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산/무등산이야기

개관

무등산자 2007. 8. 14. 18:39

무등산은 광주광역시의 동쪽 가장자리와 담양,화순에 걸쳐 우뚝 솟아 있는 광주,전남의 진산(鎭山)이며 남도민의 신산(神山)이다.

산세가 육순하고 동서남북 어느곳에서 보나 둥그스름한 모습이 한결같아 보는 이로 하여금 믿음직스럽고 후덕한 느낌을 준다.

뿐만 아니라 광주 시내 중심지인 충장로5가에서 정상까지 직선거리 9.2km의 가까운 거리에 있기 때문에 시민들에게는 더욱 친밀하다.

좋은 산세가 좋은 고을을 일으킨다고 했으니 1,187m의 큰산에 기대어 자리잡은 우리고장과 우리고장 사람들이야말로 좋은 산세를 타고난 선민(選民)이 아닐 수 없다.

세계 어느 나라 어느 곳에도 이처럼 조화로운 산을 150만 인구의 도시권 안에 두고 있는 곳은 없을 것이다.

 

산은 대체로 토산(土山, 또는 肉山)이기 때문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으며 곳곳에서 솟아나는 약수는 무등산을 찾는 이들의 갈증을 풀어주고 있다.

산 기슭에 있는 증심사에서 출발하여 두어시간 보행으로 산허리의 원효계곡까지 자동차로 불과 30분 거리이며, 여기서 한 시간 반 정도만 걸으면 정상에 오를 수 있다.

무등산의 자랑은 토산으로서의 후덕한 풍모와 더불어 정상을 중심으로 곳곳에 펼쳐진 웅장한 암석미(岩石美)를 들 수 있다.

이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규봉(圭峰),입석(立石),서석(瑞石)으로 이것을 무등산 3대 석경이라 하는데,

육당 최남선(六堂 崔南善)은 '세계적으로 이름난 금강산에도 부분적으로는 여기에 비길 경승이 없으며, 특히 서석대(瑞石臺)는 마치 해금강(海金剛)의 한쪽을 산 위에  올려 놓은 것 같다' 며 감탄하기도 했다.

무등산에는

144과 1,051종의 한국 온대 남부 기후대와 온대 중부 기후대에 생육하는 식물이 고루 분포되어 이ㅛ는 것으로 ㅂ고 되고 있다.

그 가운데에서 식용류는 280종이며 약용류는 187종으로서 철따라 다투어 꽃을 피우니 사철 내내 등산객을 즐겁게 해준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봄철의 진달래, 여름 산나리, 가을철의 단풍과 산등성이의 억새가 무등산의 운치를 한결 더 돋우준다.

그뿐인가. 겨울철에 나뭇가지에 눈부시게 피어난 빙화(氷花),설화(雪花)는 어찌 봄,여름,가을의 꽃들에 비할 것인가?

여름의 맑은 물과 폭포 또한 그냥 지날칠 수 없는 장관이니 예로부터 시인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정상 북쪽으로는 원효계곡을 따라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펼쳐져 있고 충효동과 지실에는 풍암정,취가정,환벽당,식영정,독수정과 수남학구당 그리고 좃ㄴ조 민간원림의 전형이라 할 소쇄원 등 좃ㄴ조 문화의 정수가 스며 있는 수많은 정자가 자리잡고 있다.

또한  이곳에는 비옥한 들녘이 펼쳐져 있고 대대로 뿌리 내리며 살았던 광산김씨,영일정씨,제주양씨를 비롯한 여러 호족 가문들이 탄탄한 경제력을 누리고 있었다.

이들의 경제력은 선비들이 밀 학문을 논하고 풍류를 즐길 수 있는 원천이 되었다.

빛나는 조선조 유학자들의 정자들이 밀집되어 있는 이곳에는 깊은 학식과 넉넉한 인품을 갖춘 각계각층의 지도자들과 시인묵객들이 모여들어 학문고을 논하고,국사를 걱정하고,풍류를 즐기며,시를 읊었으니 이곳 원효계곡과 창계천 강변이야말로 조선조 사림문화를 찬란하게 꽃피운 텃밭이 아닐 수 없다.

송강 정철의 성산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 등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정수가 바로 이곳에서 싹터 빛을 보게되었으며 그가 자라며 공부했던 환벽당이나 식영정은 지금도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잇어 당시의 문학적 감흥을 후손에게 전해주고 있다.

 여기에는  또 영산강(榮山江) 제1단계 사업에 따라 이루어진 광주호(光州湖)의 맑은 물이 지실과 충효리 앞까지 넘실대고 있어 호수와 정자들과 원림이 한데 어울려 일대 경관을 이루고 있다.

또한 망월동(望月洞)의 분토 마을에는 고려말의 명장 정지(鄭池)의 경렬사(景烈祠)의 묘역이 있으며,벌판을 건너면 광주민주항쟁 희생 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국립 5.18 묘역이있다.

이밖에도 무등산에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왜적과 싸우다가 장렬히 순국했던 제봉 고경명(霽峯 高敬命)의 발자취와 간신들의 모함으로 스물아홉살의 젊은 나이에 억울하게 옥사한 충장공 김덕령(金德齡) 의병장의 넋을 모신 충장사,그리고 곳곳에 그가 무예를 닦았던 전설들이 깔려 있다.

 화암(花岩)마을 한쪽에는 임진왜란 당시의 충신니요 지조 높은 선비였던 해광 송제민(海狂 宋濟民)의 사우인 운암서원(雲岩書院)이 있고, 화암마을의 두편에는 정묘호란 때 안주성 싸움에는 큰 공을  세운 전상의(全尙毅)의 사당인 충민사(忠愍祠)가 있으며 평두뫼에는 그의 예장묘(禮葬墓)가 있다. 뿐만 아니라 한말에 이르러서는 이곳이 의장병들의 거점이 되었으니 무등산은 아름다운 경관이나 풍치로서 뿐만 아니라 국난을 이겨낸 선열들의 얼이 담긴 곳으로서 그 의미가 큰 곳이라 하겠다.

 제봉 고경명이 무등산을 오르며 보고 느낀 바를 적었던 "유서석록(遊瑞石錄)"은 4백여년 전인 16세기 무등산의 이모저모를 짐작하게 해준다. 특히 그가 적어놓은 사암(寺庵)의 이름을 통해 우리는 오늘의 폐허에서도 지난날의 영화롭던 불사(佛寺)의 자취를 찾아볼수가 있다. 지금도 무등산에는 증심(證心), 약사(藥師), 원효(元曉), 규봉(圭峯) 등 여러 절들이 흩어져 있고, 절마다 천년의 자취와 숱한 전성과 소중한 문화재들을 간직하고 있다. 더욱이 바위와 너덜에까지도 원효(元曉), 의상(義湘), 철감(澈鑑), 지공(指空), 도선(道詵), 나옹(懶翁), 등 고승들에 얽힌 전설이 남아있어 불교의 성산(聖山)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광주광역시가 전라남도와 분리되어 이전인 1972년 5월22일 전라남도는 공고 85호로 무등산을 도립공원으로 지정했으며 이로써 무등산은 자연자원과 역사 문화자원의 보고로서 그 보호 관리를 받게 되었다.

 무등산을 찾는 산행객이나 관광객도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생활수준의 향상에 따른 레저생활의 대중화와 80년대 광주민주항쟁으로 말미암아 무긍산에 대한 관심의 확산, 교통의 개선 등은 행락객과 산행객의 폭증을 유발하고 있다. 그러나 이로 말미암은 자연의 훼손과 환경오염으로 온 산이 몸살을 앓기도 했지만 민간단체들의 무등산 사랑운동이 확산되며서 전 시민적 운동으로 정착되었고 행정당국이 부분적으로 등산로를 제한하는 지정등산로 등의 시행으로 무등산은 차츰 옛 모습을 되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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