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산/무등산이야기

가람의 기원과 변화발전

무등산자 2007. 9. 13. 21:41
 

〔4〕 가람의 기원과 변화발전


1. 불교의 전래와 변천

  B.C. 5세기경 인도의 북부에서는 고다마싯달타(B.C. 565~486?)가 석가족 출신으로 태어나 80평생을 선과 중생을 위하여 설법함으로써, 성인으로 추앙되고 석가모니라 칭송되어 불교를 이룩하였다. 이처럼 인도에서 생성된 불교가 중앙 아시아를 통해 중국에 도입된 시기는 한국보다 3세기 가량 빠른 후한때인 A.D.1세기 중엽으로 추정되며, 한국에는 석가모니가 입멸한 지 800여년이 지난 A.D. 4세기 중엽(A.D. 372)에 공식적으로 도입되었다.

  석존이 입멸한 후 석존의 사체는 다비에 부쳐져 그의 유골이 인도의 8개 부족에 나누어졌으며 이는 다시 Asoka왕 때에 8만4천으로 나누어져 인도의 각지에 소위 Sanchi 탑으로 지칭되는 원시형탑의 형태로 봉안되었다. 그 후 불탑은 의미가 약화되었고 불상을 모시기 위한 불당이 지어지는 동양의 한문화식가람이 형성되었다. 그래서 불교도는 탑파, 곧 불사리와 불상, 이 두곳을 향하여 예배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에 처음으로 소수림왕 2년(A.D.372) 불교가 전래되었는데 이웃나라인 전진에서 순도가 불상과 불경을 전한 것이 그 기원이 되었다. 그 2년후 374년에는 승 아도가 고구려에 들여왔다. 고구려는 이들 승려를 위해 375년에 초문사와 이불란사를 건립하여 불교를 장려하였고 이어 평양9사를 비롯하여 국내에 많은 사찰를 창건하였다. 백제에서는 침류왕 원년(A.D. 384)에 동진으로부터 서역승인 마라난타가 처음으로 백제에 건너와 불교를 전하였다. 침류왕은 이를 숭앙하여 385년에 한산에 불사를 창건하여 불교보급에 힘썼다. 이어 백제는 도읍을 공주, 부여로 옮기면서 각지에 많은 사찰을 건립하여 왕흥사, 미륵사, 수덕사 등의 사찰명이 전해져 있다. 이후 백제는 성왕때 승 겸익을 등용하여 불교를 장려하였으며 노리사치계를 일본으로 보내 불교를 전파하기도 하는 등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웠다.

  신라에서는 5세기 중엽에 고구려 승 묵호자가 들어와 선산지방에서 개인적으로 포교하여 보급되어 나갔으나 눌지마립간 때 박해로 끝나고 말았다.

  그 후 양의 사신인 원표에 의하여 비로소 신라왕실에 불교가 알려졌던 것이다. 이 후 왕실은 불교의 수용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귀족들의 반대로 실패하고, 그 결과 이차돈이 순교하게 되었으며(법흥왕14년, 527) 결국 신라에서도 불교가 공인되기에 이른 것이다.

  삼국에 있어서 모두 불교를 받아들이는데 선봉적 역할을 한 것은 왕실로 그들에 의하여 불교가 강력히지지 발전하게 된 것은 전제화된 왕권중심의 고대국가에 있어서 정신적인 지주로써 적합한 때문이었던 것이라 믿어진다. 그런점에서 삼국시대의 불교는 무엇보다도 왕실불교요 국가불교였던 것이다. 때로는 병을 고친다든지 자식을 구한다든지 하는 개인의 복을 비는 경우도 있었지만 국가의 발전을 비는 호국신앙이 더욱 강하게 나타났던 것이다.

  또한 삼국시대에 가장 중요한 교파는 계율종인데 백제의 겸익이나 신라의 자장등이 그 대표적 인물로 특히 자장은 대국통으로서 신라의 불교를 총관하였다. 「계율」이란 승려들의 지켜야 할 생활기준을 강조하는 것으로 종교를 통한 인심의 귀일이라는 의의를 갖는 것이다. 삼국말기 불교가 변모해가면서 고구려의 보덕은 도교의 불로장생사상에 대항하기 위하여 금강불양의 불성을 일체중생이 모두 가지고 있다는 열반종을 제창하였다.

  이렇게 불교가 국가적인 지지를 얻음으로 승려들은 때론 정치적인 고문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을사표를 쓴 원광, 대국통으로서 황룡사9층탑의 건축을 건의한 자장 같은 이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은 문화적으로는 중국문화수입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으며 정신적인 교사로서 민심을 교도하기도 하였다.

  통일신라에 있어서 지배적인 사상은 불교로서 당이나 인도에까지 가서 불법을 구하는 고승이 많았다. 원광․자장․의상․원측 등의 명승이 중국에 가서 불교를 배워오고 혜초는 멀리 인도에까지 순례하고 「왕오천축국전」을 남기는 등 유학하고 돌아오는 승려들의 수가 많아질수록 당에서 성립된 여러종파가 신라에 전해져 교종의 5교가 성립되었던 것이다.

  통일이후 의상은 화엄종을 개종하였는데 신라귀족의 두터운 존경과 믿음을 받았다. 그는 중국 화엄의 대종사인 지엄에게서 배운 고승으로서 귀국 후 부석사를 창건하고, 이를 화엄종의 중심도장으로 삼아 각지에 10대 사찰을 열어 전도 하였으며,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다.

  원효는 여러 종파의 대립이나 종파의식의 대두를 배격, 여러종파의 모순상쟁이 보다 높은 입장에서 융화통일 되어야 할 것을 주장하는 독특한 사상체계인 법성종을 개종하였다.

  진표는 유(瑜)가론과 유(唯)가론을 소의경전으로 법상종을 개종 금산사를 본도장으로 활동하였다.

  교종이 귀족적인 의취에 부합하여 크게 귀족사회에서 환영을 받았으나, 9C 이후 불교계의 새로운 경향으로 선종이 유행하였다. 선종은 복잡한 교리를 떠나서 심성을 도야하는데 치중하여 견성오도를 주장 좌선을 통해 얻는 심적체험으로써 우주만상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으로 9산이라는 9개파를 성립시켰다. 보림사에서 활동한 도의의 가지산을 비롯 이엄의 수미산, 무염의 성주산, 지선의 희양산, 홍척의 실상산등이 그것이다. 선종은 신라의 변방에서 발달 그 지방의 호족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의천의 천태종과 지눌의 조계종이 발달하였다. 의천은 교선의 일치를 주장하고 선에 대신할 수 있는 지관(잡년을 멎게하고 바른 지(智)로서 대상을 보는 것)을 중요시하는 교종을 주로하는 천태종을 폈다.

  이러한 분위기가 선종을 자극 지눌은 돈오점수(인간의 마음이 곧 불심임을 깨닫고 이를 위해 꾸준히 수행하는 것)를 중요시하는 선을 주로하는 조계종을 성립시켰다.

  이리하여 고려의 불교는 5교 양종의 새로운 편성을 보게 되었다. 고려의 귀족들은 불교를 국가나 개인의 현세에 있어서의 행복을 좌우하는 현세이익의 종교로 생각하여 국가나 왕실의 융성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사찰의 창건이라든가 각종의 불교행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또한 과거에 승과제도를 창설하는 등 많은 후원을 받았던 고려불교는 호국신앙과 결부되어 국가적 보호아래 세속적 세력을 얻게 되었으며 불사는 도성을 가까이하여 송사 고려전에 「왕성유불사70구」라 할 정도로 크게 발전하였고 승려는 준귀족적 권위를 누리게 되었다. 각 종파의 주요도장은 개경등의 도성중심이 되어 산지의 사찰들이 발전을 이루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조로 바뀌면서 융성을 누렸던 불교는 자체가 안고 있던 병폐와 조선왕조의 숭유억불정책으로 급격히 퇴락되었다. 처음 태조는 불교를 신봉하여 조계선종의 본사가 된 흥천사를 서울에 세우고 해인사 고탑을 중수하는 등 불교를 위한 공헌이 많았으나 태종때에 와서는 궁중내의 모든 불사를 폐지하고 전국에 242사만을 남겨두고 그 이외의 사원은 모두 폐지하였으며, 동시에 거기에 소속된 토지와 노비를 관에 몰수하였다.

  그 후 사찰의 수는 더욱 줄어들어 세종조에는 36사만을 남겨놓았고 승려의 자유로운 도성출입을 금하였으며, 연산군은 서울의 대사를 모두 폐하고 중종에 이르러 승과도 폐지되어 불교는 완전히 산중으로 잠입하고 말았다. 그러나 세조를 비롯한 몇몇 왕후의 숭불과 명승들의 출현으로 법맥이 이어지고 사찰도 중수되어 위축된 속에서도 사찰들이 산중에 남아있을 수 있었다.


2. 가람의 형성 및 불교의식

  가람이란 범어의 Sangharama를 말하는 것으로 이를 한문으로 음역하여 승가람마 혹은 가람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승가란 중, 남마란 동산(원(園))의 뜻으로 가람본래의 의미는 중원으로서 많은 승려들이 한데 모여 불도를 수행하는 장소를 말하는 것인데 후세에 이르러서는 단순한 건조물로서의 전당을 가르키는 명칭, 또는 사찰의 통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국은 옛날부터 금수강산이라하여 산세의 아름다움을 자랑하여 왔는데 그러한 아름다운 산세에는 반드시 사찰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한국의 사찰은 아름다운 계곡의 절영지를 선택하여 건립하였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 이유는 9세기 이후 복잡한 교리를 떠나서 심성을 도야하는데 치중했던 선종의 영향으로 당시의 9산의 성립을 들 수 있다.

  인도에서는 청량한 곳이 이상경으로 여겨져 막연히 히말라야 산계를 수미산으로 생각하여 오지(奧地)의 청량한 곳에서 사대하가 시발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동북아에서는 오대산을 청량산이라 신앙하였는데 이 산은 문수신앙을 중심으로하는 영산으로서 각지의 많은 순례자들의 모여들어 문수보살에 관한 수많은 영험이나 고승의 기서(奇瑞)등이 행해진 곳이다. 중국 오대산 불교의 문수신앙이 자장에 의하여 한국에 이식되어 개창된 가람이 월정사인 것이라는 사실에서 한국적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자장의 입당, 오대산 수학에서 두 계통의 영산신앙에 의한 가람개창을 보게 되었다.

  하나는 오대산의 문수신앙에 의한 문수보살에서 전수한 석가의 사리에 중점을 두고 사리탑을 건조하여 석가사리라는 점에서 오대산의 영산보다는 석가생전의 설법장의 하나로서 통도사를 개창한 것이며, 또 하나는 중국 오대산의 영산과 문수신앙을 그대로 이식하여 개창한 것이 월정사이다.

  불교신앙에 있어서 이같은 영지신앙의 의미는 신라시대의 4영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즉 국가의 대사를 논할 때 필히 정해진 영지에서 행하면 좋은 성과가 얻어진다는 신앙적 의미인 것이다. 이러한 영지신앙이 보편화되고 행사화된 것이 당시에 걸쳐 성행한 팔관회인 것이다. 이처럼 영지관념의 원초형은 성적존재의 거주처 혹은 청정한 장소였으며 한국의 영지는 풍토적 조건에 의하여 산악숭배가 성행한 것이라 하겠다. 신라후기에는 도선의 풍수지리설에 의해 가람건립이 제한 받게 되고 이것이 고려 태조의 훈요10조에 의해 철저히 지켜지자 가람의 건립이 모든 조장설정에 의한 의식불교에의 전향으로 나타났다. 고려사에 나타난 수많은 법회가 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신라에서의 성지의 가람화가 고려에서는 이러한 법회를 통해 가람 또는 조장의 영지화의 성격으로 나타난다. 고려태조가 연등회와 팔관회를 중시하여 훈요에 이를 남긴것이라든지 신중도장을 자주 열게되었음은 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연등․팔관회의 신앙적 기능이 광명청정 혹은 명산대천에 대한 신성의 신앙에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신중도장을 자주열었다는 사실은 이를 뒷받침 하는 것이다. 신중은 일반적으로 불법의 수호신으로서 신앙되어지거나 실제의 신앙행위에서는 도장을 신성화하는 기능을 갖는 신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신중에 대한 의례는 모든 의식도장에 있어 도장을 청정하게 한다는 의미로 행해지며 또한 외형적인 기능론을 초월하여 공간을 정신화하기 위한 의식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핀바와 같이 한국불교사원의 가람은 청정도장이다. 이같은 청정도장에 불보살을 봉안한 것이 아니면 불보살이 있는 곳을 청정화한 것이다.

  이와 같은 사원의 정신인 청정의식이 출현하게된 배경을 살펴보면 석존 당시 최초로 행해졌던 의식인 안거, 포살, 자자를 들 수 있다. 안거란 파라문교에서 여름철 우기에 외출을 금하던 의식을 불교가 받아들인 것으로 승려들이 각각 개인의 수행과 교화로 인하여 서방에 널리 분산하여 활동하다가 양기나 강설기가 되어 활동이 부자유하게 되면 일정한 곳에 모여 노장들의 지도를 받으면서 안거를 한 것으로, 이 안거를 위해 짓기 시작한 공동의 방사가 승원이 생겨난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포살은 사천왕들이 세간을 관찰하러 나오므로 그 날만큼은 청정한 행위를 해야된다는 파라문교의 풍속을 불교가 받아들인 것으로 불제자들이 매월 8,14,15,23,29,30일에 계본을 외우고 설법을 듣는 일종의 법회였다. 그리고 자자란 하안거의 마지막 포살일(15일)에 행해지던 자기성찰이란 고해의식을 말한다. 이러한 의식이 행해지다가 석가모니의 입멸후 불사리를 봉안한 불탑이 건립되어 예배대상이 불탑으로 옮겨지고 후에는 불상이 만들어져 불당이라는 새로운 공간에서 의식을 담당하게 되었다. 한편 승단은 진보적인 대중부와 보수적인 상좌부로 분열하여 대승과 소승으로 나누어졌는데 대승은 이타를 주지로 하는 보살의 도로 중생을 구제하고 속세를 정화하며, 6도(포시, 지계, 인욕(忍辱), 선정, 지혜)를 실천함으로써 생사를 초월한 부처의 오경에 도달하려는 것인데 많은 부처의 존재를 인정하며 수많은 신들을 포용하였다. 소승은 재래의 정통적, 보수적 불교로써 석존 오직 한 분만을 불타로서 숭앙한 것으로 사리신앙을 그 근본으로 한다.

  대승불교를 받아들인 중국불교는 각 경론의 불교사상 중심으로 각 종파를 형성하고 그 교리에 따라 여러 가지의 의식이 행해지게 되었는데 주로 법회, 포살, 자자, 삼미 및 수계의식 등이 그것이다. 토속신앙의 기반위에 행해진 불교의례에는 불, 법, 승의 구체적 신앙의 대상이 있고, 그 대상을 형상화한 불상, 그리고 그 불례에 따른 경전의 독경과 공양물등은 재래의 신앙으로 하여금 점차 불교를 이해하게 하였고, 또 그에 귀의하게 하는 좋은 계기를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 이처럼 불교신앙의 사회적 전개가 왕실, 귀족뿐만 아니라 일반서민에 까지 전개된 불교의례에는 자행의례와 타행의례가 있다. 자행의례에는 조․석으로 불․보살게 불공을 드리는 조석예불과 석존의 출생, 출가, 성도, 열반등 불교의 4대 명절법회가 있다. 타행의례에는 지장제일, 관음제일, 약사제일의 법회, 백종법회, 49제, 100제, 3년제 등등이 있다.


3. 한국사찰의 배치형태

  동일한 불교문화권인 한국과 중국 및 일본의 가람배치형식은 비슷한 원형을 갖는다. 중국은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문화를 수용할 때 인도의 사찰형식 까지 도입한 것이 아니라 중국계건축의 궁극적인 가치체계인 고대천문사상과 유교적 질서에서 근원을 찾았다. 이를 직접적으로 잘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 궁전건축의 배치로 사찰도 그 원형은 궁전과 다를 바 없다.

  중국을 통하여 도입된 한국 불교문화의 제반사항들도 중국과 유사하였으며 한국의 고대사찰들 역시 이 원리을 충실히 따른 것들로 고구려의 금강사지(창건연대, 문자왕 7년 498년)로 추정되는 평양 청암리사지는 중앙에 8각형의 평면을 가진 탑을 두고 3면에 금당이 배치된 가람배치형식을 취한 것으로 고구려 사찰의 전형적인 배치였음을 알 수 있다.

  부여 군수리사지는 한국의 전형적인 고대가람배치로 중문․탑․금당․강당이 중심축상에 일렬로 놓이고 강당과 중문을 회랑으로 이어 사찰의 일곽을 형성하는 형식이다.

  경주의 황룡사지는 군수리사지를 약간 변형시킨 것으로 금당의 동서에 건물을 놓아 7당가람제를 완성한 것이다. 이 7당가람제란 일본인들이 흔히 사용하는 『백제7당가람제』로서 중문․탑․금당․강당이 자오선상에 남으로부터 배치되고 중문과 강당을 연결하는 방형의 회랑을 돌려 금당과 탑을 그 내정에 두고 남회랑의 좌우단과 북회랑의 좌우단에 경루 혹은 종루를 설치하는 식을 말한다.

  한국의 초기불교는 인도불교의 사리신앙 영향으로 불상을 모시지 않아 금당은 일반출입이 금지되고, 탑이 예배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전체 가람의 중심요소는 탑이 되고 금당은 탑을 에워싸는 요소에 불과하다.

  이들 세 가람의 배치는 모두 일본에 전수돼 일본가람배치의 원형이 되었다. 금강사지는 역시 1탑3금당인 비조사의 원형이 되고 군수리사지는 1탑1금당인 사천왕사의 원형이, 황룡사에서 발전한 신라의 사천왕사는 쌍탑식인 약사사의 원형이 된다.

  이상의 원초적 구성에서 발전하기 시작하는 한국사찰의 배치형식은 흔히 입지의 종류에 따라 초기의 평지형, 중기의 구릉형, 후기의 산지형으로 분류하는 것이 일반적인 방법이었는데 이는 불교교세의 성쇄에 따라 입지의 차이를 나타낸 것이다. 즉 삼국시대에 도입된 불교는 삼국 간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호국왕실불교로서 도읍내 평지에 대규모로 건립되었고, 삼국통일 후엔 교세의 영향력이 차차 감소해 교외의 구릉에 세워지게 되며 나말여초 이후엔 풍수지리와 선종의 성행으로 인해 깊은 산중에 위치하게 되어 산지가람으로 변화하게 된 것이다.

  물론 평지사찰은 교종의 원리와 부합하며 구릉형은 당시 불교의 밀교적 성격과, 산지사찰은 선종의 교리를 적절히 수용할 수 있는 건축형식을 갖추었었다. 그러나, 일본의 선종사찰이 대도시 안에 세워졌던 예를 보더라도 교리상의 필요에서 입지를 택한 것만은 아니고, 교단의 사회적 세력의 강약에 의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겠다.

  한국가람의 변천을 통시적으로 발생기, 정착기, 전형기, 쇠퇴기 등으로 나누어 그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불교가 최초로 도입된 발생기의 가람은 위에서 살펴 본바와 같이 탑 중심의 가람이 있다. 평지에 세워졌기에 영역을 한정시키는 유용한 방법으로 회랑이라는 건축요소가 사용되었다.

  정착기에는 탑의 중심성 약화라는 큰 발전을 보게된다. 일탑식에서 쌍탑식으로 변화하여 시각적으로 금당이 강조된다. 예배의 대상이었던 탑의 의미는 점차 약화되고 금당이 예배기능의 중심이 될 뿐 아니라 전체가람의 공간적 중심이 된다. 이 현상은 회랑식 사찰의 내부적 발전으로서 입지에 대한 해석은 고려되지 못했다.

  따라서 입지조건이 갖는 불합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회랑을 없애고 그 대신 산맥과 자연적 조건 자체가 영역의 폐쇄성을 형성해 주는 곳을 찾아야 하는 노력이 수반되었다.

  전형기에는 극소수의 왕실사찰만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사찰이 산중에 세워져 산지사찰로서의 독특한 발전을 한다. 이 시기는 불교의 세력이 사회적으로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기로 불교건축이 가장 한국적 특수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중심축에 의한 방향성을 따라 일주문, 금강문, 해탈문을 지나 누문을 누하로 진입하면 넓은 중정에 이르고 그 좌우에 각종 불전이나 요사가 배치되었으며, 중정의 정면에 대웅전이라 흔히 지칭되는 금당이 놓여있다. 이는 도입부, 부공간, 주공간, 승화공간 등으로 구분할 수 있는 공간의 단계를 갖는 공간구성형식을 취한 시기이며 입지의 다양성에 적응하여 자연지형에 따라 현명하게 대처하는 처리방식 등이 완성된 것이다.

  쇠퇴기에는 조선왕조의 억불책으로 불교의 세력이 약화되어 기존의 많은 사찰이 폐허화됐으며 신축된 사찰일 경우에도 극히 필요한 기능 이외의 건물을 지을 여력이 없이 규모가 적어지거나 단순해 졌다. 따라서 이 시기의 사찰은 사찰로서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기본형식을 보여 주고 있다. 중심축 상에 강당과 불전을 놓고 그 좌우에 승방인 요사체를 배치해, 금당 앞 중정을 폐쇄할 수 있는 최소한의 건물만으로 가람의 한 단위를 형성하였다.


4. 광주의 사찰

  백제에 불교가 도입된 이후 불교는 점차 남하하면서 그 영향력이 증대되었고, 광주․전남지역에 까지 교세가 본격적으로 성행되었을 것이라 짐작되나 백제기 이전의 불교유적이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아 백제의 고토로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다만 무등산의 증심사, 원효사, 약사암이 통일신라시대에 초창된 고찰이며, 불교가 흥성하였던 고려시대에는 광주의 중심지에 큰 사찰이 있었고, 현 광주공원 서5층석탑이 있는 곳에 성거사, 임동 구광주농고 근처에 십신사, 지산동에 백천사 등이 큰 사찰이 즐비하였고 조선조 중기 까지는 무등산에 대소사찰이 30여개소가 있었다고 전한다. 현재 무등산에는 증심사, 원효사, 약사암 등과 십여개소의 사지가 있을 뿐, 예전의 사찰들은 모습을 감추었다.

  상기한 고찰을 제외한 사찰중 해방전 일제시대에 세워진 사찰로는 원각사(1913년 4월 건립), 덕림사(1932년 2월 건립), 신광사(1934년 8월 건립), 흥룡사(1935년 3월 건립), 보덕사(1939년 1월 건립), 삼광사(1934년 4월 건립), 관음사(1945년 2월 건립)등이 있었다. 하나 역시 대부분 모습을 감추었다. 해방과 건국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광주에는 광림사가 1952년 5월, 용화사가 1954년 3월, 동광사가 1956년 4월에 각각 건립되었다. 그러나 불교계의 활기띤 동향에 못지 않게 50년 공산군의 남침은 전국적으로 사찰에 막대한 피해를 끼쳤으며 광주에서도 증심사와 원효사가 전화로 소실되었다.

  증심사는 무등산의 대표적인 사찰로 신라 헌강왕 4년에 철감국사가 초창, 고려 선종 11년(1094)에 혜조국사가 중창, 조선 세종 25년(1443)에 김방이 3창하고 정유재란 때 불타버린 뒤 광해 1년(1609)에 석경, 수장, 도광의 세 선사가 4창하였다. 그 후 전란 중인 1951년 4월 22일 5백전과 비로전만 남기고 소각 되었는데 이때 불탄 건물은 대웅전, 명부전, 극락전, 회승당, 취백루 등 조선조 중기 건축의 귀중한 유구들이었다. 그 뒤 사찰측과 신도들에 의해 대웅전과 부속건물 일부를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효사는 무등산의 북쪽 중복에 있는 고찰로서 원효국사에 의해 개창되었다고 전하나, 이 사찰도 역시 6․25의 재화를 입고 사찰이 소각되었다. 또 사찰의 경내에는 원효대사의 부도가 있고, 금동비로사나불좌상이 안치 되었는데 盜失되었다.

  약사암은 무등산의 고찰로 6․25의 전화를 면한 상태로 방치되었다가 건물이 노후하여 1978년에 중건하였다. 철감국사가 증심사를 창건하기 앞서 세웠다고 전해지는 약사암 본전에는 석굴암의 본존불과 똑 같은 석조여래좌상이 안치되어 있다.

  조선의 중종 25년(1530)에 기록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내용에 의하면 무등산에 무량사, 천복사, 개용사, 원효사가 있고, 성거산에 성거사, 현의 북쪽 5리 평지에 십신사가 있는데 범어로 쓴 비가 있다고 하였다. 또한 현의 동쪽 2리 평지에 선원사가 있고, 무등산에 상기한 사찰 이외에 증각사, 규봉사, 금석암이 있으며 그 주변 산세와 봉우리의 형세를 김극기의 시를 인용하여 표현하였다.

  또한 조선 고종8년(1871)에 편찬된 「호남읍지」의 내용에 의하면 광주에는 증심사와 원효사가 있는데, 증심사는 동이십리 무등산에 자리하고 있고 원효사는 동이십오리에 자리잡고 있으며 신승 원효가 건립하여 그 이름을 원효암이라고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광주시에는 조계종과 태고종의 사찰이 각각 30여개소이고 원효종, 법화종 등 각종 종파의 사암이 사암연합회에 등록되어 있는 것만해도 수효가 70여 개소에 이르러 광주시내에 소재하고 있는 사찰의 합계는 100여개소에 이른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신흥사찰들로 옛스러움이나 전형적인 사찰의 품격을 갖춘 고찰이라고 보기에는 미흡한 점이 많다. 물론 현상을 정확히 정리기록 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나 최근에 개사된 것 까지 조사한다면 난잡함과 현실적으로 조사의 어려움이 따르게 되므로 본 조사에서는 초창년대가 오래된 것을 중점적으로 하고, 초창년대가 밝혀지지 않은 것은 사찰의 유지에 불교의 유물이 현존하거나 문헌에 고찰지라 입증되는 기록이 있는 것만을 골라서 조사하였다.

출처:광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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