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북구지역
1. 현존사찰
1. 원효사
가. 위치 : 광주직할시 북구 금곡동 846번지
나. 사격 :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송광사 말사
다. 연혁
원효사는 무등산 북쪽 기슭의 원효계곡에 위치하는데, 이곳은 광주시내에서 약 12㎞거리이며 무등산 집단시설지구의 중심이기도 하다. 계곡을 건너 의상봉(해발 530m)․윤필봉과 멀리는 천왕봉을 마주하고 있다.
원효사 창건에 관한 기사로서 「조선사찰사료」에 전하는 원효암중건기에
「瑞石山之北 有元曉庵 新羅國師元曉 愛其山明水麗築庵 而居乃 以其名之 始創年代 雖未可攷要 在於法興智證 兩朝之間 而瑞石爲湖南之明山 元曉爲瑞石之舊刹也...」
라는 기록이 보인다. 그러나 신라 지증․법흥왕대(500~539)의 설이나 원효국사(617~686)의 창건설도 고승대덕을 인입하여 창사의 대업을 빛내고 연대를 높이려는 경향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고려 충숙왕대(1314~1339)의 창건설과 충숙왕대의 중창설 등이 있는데, 1980년 6월에 실시된 발굴조사에서 수집된 출토유물 등으로 비추어 볼 때 원효사의 창사시기는 신라말기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아울러 시대적인 배경으로서 신라의 화엄사상은 왕실의 이념을 대변하는 사상이라 하겠는데, 하대로 접어들면서 왕실의 세력이 강화되고 또 새로운 선종사상이 도입되면서 창사 활동이 지방의 호족들과 연결되어 수도권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에서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게 되며 이러한 과정에서 선종9산문이 형성되기에 이른다. 광주지역에서도 철감선사의 창건으로 전하는 증심사와 약사사의 예가 그것이라 하겠으며, 이 시기에 조성된 유물로서 현존하는 것이 증심사 철조비로사나불좌상과 삼층석탑, 약사사 석조여래좌상과 삼층석탑, 백천사지 5층석탑 및 담양 개선사지 석등 등이 보여지고 있어 활발한 불교문화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원효사의 창건도 이러한 신라하대에 소규모 암자로 이루어졌다가 고려 충렬왕대에 이루러 품격을 갖춘 사찰로 중창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또는 기록에 의하면 “정유재란(1597)때 灰燼된 것을 광해군 원년(을유: 1609) 증심사를 4창한 석경이 중창하였고, 1636년(崇禎병자 : 인조14) 신원대사가 중수하였고, 1637년(崇禎丁丑) 옥견대사가 32불을 조성 봉안․중축하였으며, 1685년(신원후50년) 신옥․정식이 기와 보수, 1789년(정묘기유 : 정조 13) 회운대사가 선방 중창, 1802년(壬戌) 법당 중창, 1831년(순조신묘 : 순조 31) 회운의 제자 乃圓․의관이 재중수․단청, 1847년(정미: 헌종13) 내원이 7성각을 신축하였다”고 전하고 있어 수차에 걸쳐 중창 복구된 사력을 살필 수 있다. 또한 발굴조사를 통해 얻어진 통일신라에서 고려․조선시대에 걸치는 와당과 “원효사”명이 보이는 조선초의 명문와 등과 같은 유물자료들이 이러한 기록에 의한 사력을 물증으로써 증명해 주고 있다.
다음은 원효사 경내에 유존하는 자료들을 통해 근년의 변화를 살펴보면, 1927년 원담대사가 중수하였고 1930년에 지응현․김규 夫婦가 7성당․십왕전 등을 대중수한 사실이 그의 공덕불망비에 전한다. 그리고 1938년 응담의 중수, 1944년 주지 김동성과 지응현의 석가탑․관음탑조성 사실이 전하여진다. 6.25의 전화로 燒燼된 사자는 1954~60년에 걸쳐 복구되어 향화를 이어오다가, 1980년 주지 신법타에 의해 대웅전이 새롭게 중건되어 오늘에 이른다.
라. 원효사의 건축적 특성
1) 배치
원효사는 경사진 구릉에 배산하여 동향으로 축을 이루며 사자들이 배치되어 있다. 중심에 정면 5간․측면 3간의 대웅전을 두고 대웅전을 향하여 좌측에 7성각, 우측에 승방을 일렬로 배치하였다. 대웅전 앞의 넓은 중정을 향하여 양쪽에 요사체와 정면 3간․측면 2간의 명부전이 있는데 요사체는 시멘트 콘크리트로 기둥과 벽체를 만들고 그 위에 한식기와지붕을 얹었다.
2) 대웅전
구 대웅전을 헐고 1980년에 새로 신축한 대웅전은 1.5m높이의 축대위에 현대식 대리석기단을 쌓고 대리석 다듬돌초석을 놓은 다음 기둥을 세운 정면 5간․측면 3간의 단층8작집이다. 배흘림이 약한 기둥위에는 창방과 주두가 결구되고, 그 위에는 평방이 놓이며 외2출목, 내3출목의 공포가 짜인 다포식 건물이다. 내부구조를 살펴보면 내진간에 고주가 없이 변주인 평주위에 주두와 공포를 포작하여 그 위에 직접 대들보를 얹었다. 대들보위에 동자주없이 별장혀(別長舌)와 같은 부재를 도리방향으로 얹어놓고 그위에 우물천장을 얹었는데 평7량으로 보인다. 또 보간의 공포와 대들보를 연결시켜주는 형량을 얹고 그 밑은 코끼리․호랑이 등으로 장식하여 결구하였다. 창호는 빗살창문으로서 어간은 3분합문이며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다. 이 건물도 증심사, 약사사의 대웅전과 마찬가지로 80년대초에 건축된 것으로 후기적 양식을 뚜렷히 드러낸 건축수법을 지닌 건물이라 하겠다.
3) 지방전
지방보살을 봉안하는 이 곳은 정면 3간․측면 2간인 건물로 맞배지붕이며 측면에는 풍판을 두었다. 낮은 기단위에 원형주초를 놓고 원주를 세웠으며 익공식가구를 하고 있다.
내부는 내진간에 고주가 없이 변주인 평주위에 주두와 공포를 포착하여 그 위에 직접 대들보를 얹었다. 대들보위에 동자주를 세우고 종보를 걸친 다음 판대공을 얹고 그 위에 첨차형 부재를 놓고 장설와 종도리 순으로 가구했다. 상량문에 2526년이란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1982년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4) 성산각
대웅전 좌측에 있는 성산각은 전면 3간․측면 2간의 단층 맞배집으로서 대웅전고 같이 2단의 높은 축대위에 놓여 있다. 낮은 기단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전면에는 원형기둥을, 배면에는 방형기둥을 세웠다. 지붕의 측면에는 풍판이 있으며, 겹처마로 연등천정을 둔 5량가이다. 외양으로 보아서는 제일 오래된 건물로 여겨지는 고졸한 건물이다.
5) 승방
원효사라는 현판이 정면에 걸려있는 승방은 전면 4간․측면 2간의 단층8작지붕으로 두벌대의 기단위에 원형초석을 놓은 다음 원형기둥을 세운 건물이다. 기둥위부분의 결구는 포작이 없으며 굴도리를 얹었다. 정면은 세 번째 간만 4분합문이 있고 나머지 세간은 벽으로 되어 있다. 가운데간은 2간을 마루로 쓰며 좌․우간은 방으로 사용하는 손질을 많이 가한 건물이다.
6) 무등선원
이 건물은 무등선원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요사체로 정면 5간에 좌측면 2간․우측면 3간으로 ‘ㄱ'자로 꺾인 8작지붕형태이다. 외벌대 기단위에 콘크리트 기둥을 세웠고, 시멘트벽을 바르고 그 위에 한식기와지붕을 얹은 사찰의 요사체답지 않은 이색적인 건물이다. 창호는 2분합문으로 전퇴에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익공식 건물이다.
7) 승방
무등선원 뒷편에 위치한 요사체로서 정면 5간․측면 2간의 서향한 민족형 건물이다. 1979년에 건립되었으며 1980년 대웅전 신축공사를 전후하여 새로 축조된 높은 축대와 후면이 바로 접해있다.
마. 유물
1) 원효사 범종
이 범종은 그동안 대웅전 내에 보관되어 오다가 항구적인 보존을 위해 새로운 종을 주조하여 대체하고, 현재는 요사체인 무등선원으로 옮겨 보관중이다.
규모는 총고 86㎝․구경 63㎝인데 龍鈕部는 20㎝․종신부는 66㎝이다.
세부양식과 특징을 살펴보면, 종을 걸어 놓기 위한 용뉴부는 쌍용으로 각기 여의주를 하나씩 입에 물고 있으며 쌍용이 결합된 정상부에도 火焰에 싸인 여의주를 장식하였다. 용두의 표현이나 천판에 드리운 발의 조각수법은 다소 경직되어 세련미를 잃었다. 또한 소리를 내는 음관으로써 筩茼시설 대신 천판상부에 원형의 음공(직경 2㎝)을 마련하였다.
천판에서 종신부로 이어지는 부분에 범자대를 둘렀는데, 15자의 범자가 모두 동일한 문자인 점으로 보아 특별한 내용보다는 문양으로서의 효과를 노린 것으로 생각된다.
범자대 아래에는 4개의 장방형 유곽과 4구의 보살입상이 동일선상에 번갈아가며 배치되어 있으며, 유곽과 4구의 보살입상 사이에는 국가․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주상3전하”의 명문이 종서로 양각되어 있다. 유곽은 2중으로 구획된 문양대 내부를 사교집선문으로 채우고 그 안에 9개의 유두가 있는데, 각기 원형으로 연화문을 받치고 그 위에 돌출된 연봉형의 유두를 마련하였다.
보살입상과 유곽 아래에는 양각의 명문대가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강희사십구년 경인사월일 추월산 만수사 대종수성야”라고 적혀있어, 이 종이 조선 숙종 36년(1710)에 조성되었으며, 원래는 담양 추월산 만수사의 대종으로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양각의 명문대 아래에는 “단기 4287년 갑오칠월일”이란 음각명과 함께 1954년 원효사 대웅전을 중수할 때 시주한 사람들의 명단이 음기되어 있다.
현재까지 전남지방에서 발견된 범종은 모두 20기가 있는데, 그 중 광주직할시에 소재하는 것은 유일하게 이 원효사 범종 뿐이다. 이 종은 종신부와 구경의 비율이 거의 1:1로 전형적인 조선종의 비율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용유부에서 보여지는 경직화된 표현이나 통동 대신 원형의 음공을 시설한 점, 그리고 범자대에서 보여지는 도식화의 경향 및 동좌시설과 하단부 문양대의 생략 등은 조선후기 범종들에서 나타나는 전체적인 조각수법상의 퇴화된 양식의 표현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이 원효사 범종은 조선시대 범종(동종)의 양식변천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라 하겠다. 1989년 3월 20일 시지정 유형문화재 15호로 지정되었다.
끝으로 전남지방에서 지금까지 발견된 범종들은 조성된 순서에 따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곡성 태안사 범종 : 만력 9년(1581)
②해남 대흥사 범종 : 만력 15년(1587)
③담양 용흥사 범종 : 순치 원년(1644)
④여천 흥국사 범종 : 강희 4년(1644)
⑤진도 쌍계사 범종 : 강희 23년(1684)
⑥고흥 방가사 범종 : 강희 37년(1698)
⑦영광 불갑사 범종 : 강희 41년(1702)
⑧해남 대흥사 대웅전 범종 : 강희 42년(1703)
⑨해남 대흥사 청곤암 범종 : 강희 48년(1709)
⑩광주 원효사 범종 : 강희 49년(1710)
⑪구례 화엄사 범종 : 강희 50년(1711)
⑫구례 천은사 범종 : 강희 54년(1715)
⑬구례 화엄사 내원암 범종 : 옹정 6년(1728)
⑭순천 향림사 범종 : 건융 11년(1746)
⑮목포 달성사 범종 : 건융 25년(1760)
(16)나주 다보사 범종 : 건융 32년(1767)
(17)나주 불회사 범종 : 건융 33년(1768)
(18)영암 도갑사 범종 : 건융 41년(1776)
(19)구례 천은사 약사암 범종 : 건융 43년(1778)
(20)장흥 보림사 범종 : 실명
2) 원효사 동부도
원효사 뒷편 원효봉 기슭에 위치한 이 부도는, 광주시 유형문화재 7호로 지정되어 있는 유물로서, 원효사에 현존하는 부도 중 조각기법이 가장 뛰어난 작품이나 누구의 부도인지는 알 수 없다.
부도의 전체적인 양식은 옥개석이나 탑신 및 상대석 등을 보면 8각원당식 부도의 형식을 어느정도 따르려고 했으나 기단부의 중대석이나 하대석에서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다. 상륜부는 결실되었으며 현재 옥개석 위에 놓여진 석재는 원래의 부재가 아니다. 옥개석은 8각으로 낙수면에는 기와골을 처마에는 연목을 각각 보각하였고, 8두동에는 귀꽃대신 비둘기․두꺼비․거북․쥐(2)․용두(3) 등의 동물조각을 장식하였다. 8각 탑신의 전면에는 하단에 연화문을 조출하고 그 위로 위편형 장식을 구획하였으나 명문은 보이지 않는다.
기단부는 상․중․하대로 이루어졌는데 원형의 상대석은 앙연대로서 단판8엽의 앙연을 2중으로 둘렀다. 중대석은 8각인데 조각이 매우 장식적이면서 화려하고 그 표현기법 또한 특이하다. 8우에는 일곱 개의 마디가 표현된 원주를 모각하여 구획을 지은 다음, 전후․좌우의 4면에는 중첩된 화문을 조식하고 나머지 4면에는 해학적인 모습의 동물장식(사자상․용두)을 면 밖으로 튀어나오게 조출해 놓아 중대석의 평면이 마치 방형인 것처럼 보인다. 하대석은 8각 복연대와 방형 지대석으로 나뉘는데, 지대석 위에도 4마리의 사자상을 복연대의 4면에 맞도록 배치하였다.
이와 유사한 모습을 보여주는 부도로서 해남 대흥사의 청호당(서산대사) 부도가 있는데, 이렇듯 부도의 조각에 동물모양이 諧謔的인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은 조선후기의 시대상을 반영한 것으로 보여지며, 이 부도의 조성시기 또한 조선후기로 추정된다 하겠다.
3) 춘곡거사 송화식 사리부도
앞부분 전각에서 소개한 요사체의 동북쪽 축대 아래 서남향한 공터에 위치한 부도이다. 4매석으로 이루어진 방형의 지대석 위에 8각 앙연대를 마련하여 장타원형의 탑신을 받게 하였다. 8각의 앙연대는 지대석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8면중 5면에 연화․연봉․연실 등을 조식하였다. 탑신에는 종서2행으로 “춘곡거사 송화식 사리부도”라는 탑호가 음기되어 있다. 탑신 위로 방형의 옥개석을 얹고 상륜은 낮으막한 연봉만을 올려 놓았다. 부도의 규모는 총고 163㎝이고 지대석 한 변의 길이는 121㎝이다.
춘곡 송화식 선생은 생전에 법조계와 육영사업을 공헌하였는데, 특히 광주학생독립운동 당시 한인학생들의 무료변론을 담당하였고 전남대학교의 설립에도 공로가 지대하였다고 한다. 만년에는 불도에 진력하였는데, 1961년 5월 31일 타계하여 다비에 부치자 사리가 나와 이 사리탑을 조성하여 봉안하였다고 한다.
4) 원효국사탑
원효사 인구의 부도전에 있는 석종형 부도이다. 잘 다듬어지지 않은 장방형 석재를 지대석으로 하여 석종형 탑신을 받게 하였는데 현재의 지대석은 원래의 탑재가 아닌 것으로 보여진다. 석종형 탑신 중앙에 “원효국사탑”이란 탑호를 음각하였으며, 상륜부의 처리는 지극히 형식적이다. 회운당 부도와 함께 19세기에 조성된 작품으로 보여지며, 지대석을 제외한 총고는 105㎝이다.
5) 회운당 부도
원효국사 부도와 함께 입구의 부도전에 위치한 석종형 부도이다. 잘 다듬어지지 않은 장방형 지대석 위에 석종형 탑신을 받게 하였는데 이 지대석 역시 원래의 탑재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탑신 중앙에 “회운당”이란 당호가 음각되어 있다. 그런데 탑신부의 하단 직경이 상단에 비해 유난히 작아져 안정감을 잃었으며, 지극히 형식화된 상륜부의 처리수법과 함께 말기적인 요소를 보여주고 있다. 회운대사는 1789년(정조 13)선방을 중창하였으며 1802년(순조2)에는 대웅전을 중창한 인물이다. 지대석을 제외한 총고는 95㎝이다.
6) 진성당 부도
부도전에 있는 대리석제 부도로서 1984년에 조성되었으며 8각원당식 부도양식을 다소간 보이고 있다. 방형 지대석 위에 다시 방형의 하대석을 설치한 후 그 위에 1단의 8각괴임을 마련하여 복연대와 앙연대를 중첩하여 올렸는데 모두 복판8엽의 연화문이다. 장타원형의 탑신을 받고 있는 앙연대가 탑신보다 훨씬 작아 전체적인 균형을 잃었다. 탑신에는 “진성당”이란 당호가 종서로 음기되어 있다. 옥개석은 8각인데 매우 두텁고 8우동에 각기 용두를 장식하였다. 상륜은 복연과 앙연을 중첩시킨 위에 연봉(보주)을 올렸다. 부도의 규모는 총고 228㎝이다.
7) 원담화상탑
부도전에 있는 탑으로서, 원형의 지대석위에 방형의 중대석과 원형의 앙연대를 마련하여 방형탑신과 옥개석을 받고 있다. 장방형을 이룬 탑신 전면에 “원담화상탑”이란 탑호가 종서로 음기되었고 그 탑호의 좌우 여백에 “削髮本寺元曉遺墟 受法會雲圓潭承勳 道旣超 蹟則然 塔斯屹理難訣 崇禎紀元後五丁卯十一月日”이란 명기가 있어 원담의 내력과 탑의 건립시기(1927년: 숭정기원후오정묘)를 알려주고 있다. 원담화상은 1927년 원효사를 중수한 인물인데 동년에 이 탑이 세워진 것은 부도로서 보다는 그의 중수업적을 기리는 기념탑으로서의 성격을 갖는 것이라 하겠다.
8) 응담화상 기념탑
전술한 원담화상탑처럼 정응담대사가 1938년에 중수한 업적을 기리고자 하는 기념탑이다. 형태는 원담화상탑과 같은 부도의 형식이 아닌 일반적인 비의 형태를 취했다. 탑신 중앙에 “응담화상 기념탑”이란 탑호를 종서로 음각하고 그 좌우의 여백에 “元曉道場 淸淨守護 來空去空 慈悲謙恭 募綠重修 曰德曰業 設塔表功”이란 업적을 기리는 내용의 명문을 새겼다.
9) 원효사의 비
원효사 경내에는 모두 4기의 비가 부도전과 지장전 뒷편에 흩어져 있는데 一鶴和尙實蹟碑, 造塔士女氏名開錄之碑, 鵬南居士池公應鉉․夫人淨明月金桂氏 善德功蹟碑 및 淨明月金夫人桂․鵬南居士池公應鉉 功蹟不忘碑 등이 그것이다.
이들 중 일학화상실적비와 조탑사녀씨명개록지비는 1944년 주지 김동성대사와 일학대사 그리고 지응현거사와 김정명월 보살이 중심이 되어 석가탑과 관음탑을 조성하고 사자를 보수한 사실과 그 업적을 기록한 비이다. 또한 후자인 지응현․김계의 선덕공적비 및 공적불망비는 1944년의 조탑불사 뿐만 아니라, 1954년부터 1960년까지 6.25전란 이후의 중건불사에 대시주로서 참여한 지응현․김계부부의 공덕을 찬양하고 그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이다.
10) 원효사 석조지장보살입상
현재 지장전 뒤쪽의 축대 위에 불상과 광배가 1매로 조성된 석조보살입상이 1구 세워져 있는데, 총고 124㎝․불신고 100㎝․최대폭 56㎝의 소규모 불상이다. 특별한 대좌시설이 없이 자연암반 위에 올려 놓았는데, 곁에는 이전에 대좌로 이용했던 석탑의 옥개석이 놓여있다.
불상의 세부양식을 살펴보면 삭발의 머리와 왼손에 받쳐든 보주 그리고 오른손에 쥐고 있는 戒杖으로 보아 지장보살임을 알 수 있다. 법의는 통견인데 가슴부분에 X자 모양으로 묶인 매듭이 보인다. 양팔에 걸쳐서 내려뜨린 옷자락은 매우 단정하게 대칭을 이루나 비교적 무겁게 느껴진다.
광배는 단형이며 굵은 띠와 같은 원형의 두광을 둘렀다. 단형광배의 상단은 두부의 조각이 깊어 약간 앞으로 굽은 모습이다. 신체에 비해 다소 작은 두부와 찡그린 상호, 섬약한 어깨와 무섭게 처리된 의습의 등은 근년에 작품임을 역력히 보여주고 있다.
11) 원효사 출토유물
원효사에서 출토된 귀중한 유물로서는 1954년 대웅전 중창시 수습되어 광주시립박물관에 전시도중 도난당한 금동비로사나불좌상이 있다. 그리고 1980년 발굴조사에서는 100여점이 넘는 소조불상편과 13점의 금동불을 비롯하여 신라에서 조선시대에 걸치는 수많은 와당류가 출토되었다. 이들 중 대표적인 몇 점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금동비로사나좌상
이 불상은 1954년 대웅전 중창시 주초석 하에서 발견된 것이다. 그후 광주시립박물관으로 옮겨져 전시되어 오다가 1974년 7월 17일 도난 당함으로써, 현재 그 모습을 대할 수 없음이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다만 이 불상에 대해서는 최몽룡씨의 “전남의 고적”과 박선홍씨의 「무등산」에 사진과 함께 해설이 실려 있어, 그나마 불행중 다행이라 하겠다.
위의 기록에 전하는 사진과 해설을 참고하여 이 불상의 세부양식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불상의 모습은 지권인을 결하고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비로사나불좌상이다. 기록에는 소형광배가 달렸던 듯한 흔적이 있다고 하나 사진만으로는 확인할 수 없다. 불두의 두발은 나발인데 육계가 구별되지 않게 밋밋하며 그 사이에 제발부가 확연하게 표현되어 있다. 상호는 장타원형에 두툼한 얼굴인데, 두툼한 얼굴에 비해 굳게 다문 입술이 다소 경직된 느낌을 준다. 眉間에는 큼직한 백호가 돌출되었으며, 양쪽 귀는 턱밑까지 길게 내려왔는데 오른쪽 귓볼이 파손되어 결실되었다. 짧게 움츠려진 목에는 삼도가 가슴부위에 까지 다소 내려오면서 표현되었다.
법의는 통견으로 양 어깨에서 흘러내린 옷자락을 결가부좌한 양 무릎 위에까지 걸쳐있는데 의습의 표현이 매우 무겁게 처리되었다. 복부에 표현된 속옷의 옷주름이 겉옷의 옷자락과 어울려 전체적으로 U자형을 이루고 있다.
智拳印을 결한 수인을 보면, 주먹을 가볍게 쥔 왼손을 명치 아래에 오게 한 다음 엄지 손가락을 곧추세워 오른손 다섯 손가락으로 가볍게 감싸 쥔 모습을 취하였다. 이러한 지권인의 모습은 왼손이 바른손 밑에 오는 일반적인 형태이긴 하나, 왼손의 검지가 아닌 엄지 손가락을 세워 바른손으로 감싸 쥔 모습이, 철원 도피안사나 장흥 보림사의 철조비로사나불좌상과는 다른 다소 특이한 모습이라 하겠으며, 엄지 손가락을 곧추세운 형태는 해남 은적사의 철조비로사나불좌상이 있으나 이 불상은 바른손이 왼손 밑으로 가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결가부좌한 다리의 모습은 오른발을 왼쪽 무릎 위에 올린 길상좌를 취하여 앙연대의 연화좌 위에 앉아 있으며, 왼발은 오른쪽 무릎의 안쪽으로 발바닥이 노출되어 있다.
앙연의 대좌는 소판의 화문이 삼중으로 중첩된 모습인데 아랫쪽 2단의 화엽은 다소 파손이 심한 편이다. 대좌의 높이는 다소 높직한 편이나 그 폭이 슬폭에 비해 넓지 않으며, 슬폭 또한 불신의 규모에 비해 지나치게 줄어들어 전체적인 균형을 잃어 안정감이 결여된 모습을 보인다.
이 불상은 세부의 양식에서 보여지는 제반 요소, 즉 경직된 얼굴의 모습과 구획선이 없는 육계와 제발부의 표현, 짧고 움츠러든 목, 두부에 비해 현저하게 위축된 어깨, 둔중한 느낌을 주는 도식화되고 간략화된 의습의 처리, 신부에 비해 왜소해진 슬폭과 앙연좌, 그리고 전체적인 신체의 불균형과 그로 인한 안정감의 결여 등으로 보아 극성기불상의 조각양식에서 벗어남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퇴화된 제반 요소를 통해 이 불상의 조성시기는 고려말기인 13~14세기경으로 추정된다 하겠다. 그런데 이 불상의 규모에 대해서는 전술한 두 기록 모두 알려주지 못하고 있는 점이 아쉽다 하겠다.
②청동불입상
이 불상은 앞으로 소개할 4점의 불상과 함께 모두 1980년 발굴조사시 출토된 유물들이며, 내용은 발굴조사보고서를 참고하여 약간의 첨삭을 가하였다.
이 불상은 전체적으로 부식되어 얼굴이 가장 원만한 이 불상은 배를 약간 내밀고 선 자세이다. 불신에 비해 두부가 다소 크게 표현되었고, 수인은 흥원인과 시무외인으로 시무외인을 결한 오른손은 결실되었다. 수인으로 보아 석가불로 생각된다.
마멸이 심하지만 육계가 높은 소발의 머리에, 둥글고 볼륨있는 원만한 상호를 보인다. 법의는 통견인데 가슴을 넓게 드러낸 U자형 옷주름선이 허리부분에 이르러, 두다리 사이로 밀착되어 흐르면서 유려한 의습선을 형성하고 있다. 법의자락 아래로 군의와 두 발이 보인다. 불상의 뒷면은 두부와 신부에 수형공이 있고 광배를 부착했었던 듯한 꼬다리가 남아 있다. 불상의 규모는 현고 10.5㎝이다.
육계가 높은 소발의 머리, 원만한 상호, 볼륨있는 불신, 유려한 의습선 등은 이후의 고려금동불상과 비교해서 시대가 올라가는 특징이 보여진 이 불상의 조성시기는 나말여초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곳 원효사에서 출토된 불상중 가장 연대가 올라가는 불상이라 하겠다.
③청동보살입상
출토된 금동불상중 가장 큰 이 보살상은 도금이 거의 탈락된 청동불이다. 단순한 원형의 대좌 위에 직립한 보인다. 큰 불두에 비해 불신이 현저하게 위축되었으며, 각 세부의 형태 또한 전기한 청동불입상에 비해 훨씬 형식화되고 경직된 모습이 나타나 있다. 낮은 삼각형 모양의 보관을 쓴 머리에는 간략한 상투가 솟아있다. 둥글고 넓적한 얼굴은 풍만하나 편평한 편이며, 좁은 이마에는 백호가 돌출되어 있다. 음각선으로 처리된 긴 눈과 짧은 입, 코 등은 매우 형식화된 표현기법을 보여준다. 좁은 어깨는 마치 움추린 듯 올라가 목이 거의 표현되지 않았다.
이 보살입상은 의습과 구슬장식이 특징적인데, 양 어깨에 걸쳐진 통견의 법의는 두 팔을 거쳐 밑으로 흘러 내렸으나 도식화된 의습선의 처리는 한층 더 경직된 모습을 느끼게 한다. 한편 연주문이 박힌 넓은 장식띠가 어깨에서 발목을 드러낸 상의의 끝까지 X자에 가까운 형태로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형태는 삼국시대 보살상에 보여지는 X자형 연주장식의 변형된 표현이라 생각된다. 불상의 뒷면은 평판이며, 대좌는 단순한 원형의 대좌로 아무런 장식도 가해지지 않아, 장식적인 성격이 뛰어난 불상과는 매우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같이 볼륨없는 평판적인 신체, 낮은 삼각형의 보관, 신체의 비례에 비해 유난히 큰 얼굴, 매우 작은 손, 도식와된 의습선의 처리, 부자연스럽게 단순화된 연주문 장식띠 등 여러면에서 정성이 결여된 보살상으로 원효사 출토의 금동불상중 가장 시대가 떨어지는 특징들이 나타나 보인다. 불상의 규모는 전고 13.5㎝이다.
④금동불입상
도금상태가 좋을 뿐만 아니라 대좌도 갖추어진 이 불상의 형태는 앞서 살핀 청동불상들과 비슷하나 불신에 볼륨이 없고 법의의 의습선이 거의 선각에 가깝게 처리된 불상이다.
沙鉢을 엎어 놓은 것과 같은 복연대의 연화대좌 위에 직립한 이 불상은 전고 8㎝, 불신고 6.5㎝, 대좌고 1.5㎝의 소불이다. 불두는 육계가 표현된 소발인데 약간 숙인 얼굴은 다소 굳어진 표정이다. 귀는 금지하여 거의 어깨에 닿았는데, 목과 거의 맞붙은 좁은 어깨에 걸쳐진 법의는 통견이다. 신체와 밀착된 통견의 의습선은 가슴부위에서부터 V자형을 이루면서 흘러가다 허리부분에서 갈라진다. 두 다리사이로 더욱 밀착되어 흘러내리는 의습선은 지극히 도식화되어 선각된 물결무늬로 나타나 보인다. 이 불상의 수인은 흥원인과 시무외인을 결하였는데, 좌우로 약간씩 들어올려 취한 수인의 모습은 매우 여유있는 모습을 보인다.
연화대좌는 단판6엽의 복연대 위에 보다 작은 앙연대좌를 중첩하였는데 앙연대좌는 단판6엽의 연화문이 파상문처럼 선각되었다. 복연대와 앙연대가 중첩된 연화대좌는 마치 연화문사발을 엎어놓은 것과 같은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⑤청동불두
이 청동불두는 얼굴 표면이 부식되어 다소 거친 느낌이 드나 눈․코․귀․입 등 각 부분의 윤곽선이 뚜렷할 뿐만 아니라 목부분도 그대로 남아있는 거의 완전한 불두이다. 청동불두의 내부는 흙으로 가득 차있고 주조할 때 동심을 했던 동편이 드러나 있다. 출토된 불두중에서 가장 큰 이 청동불두는 현재 총고 22㎝이며 두고는 18㎝이다.
불두의 머리카락은 나발이며 육계는 높지 않으나 중앙에 둥근 계주가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다. 원형에 가까운 둥근 얼굴은 풍만한데, 살이 올라 팽창된 양 볼이 입가에 머금은 미소에 의해 옆으로 부풀어 올라, 원만하면서도 자비스러운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이마의 중앙에는 큼직한 백호공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눈은 선정에 든 듯 지긋이 내려 떴으며, 눈두덩은 넓은 반타원형으로 비교적 두터운 편이다. 콧잔등이 좁고 편평한 코는 짧은 편이나 콧망울은 윤곽선이 뚜렷하여 오똑하다. 융기된 짧은 인중 아래 미소 띤 입술은 작으나 도툼한 편이다. 턱의 윤곽선을 따라 U자형의 특유한 터주름이 선각되었다. 귓볼에 구멍이 뚤린 두 귀는 턱밑까지 내려왔으나 눈썹선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불두 전체와의 비례로 보면 긴 편은 아니다.
⑥소조불두
도금색이 찬란한 이 소조불두는 오른쪽 머리에 손상을 입어 일부가 결실되었으나 나발의 머리에ㅔ 육계가 우뚝 솟아있다. 타원형의 얼굴 양 볼에 살이 올라 팽팽한 동안인데 넓은 이마에는 백호가 떨어져나간 흔적이 있다. 얼굴의 전체 면적에 비해 눈이 지나치게 넓은 표현되었는데, 지긋이 감은 듯 가늘게 뜬 긴 눈 위로 눈두덩은 두텁고 넓은 반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여기에 짧은 코, 작은 입, 짧고 융기된 인중은 얼굴의 비례를 깨뜨리고 있으나 미소를 띤 얼굴은 단아하고 차분한 표정을 보인다. 두 귀는 다소 짧은 편으로 귓볼의 끝은 자른 듯 몽퉁하다. 불두의 크기는 총고 10.5㎝이며 안고 6㎝․안폭 5㎝이다.
12) 기타 유물
현재 원효사에는 오랜 사찰의 역사에 비해 그 사력을 입증할 만한 석탑이나 석등과 같은 특별한 석조 유물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경내의 여기저기에 석탑과 석등의 부재들이 보여질 뿐이다.
현재 대웅전을 향하여 우측에 위치한 승방의 전정에는 석조물의 부재와 파편들이 상당수 수습되어 있다. 이들 중에는 석등의 복연대를 비롯하여 석탑의 옥개석편 등이 보여지며, 지장전 뒤편의 빈터에도 석조 지장보살입상 곁에 석탑의 옥개석 1매가 놓여있다. 이 옥개석은 최근까지 바로 곁에 세워진 보살상이 도로변에 놓여 있을 때 그 대좌 구실을 했던 옥개석으로 4단의 층급받침을 갖추었다.
현재 경내에 남아있는 비문 등의 자료에 의하면 1944년 주지 김동성과 지응현이 석가탑과 관음탑을 조성한 사실이 보여지나, 이러한 석조물마저 6.25의 전화로 인해 파기되어 그 모습을 대할 수 없다. 현재 승방의 전정에 수습되어 있는 파편중 석탑부재들은 석가탑과 관음탑의 부재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석조계단을 거치지않고 출입하는 차도쪽 입구에는 범자로 진언문이 새겨진 장방형 표주가 넘어진 채 놓여있다.
2. 관음암
가. 위치 : 광주직할시 북구 금곡동 846번지
나. 사격 :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송광사 말사
다. 연혁
무등산 원효계곡에 위치하는 이 관음암은 원래는 원료사에 소속된 암자였으나 현재는 성호스님에 의해 원효사와는 별개의 독립된 사찰로 운영되고 있다.
라. 유물
이 관음암에 부속된 전각으로는 관음전과 극락보전 그리고 요사체 1동이 있는데 이들 전각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관음전
이 관음암의 중심 전각으로서 정면에 “관음암”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본래 정면 3간 ․측면 2간의 동남향한 단층 8작지붕의 민가형 건물이다. 편용상의 편의를 위해 좌우의 처마끝까지 기둥을 세워 벽을 쌓은 손질을 많이 가한 건물이다. 현재의 모습은 정면 5간․측면 4간을 보인다. 전체적으로 법당과 요사체가 혼합된 형태의 건물이다.
2) 극락보전
관음전의 후면 높은 절벽 위에, 배경 또한 높은 암벽으로 한 과히 넓지 않은 공간에 자리잡고 있다. 구조는 정면 3간․측면 2간의 동남향한 단층 맛배지붕의 건물로서, 잘 다듬지 않은 장방형 자연석재를 초석으로 이용하여 배흘림이 완연한 원주를 세웠다. 이 전각에 있어서 가장 특이한 모습은, 건물 내부에 주존불을 봉안하지 않고 배경으로한 암벽에 불단시설을 마련하여 아미타불을 안치한 점이다. 그리고 건물 후면의 중앙 1간에 유리문을 마련함으로써 마치 마애불 앞에 세워진 전각과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이 극락보전은 최근의 신축 건물로서 현재 관음전을 대신하여 관음암의 본전 역할을 하고 있다.
3) 요사체
관음전의 왼쪽(동북쪽)에 위치하는 이 요사체는, 정면 4간․측면 2간인 8작지붕의 서남향한 건물이다. 이 건물에 있어서 특이한 모습은 경사면을 이용하여 축조되었기 때문에 서북쪽은 단층이나 동남쪽은 2층을 이루고 있다.
3. 안양암
가. 위치 : 광주직할시 북구 금곡동 산850번지
나. 사격 : 미등록사찰
다. 연혁
무등산의 원효계곡에는 의상봉(해발 680m), 원효봉(해발 561), 윤필봉(해발 400m)의 삼봉이 3각형을 이루어 서로 마주하고 있다. 원효․의상․윤필은 화엄3사로 추앙되는 고승들인데 이곳 원효계곡에 모두 보여있는 셈이다.
현재 원효봉하에는 원효사가 자리잡고 있고, 건너편 윤필봉 정상의 바로 밑에는 천연의 석굴이 있다. 옛날에 이곳에서 윤필이란 거사가 좌선수도 했다고 하여 “윤필굴”이라고도 하며, 이곳에 훗날 안양사란 절이 있었다고 하여 “안양굴”이란 별칭도 생겼다고 한다. 지금도 이곳에는 안양암이란 매우 협소한 암자가 석굴 안에 마련되어 있다. 석굴의 규모를 보면 입구의 폭 13m․길이 21.4m이고, 최대높이는 3.7m이며, 입구의 방향은 정서향이다.
라. 유물
1) 안양암 연화대석재
이 안양암의 석굴 입구에 현재 계단석으로 이용되고 있는 3점의 석재가 유존하는데, 2점은 복연대석이고 1점은 소문인 장대석이다. 이들 중 복연대석은 모두 복판의 연화문과 꽃술형의 간판를 매우 볼륨감있게 조식하였는데, 2점 모두 동일 시설물의 부재로 보이며 불상 대좌의 하대석이 아닌가 생각된다. 규모는 앞에 보이는 것이 143㎝․폭 37㎝․높이 28㎝이고, 뒤쪽에 보이는 것은 길이 87㎝․폭 37㎝․높이 28㎝로 2점이 폭과 높이가 동일하다. 장대석은 지대석으로 여겨지며 규모는 길이 130㎝․폭 37㎝․높이 22㎝이다. 이와같이 석재를 하대석으로 한 대좌를 갖춘 불상이 있었다면 상당한 규모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측되며, 시대는 다른 부재가 유존하지 않아 단언하기는 어려우나 대폭 신라말에서 고려초기에 해당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2) 숫막새편
이 숫막새편은 석굴 입구의 주변에서 수습된 것인데, 파편이지만 단고 16엽의 연화문으로 복원된다. 화판은 양각선을 돌려 표현하였는데, 자방쪽보다 주연이 훨씬 돌출되어 있으며, 돌출된 끝부분이 안쪽으로 약간 반전되어 있다. 다시 동일한 형태의 작은 화판을 자방쪽으로 돌린 것 같으나 파손되어 확실하지는 않다. 간판은 꽃술형으로 화판보다 약간 높은데 양각선의 줄기로 자방에 연결되어 있다. 자방부는 결실되었으며 주연부는 높게 돌출되었는데 마모가 심하여 문양의 유무를 확인하기 어렵다. 태토는 가는 모래가 섞인 점토이나 연질이다. 이 막새와 또한 앞서 살핀 연화대석재들과 동일한 시기로 생각된다.
2. 폐사지
본 장에서는 행정구역상 북구관내에 속하는 폐사지에 대해 살펴 보고자 한다. 그러나 폐사지에는 그 유적과 함께 사찰의 명칭이 전하는 예와 유적은 확인되었으나 사찰의 명칭이 밝혀지지 않은 예, 그리고 사명은 전하나 그 유적이 확인되지 않은 예의 모두 세가지 유형을 불 수 있다.
먼저 첫 번째 예로서는 십신사지 선사지․양두사지, 동화사지 등이 보여진다. 다음 두 번째의 예로서는 장운동 사지․청옥동 불당골 사지 등이 있다. 그리고 세 번째의 예로서는 개안사지․송선암지 등이 사암명이 전하여 지고 있다.
이밖에 타지역의 폐사지에서 그 유물이 이곳 북구관내로 옮겨져 현존하는 예로서 서봉사지의 석탑 및 부도 그리고 영암 청풍사지 석탑 등이 전남대학교 박물관에 전하여지고 있다.
1. 십신사지
가. 위치 : 광주직할시 북구 임동 92-12번지(구 광주농고)
나. 연혁
십신사는 고려 문종대(1047~1083)에 창건되어 일대가람을 이룬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광산현 불자조에 “十信寺在縣北五里平地有梵字碑”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중종대까지는 존속했을 것으로 보여지나 그 이후의 내력과 폐사에 관해서는 창사와 마찬가지로 분명하지가 않다.
이곳 십신사지는 일제시대에는 잠업시험장으로 이용되었고 그 후에는 광주농고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후 농고가 북구 오치동으로 이전하면서 이곳 십신사지 일대가 택지로 개발되고 주택가가 형성됨으로써 유적지로서의 모습은 완전히 잃고 말았으며, 현재는 주택가 사이의 180여평 남짓한 공지에 범자비 1기와 미륵입상 1구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다. 유물
1) 십신사지 범자비
이 비석은 현재 시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어 있는 것으로서 옥개석의 일부가 결실되었을 뿐 비신과 귀부를 모두 갖추고 있다.
비의 규모는 총고 5.15m로서, 길이 2.98m․폭 1.68m의 지대석 위에 길이 2.73m․폭 1.32m의 귀부를 놓고 그 위에 길이 3.96m․폭 98㎝․두께 50㎝의 비신을 결구한 다음 옥개석(높이 35㎝)을 얹었다.
비신의 상단부에 길이 83㎝․폭 68㎝로 구획을 만든 다음 보주와 같은 문양을 새겼는데, 이 문양은 범자의 옴(Om: 唵)자를 도안화한 것으로 이것 때문에 이 비를 범자비라 하는 것 같다. 이 비의 제호는 범자문양 밑에 가로로 “大佛頂尊勝陀羅尼經”이라 음각하고 있어 이 비가 불정존승타라니경을 새긴 經幢임을 알 수 있다. 비문은 한자로 새겼는데 석질이 매우 약하고 마멸이 심하여 판독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이나, 대략 총9행에 1행에는 31~32자를 해자한 것으로 생각되며 제9행의 말미에 “丁巳”년의 간지가 보인다.
이 비의 건립연대는 귀부의 조각양식을 통해 살펴보면 거대한 몸체에 비해 지나치게 움츠려들어 왜소해진 거북의 머리나 도식화되고 간략화된 귀갑의 표현이나 평면처리된 다리의 모습등으로 보아 조선초기의 작품임을 알 수 있으며, “정사”년의 간지를 입비년대로 볼 때 조선초기에 해당하는 정사년은 1437년(세종19)과 1497영(연산군3)이 있으므로, 이 비의 건립년대는 15세기를 벗어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비의 제호에 보여지는 「대불정존승타라니」에 대하여 살펴보면, 「불정」이란 “범어 Buddhosnis로 석가모니불의 정수리의 공덕을 인격화하여 숭배하는 대상을 삼는 것”이며, 「존승타라니」는 “불정존승의 공덕을 해설하는 다라니로서 87구로 이루어지며, 이 주문을 외어 지니면 수명이 길고 병과 재난이 없어져 몸과 마음이 안락하여진다.” 하였다. 그러므로 「대불정존승타라니경」은 다라니를 외우면서 일체의 迷妄에서 벗어나려는 밀교의 수도법이며, 현세구복적인 기도법을 기록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범자문 경당의 예로서는 황해도 해주와 평안북도 용천의 대불장타라니당이 있고, 개성 선죽교와 평양 법수교의 부재에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고 하나 이들은 모두 북한지역에 있어 현재의 모습을 확인할 수 없다.
현재까지 남한지역에서 확인된 범자비는 광주 십신사지 범자비와 충북 제원의 송계리 범자비(大佛頂呪碑)가 있다.
이 중 송계리비는 1988년 2월 충북 제원부 한수면 송계리의 월광사지에서 발견된 것으로서 판석형의 자연석(화강암) 위에 새겨진 범자비이다. 규모는 가로가 163㎝․세로가 161㎝로 방형을 이루는데 두께는 30~40㎝정도로 일정하지가 않다. 비문의 첫 행에는 세로로 「大佛頂呪」라고 한자로 제호를 음각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범자로 새겼는데 모두 11행, 109자정도로 추정된다. 이렇듯 제호만을 한자로 표기하고 본문은 모두 범문으로 표기한 것은 “다라니는 주어로서 독통은 하되 번역은 아니하며, 그 이유는 원문의 전체의 뜻이 한정되는 것을 피하기 위한 것과, 밀어라 하여 다른 사람에게 비밀히 한다는 뜻이 있다."고 하였다. 이 송계리 대불정주비는 다라니는 주어로서 독통은 하되 번역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범문을 그대로 새겨놓은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광주 십신사지비는 범자라고 일컬어지고 있으나 도안화된 ”옴“자를 비신 상단에 새긴 외에는 대불존승다라니경을 범자가 아닌 한자로 기록하고 있어 송계리 범자비와 같은 완전한 범자비는 아니라고 하겠다.
이밖에 범종이나 향로 및 와당 등에서도 범자진언문대를 흔히 볼 수 있으며, 광주 증심사 범자7층석탑이나 무등산 석불암 마애여래좌상의 경우처럼 탑과 불상에서도 범자대를 보여주기도 한다.
2) 십신사지 석조미륵입상
현재 시유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석불은 머리에서부터 대좌에 이르기까지 1매의 거대한 석재로 조각되어 있다. 규모는 총고 4.2m이며 폭과 두께는 모두 72㎝이고 둘레는 2.17m인데, 두부와 신부의 폭이 거의 같아 흡사 문인석이나 망주석을 연상케하는 작품이다.
세부양식을 보면 머리에는 육계의 표현이 없이 삭발한 모습이며 상호는 타원형이다. 긴 코에 비해 입술은 얇고 작게 표현되었는데, 눈썹 밑에 바짝붙어 선각된 눈과 함께 다소 고뇌하는 모습을 보인다. 짧게 움츠리는 목에는 삼도가 형식적으로 표현되었다. 법의는 통견인데 어깨에 걸쳐진 의습의 처리는 얕게 선각되어 알아보기 힘드나, 하체에서는 수직으로 내려뜨린 옷자락이 뚜렸하게 나타나 좌우대칭을 보인다. 수인은 오른손을 들어 복부에 대고, 왼손으로는 오른팔을 받치고 있는데 오른손에 들고 있는 원형의 물체는 보주나 법륜이 아닌가 생각된다. 대좌는 앞면에만 형식적으로 3엽의 연화문을 조식한 앙연대이며, 이 앙연대좌 위에 두 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올라 선 모습이다.
이 석불의 성격은 육계의 표현이 없는 삭발한 머리나 오른손에 들고 있는 법륜 등으로 본다면 명계를 관장하는 지장보살로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불균형을 이루는 신체의 표현이나 조각기법에 있어서의 간략화의 경향은 이 불상이 장성 원덕리 미륵석불(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3호) 등과 같이 관촉사유파의 불상으로서 규정지을 수 있는 여러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하겠으며, 이 석불의 조성시기는 조선초기로 추정되어진다.
끝으로 이 석불입상이 대황사지의 유물인데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전하기도 하며, 「광주시사(1966)」에는 “도로변 담장 밖에 있던 것을 농고 교정으로 옮겨 왔다”고도 하여, 현재의 위치가 원래의 위치가 아닌 것만은 확실하나 이 석불이 대황사의 유물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현재 이 석불입상과 함께 세워져 있는 십신사지비와 비교하여 살펴 볼 때 석불과 석비의 석질이 동일하고 석불의 조각기법과 석비의 귀부에서 나타나는 조각기법이 서로 거의 동일한 수법으로 보여지는 점 등으로 보아 이 석불입상은 원래부터 십신사지의 유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2. 선사지
가. 위치 : 광주직할시 북구 충효동 산21번지
나. 유적
1) 중심건물지
이 선사지는 충효동 성모마을 서쪽 해발 약 450m지점의 완만한 경사면에 위치하는데, 사방 약 100m의 상당히 넓은 지역에 걸쳐 부속건물지와 함께 와편 및 자기편들이 산재해 있어 상당한 규모를 갖었던 사찰이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먼저 중심건물지의 규모를 보면 길이 50m․폭 20m․축대높이 1.5m 내외이며 방향은 서남향이다. 축대는 거친돌 허튼층쌓기의 형식이며, 중앙부분이 좌우에 비해 50~80㎝정도 돌출되어 있는데 이것은 건물지의 선후관계를 밝혀주는 단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좌우의 축대를 제외한 중앙과 우측은 파괴가 매우 심하다. 그 까닭은 1985년 성모마을 진입로 공사에 필요한 석재를 이 건물지의 축대에서 반출 사용하였기 때문이라 한다. 파괴된 중앙의 축대 아래에는 많은 와편과 토기편 및 자기편이 쌓여있다.
이곳에서 수습된 와편중 “癸巳...禪寺明一造”의 명문이 보여지고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 명문와편을 통해 추정해 볼 수 있는 첫 번째 사실은 이 폐사지의 성격이 선종사찰이란 것이며, 두 번째는 계사년에 명일이란 인물에 이해 중수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현존하는 기록중에는 “선원사”나 “은선암”의 명칭만이 보일 뿐 “선사”란 사명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명문와에 보이는 선사의 사명은 일반적으로 선종계열의 어떤 사찰임을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한편으로는 무등산에 존재했었던 사찰로서 전혀 기록에 남아있지 않았던 사찰의 명칭일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고 하겠다.
명문와의 기록중 명일에 관한 자료는 단편적이나마 원효사의 발굴조사시 수습된 와편에 “...조인명일...”이란 좌서된 명문이 보여지고 있어, 이곳 선사가 원효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계사년의 간지는, 같은 장소에서 다량으로 수습된 분청사기편들과 관련지어 볼 때, 조선초기에 해당하는 계사년에 1413년(태종 13), 1473년(성종 4), 1533년(중종 28) 등이 있는데 이 가운데 성종대인 1473년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곳에서 수습된 유물로는 와편과 함께 토기편․청자편․분청사기편 등이 있는데 이들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문양와편 : 수지문과 복합문이 있는데 이면은 모두 황포흔이 보인다. 수지문은 두께가 1.8cm내외로 얇고 가는 모래가 섞인 점토로 사용하였으나, 복합문은 두께가 2.4cm내외로 두텁고 굵은 모래가 섞인 점토를 태토로 사용하였다. 수지문중 1점에 명문이 보인다. 양각선으로 경계를 만들어 그 안에 상단 2cm 정도에서부터 명문을 종2행으로 우서하였다. 첫행에는 “계사...” 다음 행에는 “선사명일조”라 기록하였다.
②토기편 : 모두 회청색 경질토기의 구연부와 胴部 및 저부편들인데 기벽에 격자문이 시문되어 있다.
③상감청자편 : 수습된 예가 몇점되지 않는데 병의 동부편은 외면에 백상감3선1조의 대선이 돌려져 있다. 사발편은 2점으로 모두 저부인데, 1점의 내면에만 백상감 2선1조의 대선이 돌려져 있고 그 위에 원형의 문양이 보여지나 파손되어 완전한 문양의 내용을 알 수 없다. 내부의 바닥에 굽받침의 흔적이 있다. 다른 1점은 외면에는 백상감 연화문대를 돌렸고 모래굽받침의 흔적이 보인다. 내면에는 중앙의 백상감 국화문을 중심으로 동심원문대와 운문대를 돌렸는데 그 위로 흑상감 문양대가 약간 보인다.
④분청사기편 : 이곳 선사지 주변에서 가장 많이 보여지는 유물로서 문양은 백상감 연화문과 국화문이 주종을 이루며 기형은 사발이나 접시 등이 대부분이다. 조선초기 분청사기의 전형적인 모습들로 보아 시기는 대체로 15세기 후반으로 보여진다.
2) 부속건물지
선사 중심건물지의 북쪽 끝에서 북서쪽으로 약 50m지점에 정남향한 또 다른 건물지가 있는데, 규모는 길이 30m․폭 11m이며 전면에 낮은 석축렬이 보인다. 현재 이 건물지의 북단을 가로 질러 성모마을에서 금곡동으로 가는 소로가 나있다. 이곳에서 수습된 유물로는 와편과 청자편 및 분청사기편이 있는데,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와편 : 숫막새편이 1점 있으나 전체적인 형태를 살피기 어렵다. 문양와는 수지문과 능형문이 혼합된 복합문인데, 이면에는 황포흔이 보이며 가는모래가 섞인 점토를 태토로 사용하였다. 두께는 2cm내외이다.
②청자편 : 양각청자편과 상가청자편 각 1점씩인데, 양각청자는 수습된 파편이 너무 작은 부분이어서 기형이나 문양의 종류를 정확히 파악할 수가 없다. 상감청자는 대접편으로서 내외면에 백상감의 연화문과 인동당초문을 돌린 후 연화문 내에 흑상감으로 강조하였으나 일부가 유약과 함께 벗겨져 나갔다.
③분청사기편 : 이들 분청사기편들은 剝地草花文甁과 인화문접시의 부분들이다. 이 중 특히 인화문접시편은 내외면에 동일한 문양대를 돌렸는데 기벽 전체에 치밀하게 인화된 국화문이 조선초기 분청사기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3. 양두사지
가. 위치 : 광주직할시 북구 금곡동 산2번지
나. 유적
원효계곡의 무등산장에서 신선대 쪽으로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면 오성원이란 팻말이 붙은 이정표가 나온다. 이 오성원하 약 100m지점의 등산로 왼 쪽에 양두사지가 위치한다. 이 양두사지에 관한 기록은 「한국지명총람」에 “양두사절터 : 누에머리 북쪽에 있는 터”란 매우 단편적인 기록만이 보여진다.
건물지의 규모는 길이 35m․폭 15m이며 방향은 정서향이다. 축대는 상․하 2단으로 모두 거친돌 허튼층쌓기를 보인다. 상단축대는 남쪽이 1.4m․북쪽이 2.5m의 높이를 보이며 하단축대와의 간격은 5m내외이다. 하단축대의 높이는 1m내외를 보여주나 심하게 파괴되어 있다. 건물지의 중앙에서 남단에 걸쳐 노출된 초석렬이 부분적으로 보여지긴 하지만 토사의 퇴적 등으로 인해 건물의 전체적인 윤곽을 확인하기는 어렵다. 이 건물지에서 약 50여m 아랫쪽에는 등산로 좌․우측으로 담장을 쌓았던 석축렬이 남아 있는데, 이곳이 양두산지의 출입구 시설로 생각된다. 이 유적에서는 뒤에서 살필 동화사지에서와 같이 아무런 유물도 수습하디 못하였다. 이처럼 대부분의 폐사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와편이나 자기편 등이 보이지 않고, 「한국지명총람」이전의 문헌에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 점으로 보아, 이 양두사지는 1920년대 이후에 창건되었다가 폐사된 근년의 유적지로 판단된다.
4. 동화사지
가. 위치 : 광주직할시 북구 금곡동 산1-4번지
나. 유적
이 동화사지는 무등산 너덜겅 약수터 위에 있는 토끼봉(해발 734m) 정상의 바로 아래에 위치한다. 고지대의 경사면에 위치한 관계로 매우 복잡한 구조를 가졌으나, 규모는 매우 넓어 법당지 외에도 많은 부속건물지들을 갖고 있다. 너덜겅의 자연석재를 이용하여 입구의 석계를 마련하고, 전체적으로 3~4단의 석축을 쌓았는데 구조는 모두 거친돌 허튼층쌓기를 보인다.
입구의 돌계단을 지나서 맨 아래층의 높은 축대를 따라 우측으로 올라가면 중앙에 다시 계단시설(폭 3.3m)을 마련한 법당지가 있다. 규모는 길이 15.3m․폭 13.5m․전면 축대높이 2.5m․후면 축대 높이 1.7m 내외이며, 건물지의 방향은 서향이다. 법당지의 북쪽에는 같은 평면위에 또하나의 건물지가 있는데, 규모는 길이 21.3m․폭 9.9m․전면 축대높이 2m․후면 담장 높이 1.5m 내외이며 건물지의 방향은 서남향이다.
이 건물지의 아래에는 우물과 함께 요사체로 추정되는 또다른 건물지가 있는데 규모는 길이 18.8m․폭 15.1m․전면 축대높이 4m 내외이며, 방향은 역시 서남향이다. 그런데 이 전면 축대는 맨 아래층 축대로서 전체 길이는 요사체 건물지보다 훨씬 길어 총 41m이며, 높이도 남쪽은 2.5m정도이나 북쪽은 5m를 보인다. 이처럼 복잡하고 큰 규모에 비해 우물가에 놓여진 자연석에 새긴 확돌과 부속건물지 앞에 세워진 입석 이외에는 별다른 유물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 동화사지에 대한 기록은 전혀보이지 않는데 다만 촌노들의 전언에 의하면 1950년대초에 창건되었다가 오래지 않아 폐사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5. 장운동 폐사지
가. 위치 : 광주직할시 북구 장운동 678번지
나. 연혁
이 폐사지는 장운동 장등부락에서 남서쪽으로 600여m 떨어져 있는 자남골의 해발 130m의 야산 동남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폐사지는 서쪽을 둘러싸고있는 구릉을 배경으로 접하고, 그 동쪽은 계단식으로 된 논에 면해 있으나 경작지로 이용되어 온 관계로 현재 많은 지형변화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밭 언덕 아래에 위치한 우물가에는 초석으로 보여지는 석재가 수점 박혀있으나, 건물지로 추정되는 곳에는 전혀 석재를 찾아볼 수 없다.
이 폐사지에 관해서는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아 사찰의 명칭이나 연혁이 밝혀지지 않은 채 “장운동 폐사지”로만 불려지고 있다. 현재 사지에는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석조여래좌상 1구가 파손된 채 보존되어 있고, 역시 동시대의 작품으로 보여지는 5층석탑 1기가 이곳 폐사지에서 국립광주박물관으로 이전․복원되어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 5층석탑재를 광주박물관으로 이전할 당시 실시된 지표조사를 통해 수습된 와편으로 보아 이 사지는 조선중기 이전까지는 향화가 계속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다. 유물
1) 장운동 5층석탑
현재 국립광주박물관 정원에 복원되어 세워진 이 석탑은 1982년 5월 폐사지의 토지 소유자인 이득재씨가 밭을 논으로 만들기 위하여 삭토작업을 하던 중, 倒壞되어 埋沒되어 있던 탑재들을 발견하여 신고함으로써 탑재의 일부를 수습할 수 있었다. 이 수습된 탑재를 1982년 12월 광주박물관으로 이전하였으며, 그후 1984년 8월에 결실된 탑재들을 보완하여 현재의 위치에 복원한 것이다. 이 석탑은 수습 당시 기초면석 1매와 1층 옥개석, 2․3․4․5층의 옥신 그리고 노반과 함께 상륜부재 전체가 결실된 상태였었다.
석탑의 세부 양식에 대하여 살펴보면, 길이 193cm의 장대석 4매로 결구한 지대석은 기단받침인 몰딩이 있고, 그 위에 각면 1매를 판석으로 이루어진 면석이 세워져 갑석을 받고 있다. 면석은 길이 172cm․높이 82cm인데 중앙에 폭 20cm의 탱주를 조출하였고 좌우에 같은 폭의 양 우주가 있다. 기단갑석은 하면에 부록이 있고 상면에는 3단의 탑신받침이 마련되어 있다. 또한 이 기단갑석은 4매의 판석으로 결구되어 있는데 규모는 길이 188cm․두께 22cm이다. 단층기단인 기단부 전체의 높이는 133cm에 달한다.
탑신부를 보면 초층옥신은 비교적 높은 편에 속하며 2층부터는 체감되었다. 옥개석은 낙수면이 좁아서 두터워 보이며, 전각이 이르도록 급경사를 이룬 가운데 추녀가 직선을 이루다가 전각머리 위에서 3단으로 줄어들었다. 이러한 수법과 함께 단층의 기단시설은 신라석탑의 전형양식에서 벗어나 변화가 이루어진 후기적 요소로 지적되고 있다. 이와 같은 양식상의 제반 요소를 통하여 살펴볼 때, 이 석탑의 조성시기는 성거사지 5층석탑(광주서5층석탑 : 보물 109호)과 거의 동시대인 고려초기로 추정될 수 있겠다.
2) 장운동 석조여래좌상
현재 폐사지의 밭 가운데 석조여래좌상 1구가 남아 있으나, 매우 심한 손상을 입은 채 거의 방치된 상태로 놓여져 있다. 6.25 당시 총격을 받아 파손되어 주위에 흩어져 있던 것을 수습해 놓은 것이라 한다. 현재의 위치가 이 불상의 원위치라고 전하여 지고 있는데 그것이 확실하다면 이곳은 폐사지의 법당지로 추정될 수 있겠다.
석불은 원형의 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한 모습이다. 원형의 대좌는 상면 끝부분이 모두 손상을 입었으나, 수습된 파편의 일부를 통해 연화대의 앙연좌임을 알 수 있다. 대좌는 현재 상면 가까이까지 주위를 시멘트로 포장하여 매몰되어 있는 상태이므로 중대석과 하대석 등의 존재유무는 확인할 수 없다. 광배가 결실되었으며 우측 어깨부분이 결손된 채 주변에 놓여있다.
불상의 세부양식은 전체적으로 약사사석조여래좌상(보물 600호)과 형태․규모․수법면에서 거의 흡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불두의 육계는 낮으막하고 두발은 반나발로서 이마와 귀의 상단을 경계로 한 뒷머리에만 나발이 표현되었다. 얼굴은 타원형을 이루나 조각수법을 알아 볼 수 없을만큼 심하게 파손되었으며 그나마 눈 부분에서 상․하 2등분된 채로 올려 놓아져 있다. 귀는 다소 짧은 편이며, 목은 비교적 굵고 짧은 편으로 삼도의 표현이 뚜렷하다.
법의는 우견편단으로 왼쪽 팔에 걸친 의문은 유려하게 흘러내려 결가부좌한 무릎을 덮고 있는데, 가슴부분과 팔 등에 표현된 의습의 처리는 다소 도식화된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오른팔은 어깨에서부터 파손되어 주위에 흩어진 채 놓여있다. 결가부좌한 다리의 모습은 오른발을 왼쪽 무릎 위에 올린 길상좌를 취하였고, 왼발은 오른쪽 무릎 안쪽으로 발가락만 위로 향한 모습으로 표현되어있다.
수인을 보면 왼손은 다섯 손가락을 가볍게 모아 결가부좌한 오른쪽 다리 위에 오게 하였으며, 오른손은 다섯 손가락을 모아 오른쪽 무릎 위에 손바닥을 아래로 하여 가볍게 걸쳐 降魔印을 취한 것으로 보여지는데, 파손된 오른팔 부분의 석재가 주변에 흩어져 있고 오른쪽 무릎 위에 수인의 흔적이 약간 남아 있다.
불상의 배면에는 광배를 연결시켰던 구멍(가로 5㎝․세로 9㎝․깊이 9㎝)이 남아 있다. 불상의 허리는 수직으로 반듯하나 약간 고개를 숙였으며, 넓고 든든하게 펴진 어깨와 볼륨있는 가슴에 비해 짧은 동체와 급격히 가늘어진 허리는 다소 빈약한 느낌을 준다. 현재 시멘트 포장으로 매몰되어 있는 앙연대좌의 노출된 상면에는 반원형으로 단정한 옷자락이 표현되어 있다.
이 석조여래좌상은 전체적으로 약사사 석조여래좌상과 거의 같은 양식의 불상이나 도식화된 의습의 표현 등으로 보아, 그 조성시기는 약사사 불상보다는 시기가 다소 늦은 고려초 10세기경의 작품으로 생각된다. 불상의 규모는 대좌를 제외한 불신 총고 128cm․두고 42cm․슬폭103cm․슬고 26cm, 현존하는 대좌의 직경은 110cm를 보인다.
6. 청옥동 불당골 사지
가. 위치 : 광주직할시 북구 청옥동 산227번지
나. 유적
이 폐사지는 청옥동 분토부락 서남쪽에 있는 대봉(해발 290m)의 북쪽기슭 해발 약 150m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비교적 경사가 급한 산기슭의 협소한 곳에 자리잡은 규모가 작은 암자터이다. 현재에도 이곳에서는 베니어합판과 비닐로 가건물을 짓고 돌담으로 둘러싼 제단을 마련하여 무속적인 의례가 계속되고 있다. 과거의 건물지로 추정되는 곳에 현재 가건물과 제단을 설치한 관계로 지면이 거의 교란된 상태여서 옛 건물지의 정확한 규모는 확인할 수 없다. 사지의 전체적인 규모는 길이 10m․폭 7.5m이며 건물지의 방향은 정북향이다.
이곳 사지에 대해 「한국지명총람」에는 “불당(불당)골 : 분토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 절이 있었다는데 돌매(맷돌)가 있음”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현재 이 사지의 건물지 서쪽에는 자연암반을 이용하여 조각한 맷돌이 남아 있다.
7. 금곡동 한사골 사지
가. 위치 : 광주직할시 북구 금곡동 산31번지
나. 유적․유물
이 폐사지는 한사골 수박재배에서 동북쪽으로 약 100m지점의 산기슭에 위치한다. 높이 3.7~4.5의 암벽을 배경으로 서남향한 건물지는 길이 15m․폭 8m의 규모이며, 경사면을 이용하여 축조된 축대는 거친돌 허튼층쌓기를 보이며 높이는 1m내외이다. 축대에서 2m내외의 간격을 두어 50cm 정도의 기단 시설을 마련한 것으로 보이나 거의 무너졌고 토사의 퇴적이 매우 심하다. 건물지 중앙에는 민묘를 썼다가 이장한 흔적한 흔적이 있는데 이때 건물지의 유구가 대부분 파괴된 듯 전혀 확인할 수 없다.
붕괴된 기단부분에서 수습된 문양와편을 보면, 1점의 수지문 외에는 모두 복합문이다. 수지문와편은 문양이 비교적 굵게 시문되어 있는데, 태토는 가는 모래가 섞인 점토를 사용하였고 이면은 황포흔이며 두께는 2.2cm 내외이다. 복합문와편 중 1점은 방사선문과 사선문 및 고기비늘모양의 문양이 중첩되어 시문되어 있는데, 태토는 가는 모래가 섞인 점토를 사용하였고 이면은 황포흔이며 두께는 1.6cm 내외이다. 나머지 한점은 수지문과 격자문․선문 등이 복잡하게 중복되어 시문되어 있는데, 태토는 가는 모래가 섞인 점토를 사용하였고 이면에는 황포흔과 찰과흔이 있으며 두께는 2.4cm 내외이다.
8. 두암동 불당골 사지
가. 위치 : 광주직할시 북구 두암동 산18번지
나. 유적
이 폐사지는 군왕봉(해발 356m)의 서북쪽 기슭 해발 약 150m 저점에 위치하는데, 속칭 “빈대절터” 또는 북당골이라 불리워지기도 한다. 사지에서 동쪽으로 약 80m 지점에 불당골 약수터가 있으며, 골짜기를 건너 사지의 맞은 편에는 두리봉(해발 210m)․큰감내(해발 220m)․작은감내(해발 154m) 등의 봉우리가 연이어 있다.
건물지의 규모는 길이 18m․폭 10m이다. 상․하 2단의 축대중 상단은 석축으로 20X30cm 정도의 석재를 이용한 거친돌 허튼층쌓기를 보이며 높이는 1.5m 내외인데 토사의 퇴적이 매우 심하다. 상․하단 축대의 간격은 5m 내외인데 하단축대는 경사면을 이용한 토축으로 길이는 20m이며 비교적 경사가 급한 축대의 아랫쪽은 대나무가 밀생되어 있다. 건물지의 서북단에는 현재 민묘가 들어서 있고, 인구부분인 동남단에는 물 웅덩이가 있는데 이 웅덩이는 과거 이 사찰의 우물터로 추정된다.
건물지 전체에 소나무와 잡목이 밀생되어 있어 초석 등의 유구는 확인할 수 없으나. 폐사지 아래의 독립가옥에 살고 있는 김용술씨(1924년생)의 전언에 의하면 자신이 이곳에 들어와 살기 시작한 50여년 전까지 주초석과 화단 시설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폐사지에서 약수터쪽으로 직선거리 약 20m 지점의 길가 왼편에 넓은 공터가 있는데, 이 공터 주변에도 동일한 와편과 토기편이 산재해 있는 점으로 보아 폐사지와 관련이 있는 건물지로 보여진다.
다. 유물
폐사지의 우물터 주변에서 수습된 유물로 문양와편과 토기편 및 백자편 등이 있는데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문양와편 : 고개비늘 모양의 무늬가 시문된 1점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복합문이다. 모두 굵은 모래가 섞인 점토를 태토를 사용하였다. 이면에도 모두 황포흔이 보인다. 두께는 2.0~2.4cm 내외이다. 복합문의 문양은 모두 사선문과 고기비늘 모양의 문양이 중첩되어 시문되어 있다.
②토기편 : 회청색 경질토기로서 일부 무문이 보여지기도 하나 대부분 격자문이 치밀하게 시문되어 있다. 재질과 문양 등으로 보아 부근에서 발견된 토기가마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여진다.
토기가마터는 이곳 불당골의 독립가옥인 김용술씨 집의 바로 뒷편 기슭에 위치하는데 지번은 두암동 산4번지에 해당한다. 가마의 입구를 포함한 파괴된 것으로 보이며 주변에는 많은 토기편들이 흩어져 있다.
③백자편 : 2점의 접시편인데 유약상태나 굽처리가 매끄럽지 못한 편이며 색조는 약간 회청색을 띠고 있다. 조선후기 민요의 제품으로 보여진다.
9. 서봉사지 부층 및 석탑
가. 현위치 : 광주직할시 북구 용봉동 전남대학교 박물관
나. 원위치 : 전남 담양군 남면 정곡리 절골 서봉산하
다. 서봉사지 연혁
서봉사에 관한 기록으로서 「신증동국여지승람」 창평현조에는 “서봉사재무등산”이란 매우 단편적인 언급만 보이며, 조선총독부 발행의 「조선호남지」 권1 창평조에는 “瑞鳳寺在無等山北洞庚戌火燒重建別構躡淸閣干洞口架截溪壑 有霽峯高敬命詩廢久”란 기록만 보여진다. 이 기록에 의하면 경술년의 중건 사실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정유재란으로 소실된 증심사나 원효사가 광해군 원년에 석경 등에 의해 중창된 사실로 미루어 보아 이 서봉사의 중창 역시 같은 시기인 광해군 2년에 이루어졌음을 알려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서봉사”란 기록은 원래의 명칭은 서봉사였는데 후대에 서봉사로 불리어지게 된 것이거나, 아니면 서봉사의 오기일 수도 있다고 하겠다.
서봉사지는 정곡리 절골에 위치하는데 북향한 거대한 암봉(서봉산)을 배경으로 하여 형성되었다. 지금도 사지의 곳곳에 건물의 초석 뿐만이 아니라 석탑의 옥개석, 석등의 복연대와 8각간주, 연화대좌 및 당간지주편 등이 유존되어 있다. 그리고 이곳 서봉사지에서 반출된 것으로 확인된 유물로서는, 조선 영조 50년 원효사로 옮겨져 영자전에 보관중 6.25의 전화로 원효화정을 비롯하여 현재 전남대학교 박물관으로 이전된 석종형부도와 석탑이 있다. 이밖에도 증심사 석조보살입상(본호 증심사조 참조) 역시 이곳 서봉사지에서 반출된 유물로 추정되며, 1964년 6월 이곳에서 금동불입상 2구와 나불 등이 발견되었다고 전하나 현재 그 행방은 알 수 없다.
라. 유물
1) 서봉사지 부도
이 부도는 현재 전남대학교 박물관 앞 잔디밭에 세워져 있는데, 도굴범들에 의해 해체 발출되려던 것을 1969년 전남대학교 호남문화연구소가 현 위치로 이전해 놓은 석종형 부도이다.
세부양식을 살펴보면, 방형 지대석과 상대석 그리고 석종형 탑신의 삼매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방형 지대석은 8각원당식 부도의 지대․하대․중대석을 1매의 석재에 간략화시켜 표현한 것이다. 하대석은 원형으로 복판8엽의 복연대인데 꽃술형의 간판이 매우 커서 16엽의 연화문처럼 보인다. 중대석은 8각으로 각면에 퇴화된 안상을 조식하였다.
상대석은 1매의 석재로 이루어진 원형의 앙연대이다. 단판8엽의 연화문을 조식하였는데 간판은 꽃술형으로 크기가 연화문과 거의 비슷하다. 연화문과 간판사이에 또 다시 연봉형의 조식을 마련하여 매우 장식적인 표현을 보이나 조각기법은 섬세하지 못하다. 상대석 윗면에도 역시 복판8엽의 연화문과 꽃술형의 간판을 조각하여 장식적 효과를 더 하였다. 1매석으로 이루어진 탑신부는 석종형으로 탑신 자체는 타원형에 가깝고 그 위에 올려진 보주는 납작하여 거의 반원형이다.
석종형 부도는 신라하대의 작품인 울산 태화사지 12지신상부도(보물 441호)가 현재 최고의 예이다. 이러한 석종형 부도는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작품인 김제 금산사석종(보물 26호)이나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보물 228호 : 1379호)을 거쳐 고려말 이래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많은 유행을 보인 부도 양식이다.
이 서봉사지 부도의 조성시기는 석종형 부도와 8각원당식 부도가 양식상 서로 혼합되고 있는 점이나 상․중․하대석에서 보여지는 장식적이면서도 퇴화된 조각기법이 나타나는 점 등으로 보아 조선전기의 소작으로 추정된다. 규모는 총고 2m이다.
2) 서봉사지 석탑
앞서 살핀 석종형 부도와 함께 서봉사지에서 전남대학교 박물관으로 이전된 석탑이다. 이전 이후 최근까지 부도와 함께 박물관 앞에 세워져 있었는데 제2도서관 건립으로 인해 또 다시 옮겨져 현재는 대강당 앞 잔디밭에 청풍사지 석탑과 나란히 세워져 있다. 이 탑은 상륜부재가 완전히 결실되었고 기단부재 역시 일부가 결실되어 복원되지 못한 채 오직 탑신부만이 남아 탑의 면모를 갖추고 있을 뿐이다.
세부양식을 살펴보면, 기단부는 남아 있는 기단석재로 보아 2중기단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상층기단의 면석에는 좌우의 양우주와 중앙의 탱주가 하나씩 모각되어 있다. 탑신부를 보면 각층의 옥개석은 비교적 두터운 편이며 우동의 전각은 약간 반전되어 있다. 옥개석 층급받침의 수는 초층과 2층은 넷씩이고 3층은 셋을 보인다. 지금까지 이 석탑은 3층탑으로 불리워져왔다. 그러나 현존하는 탑신부의 석재중 2층 옥개석 하면의 폭은 70cm인데 비하여 2층 옥신의 폭은 76cm로 규격이 일치하지 않으며, 2층 옥개석 상면의 옥신받침은 폭이 57cm인데 비해 3층 옥신의 폭은 52cm로 이것 역시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또한 옥신의 높이는 초층은 80cm․2층은 29cm․3층은 25cm를 보인다. 이와 같이 현존하는 탑신부재의 규격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점으로 보아 이 탑은 3층이 아닌 5층 이상의 탑으로 봄이 타당하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이 탑의 조성시기는 고려 전기로 추정되며, 현존 규모는 2.5m이다.
10. 청풍사지 석탑
가. 현위치 : 광주직할시 북구 용봉동 전남대학교 박물관
나. 원위치 : 전남 영암군 영암읍 학송리 전 청풍사지
현재 전남대학교 대강당 앞 잔디밭에 다층석탑 2기가 세워져 있다. 그 중 하나는 앞서살핀 서봉사지 석탑이고 나머지 하나는 청풍사지 석탑이다. 이 석탑은 원래 청풍사지로 전하여지는 영암읍 학송리의 폐사지에 있었던 것을 1970년경 이 폐사지를 지나는 도로가 확장되면서 이 곳 전남대학교로 옮겨왔다고 한다. 청풍사지로 전해지는 영암읍 학송리의 폐사지는 영암↔강진간의 도로와 장흥↔영암간의 도로가 만나는 3거리 지점과 그 부근 일대라고 전한다.
청풍사지 석탑의 세부양식을 살펴보면, 기단부는 4매석으로 이루어진 넓직한 지대석 위에 2중의 기단시설을 마련하였다. 하층기단은 1매의 거대한 석재(길이 164X160cm, 높이 45cm)로 이루어져 있는데, 갑석과 면석을 구분하였고 면석에는 중앙에 탱주를 좌우에는 양우주를 선각으로 마련하였다. 상층기단은 4매석으로 결구된 면석 위에 1매석의 갑석을 올렸다. 이 상층기단 역시 면석에는 양우주와 중앙의 탱주가 선각으로 처리되었다(면석의 1매는 후보되었다).
그 위에 3단의 각형 탑신괴임을 마련하여 탑신부를 받고 있는데, 현재는 4층까지만 남아 있으나 원래는 5층탑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옥신과 옥개석은 각기 1매석이며, 옥개석 층급받침의 수는 초층과 2층은 5단이나 3․4층은 4단을 보인다. 또한 각층의 옥신에는 양우주가 모각되었으나 3․4층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희미하다. 옥개석 상면은 초층에서만 1단의 각형괴임을 보일 뿐 2층부터는 별다른 시설없이 바로 옥신을 받고 있다. 초층옥신의 높이는 50cm이고 2층옥신은 27cm를 보여 체감율이 적어, 전체적으로 고준해지면서 경쾌하여 비교적 단아한 느낌을 주고 있다.
이 탑에 있어서 특기할 만한 사실은 전남대학교로 반입 당시 탑재를 해체하면서 상층기단 상부에서 발견된 사리공과 그 내부에서 나온 사리곤이다. 사리공은 방형으로 길이 13X13cm, 깊이 10cm의 규모로 마련되었고, 그 안에서 백자계통의 청자사리곤이 수습되었다. 이 사리곤은 뚜껑과 곤이 별개의 것으로써 뚜껑은 본래 접시로 쓰였던 것을 뚜껑으로 대용하였으며, 사리곤 속에는 茶毘한 뼈가루가 20g정도 들어있었다.
이와같은 확실한 자료에 의해 이제까지 고려시대의 소작으로 추정되어왔던 이 청풍사지 석탑은 그 조성시기가 조선 초기이며, 그 성격 또한 일반적인 불탑이 아닌 승려의 사리탑 즉 부도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다만 이 사리탑의 주인공이 누구인가를 알 수 없는 점이 안타까운 일이라 하겠다. 이 석탑의 규모는 현존 총고 3.86m이고 지대석은 한 변의 길이는 2.36m이다.
11. 미확인사지
「한국지명총람」(한글학회: 1982)이나 「문화유적총람」(전라남도: 1986) 등의 기록에 전하는 유적중, 금곡리 소재로 분류되어 있는 권선암(또는 관선암)․오진암․항골사지 등은 조사 결과 행정구역상 담양군 남면 정곡리에 속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북구 관내에서 현재까지 그 확실한 위치가 파악되지 않은 유적은 다음의 표와 같다.
<북구 관내 미확인사지>
유적명 |
소재지 |
문헌의 기록 내용 |
한국지명총람(13) |
백련암지 |
금곡동 |
오진암 북쪽에 있는 백련암골에 백련암절이 있었음. |
378쪽 |
불당재사지 |
〃 |
서름 남쪽에서 화순읍으로 가는 고개에 불당이 있었음. |
〃 |
삼각사지 |
삼각동 |
삼각 북동쪽에 있는 절텃골에 삼각사가 있었음. 빈대가 들끓어 헐어버렸음. |
384쪽 |
송선암지 |
장등동 |
도적골 남쪽에 있는 송선암산에 송선암이란 절이 있었음. |
392쪽 |
성적골사지 |
〃 |
점재 북서쪽에 있는 성적골에 절이 있었음. |
〃 |
불당골사지 |
청풍동 |
신촌 서북쪽에 있는 불당골에 불당이 있었음. |
393쪽 |
개안사지 |
화암동 |
화암 남쪽 개양사등에 옛절 개안사가 있었음. |
395쪽 |
3. 신흥사찰
본 장에서는 신흥사찰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 곳 북구관내의 신흥사찰은 몇몇 예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1960년대 이후에 창건된 사암들로서 창사와 내력도 길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규모 또한 사격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빈약한 모습이 대부분이다. 이들 중 특기할 만한 유물을 갖춘 森靜寺에 대해 살펴보고 기타의 사암들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목록표를 정리하고자 한다.
1. 삼정사
가. 위치 : 광주직할시 북구 두암동 산197-2
나. 사격 : 대한불교 태고종 선암사 말사
다. 연혁
삼정사는 1968년에 창건(창건주 김영구)된 사찰인데 시멘트 콘크리트로 조성된 총 6m 높이의 거대한 미륵입상이 모셔져 있고, 이 미륵입상을 받치는 연화대좌 아래에 놓여진 석조 사자상이 특히 주목된다.
라. 유물
1) 전각
삼정사에는 대웅전과 산신당 그리고 요사체 등 모두 3동의 전각이 있다. 이들 중 대웅전은 정면 3간․측면 2간인 단층 8작지붕의 서남향한 건물인데, 1단의 낮은 시멘트 기단 위에 원주의 콘크리트 기둥을 세우고 벽면은 시멘트 벽돌로 쌓아 단청을 입혔다. 지붕 역시 시멘트 기와를 사용하였다.
산신당은 정․측면 각 1간의 시멘트벽돌 건물로서 역시 시멘트 기와를 올린 지붕은 맛배지붕을 보이나 매우 형식적이고 간략한 건물이다.
2) 삼정사 미륵입상
산신당 오른편에 위치한 이 미륵입상은 1973년경에 조성된 시멘트 콘크리트제 불상으로서 총고는 약 6m이며 연화대좌의 높이는 1.9m이다.
3) 심정사 석조사자상
미륵입상을 받치는 연화대좌 아래에 석조사자상 1구가 놓여져 있는데, 사자상은 원형과 방형의 중첩된 대좌 위에 앞다리를 벌려 세운 채 앉아 있다. 세부적인 모습을 살펴보면, 툭 튀어나온 이마와 부릅뜬 눈 그리고 크게 벌린 입은 포효하는 모습이며 머리는 사자라기 보다는 용두에 가깝게 표현되어 있다. 턱 밑에서 가슴 부위에 걸쳐 턱받이와 같은 반원형의 귀갑형태를 마련한 것이 매우 특이한 모습인데, 그 윗면에 변형된 완자문이 시문되어 있다. 앞다리 사이와 복부는 깎아내어 입체감을 살렸으며, 오른쪽 앞발은 들어올려 보주(여의주)를 딛고 있다. 모발의 처리는 불상의 나발처럼 돌기문이며 머리의 갈기나 꼬리는 와운문형태로 끝맺음을 하였다.
이러한 형태의 사자상은 석탑을 장식하는 한 부분으로서 화엄사 4사자3층석탑(통일신라)이나 선암사 화산대사사리탑(조선) 등에서 보여지기도 하며, 분황사 모전석탑(고신라)이나 불국사 다보탑 등에서는 탑의 수호상으로서 나타나기도 한다. 이 사자상은 그 출처가 확실하지는 않으나 그 형태로 보아 석탑 등의 부분으로서 보다는 수호상으로서의 기능을 갖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전체적으로 장식적인 요소가 매우 강하게 나타나 보이지만 조각수법이 매우 치밀한 우수한 작품으로서 제작된 시기는 龜甲형태에 시문된 변형된 완자문 등으로 보아 조선시대의 소작으로 추정된다. 사자상의 규모는 총고 90cm이고 사자상고는 70cm이며 원형대좌의 직경은 45cm이다. 사자상과 대좌가 1매의 석재로 조각되었고 석질은 화강암이다.
2. 기타
북구 관내의 신흥사찰을 종파별로 구분해 보면 태고종계 사암이 8개소, 총화종계 사암이 7개소, 원효종계 사암이 6개소로 거의 대부분을 이루며 조계종․법화종․천태종 사암이 각각 1개소씩 보여진다. 이들에 대해 목록표를 통해 간략하게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북구 관내 신흥사찰 목록표>
사찰명 |
소재지 |
소속 |
창건주 |
창건연대 |
현주지 |
삼정사 |
북구 두암동 산197-2 |
태고종 |
김영구 |
1968년 |
송상명 |
신선사 |
〃 〃 산 135-1 |
원효종 |
최고을예 |
1977년 |
김대현 |
서천사 |
〃 〃 산 145 |
〃 |
김영렬 |
1959년 |
김영렬 |
율곡사 |
〃 〃 산 222-1 |
〃 |
이기행 |
1975년 |
김혜령 |
성광사 |
〃 〃 산 450 |
〃 |
성순태 |
1936년 |
전갑동 |
군암사 |
〃 각화동 104-2 |
태고종 |
강종섬 |
1978년 |
․ |
보현사 |
〃 문흥동 35-2 |
총화종 |
윤도암 |
1967년 |
․ |
성주암 |
〃 풍향동 39-12 |
태고종 |
김보명 |
1971년 |
김보명 |
봉덕암 |
〃 〃 22-7 |
원효종 |
양봉덕 |
1981년 |
양봉덕 |
금화사 |
〃 운암동 151-9 |
법화종 |
정수식 |
1981년 |
정묘관 |
일광사 |
〃 운암동 151 |
태고종 |
최봉옥 |
1980년 |
․ |
용문사 |
〃 본촌동 산1 |
〃 |
서남숙 |
1963년 |
․ |
보문사 |
〃 본촌동 산27 |
조계종 |
? |
1959년 |
일화 |
모산사 |
〃 생룡동 산42 |
총화종 |
백한종 |
1928년 |
|
은혜사 |
〃 삼각동 279-8 |
태고종 |
조주행 |
1971년 |
|
성각사 |
〃 서산동 산1 |
〃 |
최영래 |
1975년 |
박윤종 |
관등정사 |
〃 일곡동 210-4 |
〃 |
최환숙 |
1983년 |
|
약수암 |
〃 망월동 568 |
원효종 |
? |
? |
양보우 |
구인사 |
〃 우산동 208-10 |
천태종 |
|
|
|
원용사 |
〃 우산동 554-49 |
총화종 |
|
|
|
대덕사 |
〃 운암동 산75 |
〃 |
|
|
|
성불사 |
〃 서산동 92-8 |
〃 |
|
|
|
제산사 |
〃 중흥동 252 |
〃 |
|
|
|
포교원 |
〃 우산동 34-2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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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광주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