졌다. 금봉의 초창이래 신봉 및 淸昊스님으로 이어져 1932년 봄 (임신 春) 포교사 하석이 부임하였다. 그후 1939년 가을(을묘 秋) 이필중이 선친 이규석의 유지를 받들어 중수․확장하였다.
원각사는 초장 당시에는 선암사의 포교당으로서 출발하였으나 현재는 송광사 포교당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라. 원각사의 건축적 특성
1) 배치
일반적으로 양반가에서 볼 수 있는 솟을대문이 대로에 직접 접해있다. 솟을대문이 사찰의 문으로 사용된 예도 퍽이나 드물다. 솟을대문을 지나면 축을 이루어 극락전이 자리하고 있고 그 좌우측에 요사체가 배치된 아주 단촐한 소규모 사찰 형식이다. 솟을대문 옆에는 대문에 연결하여 서점과 사무소를 현대식 건물로 지어 외부와 차단시키고 있다.
경내의 마당에 불상이 조각되어 있는 탑재와 상륜부가 남아 있고 그 외에는 별다른 유구가 보이지 않는다.
2) 극락전
원래는 정면 3칸․측면 2칸에 8작지붕인 다포식을 한 건물이었던 것을 근년에 정면과 측면을 1칸씩 증축하여 정면 5칸․측면 3칸으로 만든 건물이다. 원래의 건물은 다포식 건물로 창방과 평방 위에 외1출목의 공포를 얹고 축조되었는데 현재 그 모습이 잘 나타나고 있다. 현재는 옥내에 있기 때문에 그것이 마치 천장을 장식해 놓은 것 같이 보이나 건물에 비하여 포작이 너무 크고 정교하지 못하여 세련된 품격이나 연륜이 쌓인 고격을 나타내는 데에는 부족하다.
증축된 현재의 모습을 보면, 시멘트 기단위의 모서리에 장대석을 놓아 기단을 형성하고 다듬은 바형초석 위에 방주를 세웠다. 포작이 없는 민도리집으로 납도리를 벽면의 상부에 걸쳐 서까래를 받치고 있다. 지붕은 기존 건물의 지붕밑에 골슬레이트를 겹쳐서 연결․확장하였다. 내부의 가구형식은 천장을 합판으로 마감하여서 보이지 않으며, 노출되어 있는 외부 벽면이나 창호는 일반적인 사찰에서와 같이 심벽구조로 하였으며 정면의 창호는 정성을 들여 다듬었다.
3) 요사체
대웅전의 좌우측에 요사체를 두었는데 우측의 요사체는 정면 4칸․측면 2칸의 전퇴인 살림집과 유사한 모습이며 우측의 요사체는 벽돌로 지어 주지스님이 기거하는 현대식 건물이다.
4) 솟을대문
이 솟을대문은 일반적으로 반가인 상류주택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문간체와 거의 흡사하다. 도로에 면한 곳에 원형주초를 놓고 내외의 변주는 원주, 내진주는 방주를 썼다. 중앙간은 중층으로 루마루 형식을 취하였고 2층의 전후에 유리창을 달았다. 좌우칸은 원래 문지기가 살았을 것이나 현재는 서점과 사무실로 쓰고 있다.
3. 文彬精舍
가. 위치 : 광주직할시 동구 학운동 96번지
나. 사격 :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 직할
다. 연혁
문빈정사는 1969년(기유) 5월에 장문빈여사에 의해 창건된 원찰로서, 창건 당시에는 최종산 선사가 주석하였고 그후 김석산 스님을 거쳐 현재는 학봉 지선스님이 주지를 맡고 있다.
문빈정사의 내력을 알려주는 기록으로서 입구의 부도․비전에 세워진 「청신여보시심장문빈행적비」와 「석산대종사홍법기념비」등이 있다.
라. 문빈정사의 건축적 특성
∙일주문
다포계의 8작지붕인 다소 낮은 전형적인 사찰의 일주문이다. 굵은 기둥위에 창방과 평방을 얹고 도리방향으로 용두형부재를 각 1기씩 끼워넣었으며 그 위에 주두를 놓은 다음 외3출목, 내3출목의 다포를 주간에 2기, 모서리에 1기씩 설치하였다.
낮은 기둥에 비해 지붕이 큰 문으로 근년에 건립된 건물이다.
∙종각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인 중층문루형 종각이다. 중앙문을 통로로 좌우칸은 창고와 방으로 사용하고 있다. 중층의 루마루 위에는 종과 북이 설치되어 있다.
조그마하면서도 높은 감을 준다.
∙상락정
8각형 목조건물로 한국의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8각평면인데다 정이란 건물의 명칭 또한 희귀하다. 사찰의 전각으로 8각형평면을 보인 것을 고대사찰인 고구려시대의 사찰로 추정되는 평양 청암리사지의 탑지와 일본 법륭사의 몽전 등에 불과하다. 물론 이 건물은 근래에 건립된 것이다. 상기 건물과 같은 의미를 부여하기는 어려우나 퍽 흥미로운 건물이다.
8각형의 낮은 시멘트 기단 위에 3단의 굽이 있는 8각형초석을 놓고 8각기둥을 세웠다. 기둥위에는 운형보아지를 3단으로 중첩하여 얹었는데 익공형식을 본딴 것 같다. 주간에는 창방을 걸치고 1기의 화반을 중앙에 두어 장혀받침 8각형도리를 얹었다. 지붕은 겹처마로 청기와를 얹었고 8각지붕 상부에는 절병통을 설치하였다. 알미늄샷쉬로 문틀을 하고 유리를 끼워 넣어 품위가 없는 듯하다.
∙보은각
정면 1칸, 측면 1칸의 조그마한 건물로 본 정사의 건립자와 그 가족들의 영정을 모셨다. 낮은 시멘트 기단 위에 북 모양의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다. 기둥사이에는 창방을 걸쳤고 그 위에 8기의 소로를 두어 장혀받침 굴도리를 얹었다.
겹처마에 붉은색 한식기와를 얹은 8작지붕이다.
∙대웅전
2단의 높은 축대 위에 세운 정면 5칸, 측면 3칸의 8작지붕을 한 본전이다. 북 모양의 초석 위에 두리기둥을 세운 다음 2익공식과 외2출목의 주심포양식을 혼합시킨 조선후기양식을 본딴 근래에 건립된 것이다.
중앙의 어칸과 좌우기둥 위에는 용머리 장식을 얹었으며 어칸과 협칸이 넓고 퇴칸이 좁다.
내진간에 고주가 없이 통문으로 대들보를 걸쳐 공간을 넓게 하였으며 뒷면의 불단부분은 다시 증축하였다. 가구형식은 무고주7양구조로 우물천장을 하였고 바닥은 장마루를 깔았다. 형량을 용머리 장식을 한 것도 특이하다. 창호는 4분합 혹은 2분합 빗살문이다. 지붕은 겹처마로 녹색으로 채유한 기와를 얹었다.
4. 동원사
가. 위치 : 광주직할시 동구 지산2동 1-6번지
나. 사격 : 대한불교 법화종 동원사
다. 연혁
지산유원지의 윗쪽 장원봉 기슭에 위치한 동원사는 청신녀 박해월(속명 박금순)에 의해 1965년 10월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경내에 세워진 박해월의 행적비에 의하면 해월이 신병으로 수년간 신고중 부처님의 가호로 신병을 물리치게 되자 그 은총에 보답코자 본 사찰을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라. 유물
1)전각
동원사의 전각은 입구에 세워져 출입문을 겸한 2층루각인 종고루와 본전인 대웅전 및 요사체로 이루어졌다.
대웅전은 정면 4간․측면 2간의 서남향한 단층 8작지붕의 건물인데, 전통적인 사찰의 전각이라기 보다는 민가형 건물로서 지붕은 붉은 시멘트기와를 올렸다. 1965년 동원사 개창 당시에 세워졌는데 처음에는 법당과 요사체를 겸하였으나, 1974년 요사체를 신축한 이후 완전히 법당으로 개조되었다고 한다.
입구의 종고루는 정면 3간․측면 1간의 2층루각인데 아래층은 출입문으로 2층은 종루수로 이용되고 있다. 아래층은 콘크리트 기둥에 시멘트 벽을 쌓았는데 2층은 기능상 벽면을 쌓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콘크리트 건물위에 한식기와 지붕을 얹은 복합적인 형태이며 2층의 콘크리트 난간시설과 아래층에 바로 붙어있는 철제 셔터문시설이 한식기와를 얹은 누각의 품격을 반감시키고 있다.
2) 동원사 석탑재
대웅전 앞 중정에 석탑재 1점이 놓여있다. 이 석탑재는 옥개석으로서 뒤집혀진 상태로 놓여져 있는데 층급받침의 수는 다섯이다. 전각부분과 네 모서리가 모두 파손되어 그 모습을 전혀 살필 수 없다. 현존하는 크기는 가로 세로 모두 115㎝ 내외이며 옥개석의 두께는 현재 35㎝정도로 보이나 뒤집힌 상태로 묻힌 것을 감안하면 40㎝내외정도로 생각된다. 옥개석 하면(현재 상태로는 윗면)에 직경 67㎝, 깊이 5㎝의 원형 홈이 파여 있는데, 이것은 화엄사 동5층석탑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이 특이한 결구방식이 아닌가 생각된다.
현재 남아 있는 다른 부재가 없어 확실한 부위나 정확한 연대를 밝히기는 어려우나 화엄사 동5층석탑과 같은 특이한 결구방식으로 살펴 볼 때 신라말에서 고려초기에 걸쳐 조성되었던 석탑의 한 부분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옥개석은 원래 이 동원사에서 터에 유존했었던 것이 아니라 창건 당시 지산유원지 보트장 위쪽의 숲속에 놓여 있던 것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온 것이라 하나 그 저확한 위치는 확인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일대에 대한 지표조사를 통해 와편이 산재되어 있는 폐사지(전장 지산동 사지 참조)를 확인할 수 있었다.
3) 청신녀 박해월 부도
동원사의 창건주 박해월의 부도로서 대웅전 앞 중정의 서쪽에 별도의 단을 마련하여 안치 하였다. 부도의 기본평면은 원형으로 앙연대 위에 장타원형의 탑신을 올리고 그 위에 두툼한 귀꽃장식이 마련된 8각옥개석을 올렸으며, 상륜부는 1단의 앙화 위에 큼직한 연봉형 보주를 올렸다. 탑신의 전면에는 당호를 새기기 위한 장타원형 구획을 마련하였으나 당호는 새겨지지 않았다. 박해월행적비와 함께 1974(갑인)년에 조성되었는데 1986년 박해월이 입적하자 이 부도에 안치하였다고 한다.
<동구관내 신흥사찰 목록표>
사찰명 |
소재지 |
소속 |
창건주 |
창건년대 |
현주지 |
관음사 |
동구 충장로 4가 54-1 |
조계종 |
원등진해(일) |
1916(광종사) |
원진 |
원각사 |
〃 금남로 4가 51 |
〃 |
금봉 |
1914 |
현지 |
문빈정사 |
〃 운림동 96 |
〃 |
장문빈 |
1960 |
지선 |
광륵사 |
〃 운림동 392 |
〃 |
김정죽 |
1955 |
이영 |
성불사 |
〃 운림동 490 |
〃 |
정성택 |
1981 |
법운 |
대광사 |
〃 학2동 535 |
〃 |
최병채 |
1950 |
정선 |
천룡사 |
〃 용연동 240 |
〃 |
정용진 |
1987 |
벽상 |
신광사 |
〃 지산동 495 |
〃 |
안말례 |
1946 |
혜운 |
연화사 |
〃 지산동 448-35 |
〃 |
한창연 |
1979 |
명신 |
자운암 |
〃 지산동 76-1 |
〃 |
․ |
․ |
경준 |
선덕사 |
〃 산수동 241-16 |
〃 |
신점덕 |
1963 |
행법 |
서광사 |
〃 산수2동 401-75 |
〃 |
제내순 |
1968 |
|
지원정사 |
〃 산수2동 553-26 |
〃 |
손태환 |
1984 |
도륜 |
수효사 |
〃 계림1동 505-230 |
〃 |
정채덕 |
1986 |
우담화 |
개안사 |
〃 운림동 413 |
태고종 |
박동석 |
1970 |
박동석 |
사찰명 |
소재지 |
소속 |
창건주 |
창건년대 |
현주지 |
흥국사 |
동구 운림동196 |
태고종 |
진낙섭 |
1981 |
진낙섭 |
성군사 |
〃 학운동 221-1 |
〃 |
고재의 |
1977 |
고거산 |
세심정사 |
〃 학운동 558 |
〃 |
김동곤 |
1979 |
김동곤 |
광명암 |
〃 학2동 30-12 |
〃 |
유복천 |
1955 |
상술 |
실상사 |
〃 학2동 660 |
〃 |
윤수리 |
1963 |
윤법천 |
법연정사 |
〃 소태동 827 |
〃 |
정법연 |
1950 |
정법연 |
용화정사 |
〃 소태동 555 |
〃 |
김봉옥 |
1968 |
혜광 |
보수원 |
〃 소태동 532-54 |
〃 |
․ |
․ |
이복련 |
금어사 |
〃 용산동 301 |
〃 |
․ |
․ |
김남균 |
동국사 |
〃 용산동 386-1 |
〃 |
|
|
|
보덕사 |
〃 지산동 170-12 |
〃 |
김영기 |
1945 |
김수만 |
법선사 |
〃 지산동 43 |
〃 |
박종렬 |
1966 |
박종렬 |
만경사 |
〃 산수2동 31 |
〃 |
김성환 |
1940년대 |
정산 |
도불사 |
〃 산수3동 114-4 |
원효종 |
김춘화 |
1976 |
정재석 |
운림사 |
〃 학운동 979 |
〃 |
이보광화 |
1978 |
이보광화 |
대각사 |
〃 학운동 713-12 |
〃 |
이자비화 |
1977 |
이자비화 |
흥림사 |
〃 학운동 275 |
〃 |
․ |
․ |
김천정 |
천왕사 |
〃 소태동 730-5 |
〃 |
․ |
․ |
배법웅 |
오성사 |
〃 소태동 757 |
〃 |
․ |
․ |
오복순 |
동원사 |
〃 지산동 1-6 |
법화종 |
박해월 |
1965 |
박지각 |
칠원사 |
〃 지산동 104 |
〃 |
김용주 |
1967 |
김혜명 |
동곡사 |
〃 운림동 산188-1 |
일승종 |
김혜림 |
1977 |
김혜림 |
보현사 |
〃 운림동 717 |
〃 |
이남순 |
1977 |
․ |
한승사 |
〃 학운동 873-37 |
〃 |
․ |
․ |
선혜 |
대원사 |
〃 계림2동 499-3 |
〃 |
․ |
․ |
지영 |
대광사 |
〃 운림동 718 |
총화종 |
․ |
․ |
․ |
운림사 |
〃 운림동 797 |
〃 |
․ |
․ |
․ |
종앙정사 |
〃 운림동 산205 |
〃 |
․ |
․ |
․ |
송암사 |
〃 학운동 880 |
〃 |
․ |
․ |
․ |
천사 |
〃 학동 278 |
〃 |
․ |
․ |
․ |
태봉사 |
〃 소태동 787 |
〃 |
․ |
․ |
․ |
오성암 |
〃 소태동 750 |
〃 |
․ |
․ |
․ |
희룡사 |
〃 소태동 788 |
〃 |
․ |
․ |
․ |
불광사 |
〃 지산동 122-6 |
〃 |
문원호 |
1953 |
문원호 |
향원사 |
〃 지산동 산64 |
〃 |
․ |
․ |
․ |
장원사 |
〃 산수3동 16-3 |
〃 |
이한규 |
․ |
이한규 |
단명암 |
〃 계림동 292 |
〃 |
․ |
․ |
․ |
남선심인당 |
〃 학동 904-14 |
진각종 |
고봉성 |
1963 |
․ |
성임사 |
〃 소태동 722-1 |
미륵종 |
김득룡 |
1973 |
정각심 |
금곡사 |
〃 학1동 51-35 |
정토종 |
․ |
․ |
․ |
문수암 |
〃 계림동 521-2 |
〃 |
․ |
․ |
․ |
천불사 |
〃 용산동 636-126 |
화엄종 |
민덕근 |
1968 |
지한 |
관음정사 |
〃 소태동 438 |
〃 |
정옥현 |
1953 |
․ |
원불교광주교당 |
〃 궁동 40-1 |
원불교 |
정성의행 |
1947 |
|
〃 남광주교당 |
〃 학2동 595-5 |
〃 |
|
1968 |
|
〃 동광주교당 |
〃 계림동 505-569 |
〃 |
|
1971 |
|
〃 산수동교당 |
〃 산수2동 556-56 |
〃 |
|
1983 |
|
출처:광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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