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산/무등산이야기

당산재 자료

무등산자 2007. 9. 13. 21:13
 

Ⅰ. 조사개요


 세계의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나름대로 고유의 토착신앙을 갖고 있기 마련인데 이를 민간신앙이라고 한다. 민간신앙은 초인간적인 힘 즉 자연에 대한 공포심과 외경심을 극복하고 보다 나은 생활을 영위하기 위하여 잉태된 원시적 종교체계라고 할 수 있다. 교조나 문서화된 교리가 없고 체계화된 조직이 없지만 오랜 세월을 통하여 민간에 의하여 전승되고 숭앙되어온 민간신앙은 어떠한 종교보다 오랜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

 유구한 세월동안 민족의 의식속에 깊이 뿌리내려 심성을 지배해온 민간신앙은 조상들의 생활과 매우 밀착되어 있으며 또한 정신세계를 잘 반영하고 있다. 그렇기에 민간신앙은 민족문화의 연구와 이해에 가장 기초가 되는 부분이라 하겠다.

 민간신앙은 학자들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게 분류되고 있으나 대체로 가신신앙, 마을신앙, 무속신앙으로 나눌 수 있다. 마을신앙의 대표적인 유형으로는 당산제, 장승, 서낭당, 기우제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에서 당산제는 우리의 가장 원초적인 토착신앙으로 고대부족국가 형성에 크게 작용했으며, 나아가 신성, 통합, 정치, 축제, 예술 등의 다양한 기능은 촌락공동체의 장구한 역사적 생활을 유지 강화하는 원천이 되어 왔다. 때문에 당산제는 일찍부터 많은 사람들에 의해 주목을 받아왔다.

 일제시대에는 일본인들이 식민통치를 원활히 하고 한반도를 영원한 식민지화실 위한 자료로 이용코자 실시한 사회문화 조사활동 수행중 각 지역 행정관서의 도움을 받아 전국적으로 당산제를 조사하였다. 이와 더불어 민족문화의 중대함을 깨달은 민족사학자들에 의하여 민속문화 전반과 함께 마을제사도 조명되기 시작하였으며 1960년대부터는 관심이 점차 늘어가기 시작하였다. 1970년대를 거쳐 80~90년대에는 더욱 활성화되어 각종 학술단체, 연구기관, 박물관 등에서 활발한 연구조사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광주지역에서도 꾸준히 조사 연구되어 왔는바 기존의 연구성과를 보면 다음과 같다.

 광주시ㆍ향토문화개발협의회, 『무등산』, 1988.

 나경주, 「민간신앙」, 『민속지』, 광주직할시, 1990.

 향토문화개발협의회, 『문흥동』, 1991.

 향토문화개발협의회, 『광주첨단기지』, 1992.

 향토문화개발협의회, 『일곡동』, 1993.

 나경주, 「민간신앙」,『광주시사』 제2권, 광주직할시사편찬위원회, 1993.

 그런데 아직까지 당산제의 전국적인 분포상황이나 통계를 총괄적으로 낼 수 없음은 전국적으로 민속지의 작성이 이루어지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광주지역도 마찬가지이어서 위와같은 조사활동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시점에서 이 지역의 당산제는 몇 개가 어떻게 전승되고 있는가 하는 문화인류학적인 조사는 시도되지 못하였다. 1987년 이후 매년 당산제를 조사하여 왔던 우리박물관은 이 같은 마을제사의 실태를 현지조사하여 이 지역의 마을제사를 총체적으로 살펴보고자 조사를 실시하게 되었다.

 조사지역은 광주직할시 전역을 대상으로 했다. 인구의 이동이 많고 자연지리적인 변화가 심하여 민속문화의 기반이 완전히 무너져 버린 도심권도 최대한 흔적이라도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기초자료의 부족과 제보자의 미확보로 충분한 조사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자연히 조사는 시외곽 지역과 광산구 지역에 집중되었으며 시간도 많이 할애되었다.

 조사방법은 문헌조사, 설문지조사, 현지면담조사, 현지참여조사 등의 방법으로 하였다. 우선 마을제사에 대한 문헌을 살피고 그 동안의 조사지역을 파악한 뒤 이 지역 500여개의 자연부락에 설문지를 배부하여 기초저사를 하였다. 이를 통하여 조사대상 마을의 목록을 작성하고  현지면담 조사지역과 현지참여 조사지역을 구분하였다. 현지면담조사는 1/50,000지도에 마을의 위치를 표시하고 사진촬영을 하였으며, 면담시 간과될 수 있는 사항을 고려하여 미리 작성한 조사항목과 질문요지를 가지고 마을 촌로들을 찾아 문답식 조사를 하였으며 제보자의 동의를 얻어 녹음을 하였다. 그런데 당산제가 사라진지가 40~50여년이 지난 곳은 촌로들의 기억이 희미한 곳이 많아 조사에 어려움을 느끼기도 하였다. 현지참여조사는 현재 시행되고 있는 날짜에 맞추어 마을을 찾아 당산제의 진행 전과정을 함께 하면서 조사하였다. 참여조사를 한 곳은 1993년 정월 보름에 3개 마을, 2월 1일에 1개마을 등 모두 4개 마을을 조사하였으며 과거에 참여조사된 4개 마을을 합하여 8개 마을이다. 이 숫자는 광주지역에서 시행되고 있는 21개의 당산제 중 40%이며 나머지 13개는 참여조사를 하지 못하고 면담조사를 하였음을 밝혀둔다.

 이 보고서는 구성의 편의상 동구, 서구, 북구, 광산구 등 행정구역별로 나누어 서술하였다. 당산제의 전승정도에 따라 현재 시행중인 마을은 제일 앞쪽에 위치토록 하였으며 소목차를 두어 상세히 기록하려고 노력하였다. 사라진 곳중에서도 기록이 남아있거나 제보자의 기억이 뚜렷한 마을은 앞쪽에 두었고 그렇지 못한 마을을 뒤쪽에 넣었는데 기억이 아주 희미한 경우라도 포함시키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기술의 순서는 자연지리적인 환경, 성촌시기, 당산제의 준비과정, 제의 진행, 제 후의 과정, 사라지게된 이유 등으로 하였다.

 보고서의 작성과정에서 기억이 희미하거나 의심나는 부분은 녹음과 전화 또는 제출장하여 보완하였으며, 현재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는 곳일지라도 전거가 확실한 문헌이나 제보자가 확실한 경우는 수록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민속문화는 민족의 근간을 이루어온 다수의 민중에 의하여 집단적으로 일반화되어온 문화이기 때문에 독자성과 주체성을 가지고 외래문화에 쉽게 동화 내지 굴절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기초 일제에 의한 민족문화의 말살정책과 신문화의 수용으로 인한 사회구성원들의 인식의 변화, 새마을사업과 같은 정책에 의한 변화, 급속한 도시화 산업화로 인한 농촌사회의 해체 등 제반 여건으로 인해 그 뿌리가 흔들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민족의 정신문화가 혼란을 초래하게 되었고 성장기의 청소년들은 가치관 정립에 혼선을 빚고 있다. 우수한 민족문화를 계승발전시키려는 노력이 절실히 요구되는 때라 할 것이다.

 당산제의 조사작업과 보고서의 작성과정은 다음과 같다.


1. 조사기간

 현지조사 : 1993. 2. 3 ~ 7. 30

 추가조사 : 1993. 8. 1 ~ 8. 31

 원고작성 : 1993. 9. 1 ~ 12. 30

 보고서 발간 : 1994. 1. 31


2. 현지조사 및 원고집필


 본 조사보고서는 박인봉, 윤성실(동구, 서구), 최강열, 이순영(북구), 서영미, 정기진(광산구)이 분담하여 현지조사 및 본문원고를 집필하였으며, 조사개요, 종합고찰, 맺음말은 정기진이 초고를 쓰고 주인택(학예연구실장)이 수정 보완하였으며 주인택, 정기진이 편집하였다.


3. 조사방법


 ◦ 문헌조사       ◦ 설문조사       ◦ 현지면담조사       ◦ 현지참여조사


4. 조사결과


 금번 조사결과 광주지역에서 총 79개 마을에서 당산제가 조사되었는데 현재 시행하고 있는 곳이 21개 마을이고 사라진 곳이 58개 마을이었다. 마을의 안녕을 빌고 주민 서로간의 단결을 꽤했던 마을제사를 수록한 이 보고서가 지역문화의 뿌리와 특성을 밝히고 전통문화를 올바르게 인식시키는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민속문화 연구자들에게는 연구의 기초자료로 활용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Ⅱ. 당산제의 실제


 가. 동구


1. 용산동 용산 당산제


                                                   조사일시 : 1993. 9. 22

                                                   조 사 자 : 정 기 진

                                                   조사방법 : 현지면담조사 (현재시행)

                                                   제 보 자 : 임난식 (81) : 화주경험

                                                              김광옥 (69) : 화주경험


 1. 마을 개관


 용산마을은 지원동의 관할로서 광주천변의 평지에 위치하고 한추재의 남쪽 기슭에 위치한다. 마을주변 평지에 새로운 아파트가 건설되어 생활환경의 많은 변천이 있다. 광주~화순간 도로변에 있어 교통은 매우 편리하며 마을앞에는 제2순환도로의 건설이 한창이고 서구 진월동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마을앞을 지나고 있다.


 2. 당산제의 현황과 신체


 1) 당산제의 현황

 용산의 당산제는 정월 14일 밤에 모시는데 마을의 안녕과 동민의 건강을 기원한다. 용산마을은 100여호가 넘는데 실제 당산제에 참여하는 호수는 30~40호에 불과한다. 마을에는 위친계, 노인회가 조직되어 있는데 노인회에서 당산제를 주관한다.

 2) 당산과 신체

 용산의 당산은 2곳으로 하나는 할아버지당산으로 관념되는 천룡당산과 또 하나는 할머니당산으로 관념되고 있다. 할아버지당산은 민가에서 50m위의 마을 뒷산에 있는데 큰 소나무로 껍질이 다 벗겨진 고목이다. 할머니당산은 마을앞에 2그루의 귀목나무 중에서 1그루이다. 이 나무는 광주시 지정 보호수이며 나무나이 450여년, 나무높이 12m로 주변에는 자연석을 동그랗게 놓아 보호석 역할을 하고 있다. 당산의 서쪽에 60㎝×80㎝의 상석이 있으며 바로 그 위에 헌식터가 있다.


 3. 제의 준비


 1) 제관의 선정

 제관은 화주 1명, 축관 1명, 초헌관 1명, 아헌관 1명, 종헌관 1명, 정자 1명 등 모두 6명을 선정한다. 이들의 선정은 설을 지내고 정월 초순에 마을회의를 열어 깨끗하고 생기복덕이 맞는 사람으로 한다. 당산제는 마을의 큰 제사이므로 화주가 정결하면서도 성심 성의껏 모셨으나 요즈음은 화주를 서로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 화주에 선정되면 가릴 것이 많고 번거롭기 때문이라 한다. 특히 1993년은 화주 선정을 못하여 노인회에서 주관했다. 노인회가 화주가 되는 경우이다. 축관 채희장(67세), 상쇠 최병한(74세)씨가 맡았다. 정자는 화주의 보조자로 제물의 준비 및 금줄ㆍ금토 등을 하는데 화주를 도운다.

 2) 치 제

 화주는 선정된 날부터 매일 목욕을 하고 제물은 구입한 후로는 대변을 보면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 입었으며 소변 후에는 손을 깨끗이 씻는 등 청결유지에 정성을 다했다. 마을앞에 당샘이 있었는데 당산제 모시기 전에 마을의 청년들이 샘을 깨끗이 품어 청소를 한 후 샘물을 떠다가 화주가 목욕을 하고 제물의 준비도 했으나 지금은 매몰되고 없다. 샘주변에 금줄을 쳐서 제가 끝날 때까지는 화주외에 아무도 물을 길러 가지 못했다.

 3) 제 비

 제비는 참여자들이 얼마씩 자진해서 내는 것을 바탕으로 하고, 가끔은 희사금과 마을자본에서 충당한다. 화주는 돼지머리 1개만 구입하고 그밖에 제물은 마을에서 나는 것을 쓴다.

 4) 제물의 장만

 제물의 장만은 화주집에서 하는데 비린 것은 절대 안하고 청결을 유지하기 위하여 마스크를 쓰며 말도 안한다. 시식을 해서도 안된다. 나물에는 간을 소금으로만 한다. 제주는 동네 중앙의 당샘의 물로 담갔으며 화주가 그 술을 품고 잠을 잔다.

 5) 금줄ㆍ금토

 금줄과 금토는 정월 10일께 화주와 정자가 하는데 당산주위와 화주집 앞에만 한다. 과거에는 당샘에 금줄을 쳐 부정의 출입을 막았으나 지금은 샘이 폐쇄되었다. 마을입구 등에 생대나무를 세워 금줄을 하였으나 근래에는 외지인들이 많이 들어와 살기 때문에 골목에는 금줄을 생략하고 있다.


4. 제의 진행


 용산의 당산제는 저녁 9시에 시작하여 저녁 11시에 끝난다. 굿꾼들은 초저녁에 마을회관 앞에 모여 굿을 치고 놀다 시간이 되면 화주집으로 가서 제물의 뒤를 따른다. 제물은 제관들이 들고 가는데 천룡당산에 오르는 길이 가파르기 때문에 들 것을 만들어 네사람이 들고 간다. 제물앞에는 횃불을 들고 갔으나 지금은 후레쉬를 쓴다.

 천룡당산에서의 제는 제관과 굿꾼들만 참여를 하는데 제관들의 복장은 깨끗한 한복을 입는다. 천룡당산에 도착한 후 나발을 불어 제의 시작을 알리고, 끝난 후에 나발을 불면 비로소 각 가정에서 메를 올린다. 이때부터 비린내 나는 생선의 준비도 가능하다.

 천룡당산에서의 진설은 시루, 명태, 문어, 나물 등만 하다. 제가 끝나면 소지, 음복을 간단히 하고 헌식을 하는데 헌식은 제물울 조금씩 덜어 백지에 싸서 당산옆에 묻는다.

 마을앞에 는 할머니당산에서의 제는 제관이나 제차는 천룡당산에서와 같지만 제물, 참여범위 등이 상이하다. 할머니당산에서는 비린 것과 돼지머리를 쓰며 남녀노소 누구든지 굿꾼들과 어울린다. 소지나 음복도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가능하다. 헌식하고 남는 모든 제물은 그곳에서 모두 먹는다.

 헌식은 진설했던 것을 조금씩 백지에 싸서 당산옆의 헌식터에 묻고 돌로 덮는다. 이는 개나 그밖의 짐승들이 파헤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당산제가 끝나면 걸궁을 하는데. 예전에는 정월 그믐날까지 하고 정월 그믐날 마을회의를 하여 당산제 결산과 아울러 마을의 대소사를 논의하고 품삯 등을 결정한다. 그러나 요즈음은 걸궁을 며칠만 간단히 한다. 그 이유는 굿을 할 사람이 없고 노인들만이 하기 때문이라 한다. 용산마을의 당산제의 참여는 토착민들만 참여를 하고 아파트 주민이나 기독교인은 참여하지 않는다.



2. 내남동 내지 당산제


                                                  조사일시 : 1993. 8. 30

                                                  조 사 자 : 정 기 진

                                                  조사방법 : 현지면담조사 (현재시행)

                                                  제 보 자 : 김영조 (70) : 당산제 주도

                                                             김임술 (75)

                                                             김영규 (59)


 1. 마을 개관


 동구 내남동 내지마을 입구에서 서쪽으로 2㎞를 가면 마을이 위치한다. 이 마을은 육판마을 이라고도 하며, 광주시에 편입되기 전에는 광주군 효지면 내남리에 속했고 분적산의 남동쪽 골짜기에 85호 400여명이 거주하는데 논농사를 주업으로 한다. 이천서씨가 개촌했다고 전해지며 후에 평산신씨가 팔향하였고 그 후에 광산김씨, 백씨, 정씨, 박씨 등이 거주하였으며, 지금은 광산김씨들이 대부분이다. 1983년도에 새마을지도자인 김영조씨의 노력으로 도로를 내어 1984년 7월 시내버스가 들어와 주민들의 큰 불편을 해소하게 되었다. 이러한 공적으로 마을민들은 1986년 마을입구에 김영조씨 공적비를 세웠다.


 2. 당산제의 현황과 신체


 1) 당산제의 현황

 내지마을의 당산제는 정월 15일 오후 3시부터 모시는데 마을의 안녕과 동민의 건강을 기원한다.

 2) 당산과 신체

 내지마을의 당산은 할아버지당산과 할머니당산 두 곳이 있었는데, 할아버지당산은 소나무로 마을입구의 우측 산위에 있었으나 지금은 흔적이 없다. 이는 성황신으로 관념되었다.

 또 하나의 당산은 마을입구의 귀목나무를 당산할머니로 관념하고 있다. 옆의 도로 보다는 1m이상 높은 곳에 위치하며 나무주변에 가로 5m, 높이 20㎝의 시멘트로 보호시설이 되어 있다. 지금은 이곳에만 제를 올린다.


3. 제의 준비


 1) 제관의 선정

 내지마을에서는 특별히 제관을 뽑고 날을 결정하는 등의 절차가 없다. 내지마을의 새마을지고자인 김영조씨가 주도하여 30여년을 모셔오고 있으며 화주, 헌관 등을 겸하고 있다. 축관은 깨끗한 사람으로 정하는데 매번 해본 사람이 하게 된다.

 그밖에 심부름 하는 사람은 깨끗한 사람이면 누구나 김영조씨가 결정한다. 당산할머니가 순하므로 깨끗한 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다.

 2) 치 제

 제일에는 마을사람들이 비린 것을 먹지 않으며 부정한 곳에 다녀왔거나 산고든 집에서는 가족들이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이와같은 것은 스스로 본다고 믿기 때문에 강요해서가 아니라 주민이 알아서 가린다. 당산제에 참여할 사람들은 당일에 모두 목욕재계하며 집안과 마을 청소를 한다. 공동샘은 품어 청소하고 제가 끝날 때까지 사용을 금한다. 화주인 김영조씨는 본인이 당산제를 30여년 동안 주관하여 모셔왔기 때문에 제일 아침에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 입는 등 본인이 알아서 한다.

 3) 제 비

 제비는 걸궁을 해서 만든 마을자본으로 충당했으나 요즈음은 마을사람들이 성의껏 내는데 비용은 충분하다. 제기는 과거에는 매년 새로 구입하였으나 지금은 당산그릇이 있어 보관하였다가 다시 사용하며 제물은 돼지머리, 삼실과, 삼채 등을 구입하고 시루떡, 생쌀을 준비한다. 1993년에는 30만원 정도의 비용이 들었다.

 4) 제물의 장만

 제물의 장만은 제일 오전에 화주인 김영조씨 집에서 준비하는데, 이웃 사람들이 도와준다. 제물의 구입 및 장만도 김영조씨가 직접하며 여자들은 안한다. 생쌀은 그릇에 담아 뚜껑을 덮어 진설하며 탕과 국은 안한다.

 5) 금줄ㆍ금토

 금줄과 금토는 화주가 마을사람을 데리고 제일의 3일전에 제관집 앞과 당산나무 주변에 해서 부정의 출입을 막는다.


4. 제의 진행


 내지마을의 당산제는 정월 15일 오후 3시 30분에 시작하여 오후 5시쯤에 모두 끝난다. 제관들은 백색 한복을 입으며 여자들은 먼데서 구경만 할 뿐 전혀 함께 하지 못한다. 점심을 먹고 굿꾼들이 마을앞에 모여 굿을 치면서 제를 알린다. 마을을 한바퀴 돌고 당산으로 가서 당산주변을 돌면서 굿을 친다. 굿꾼들은 시간이 되면 화주집으로 가서 제물의 뒤를 따르며 굿을 친다. 당산에 도착하여 진설이 끝나면 간단히 제를 모시는데 김영조씨만 재배한다. 헌식은 제물을 각각 백지에 싸서 당산나무 옆 헌식터에 묻고 미리 준비해 둔 황토로 덮고 납작한 돌로 그 위를 눌러 놓아 개나 그밖의 짐승들이 파헤치는 것을 막는다. 헌식이 끝나면 당산주위를 돌면서 굿을 한판 하는데 제를 다 올렸다고 당산에 고하는 거이라 한다.

 굿은 당산과 마을 사이에 있는 다리에서 한판 치고 큰 샘, 작은 샘 등에서 친다. 마당밟이를 이곳에서는「당산걸궁」한다고 하며 마을의 진입로를 확장하고 포장하기 전에는 그 비용을 마련하기 위하여 했으나 지금은 마을자본이 어느정도 마련되어 있어서 결궁을 안한다.

 내지마을에는 정월 하순께 당산제의 결산을 하는데 돈이 남으면 마을자본으로 하고 부족하면 마을자본에서 보충한다. 아울러 마을의 일반적인 사항도 논의한다.


 5. 영 험


 ◦ 당산나무 잎이 돋는 모습으로 풍흉을 점치는데 한꺼번에 피면 물이 좋아 모내기가 쉽고 풍년이 들며 잎이 여러번 나누어 피면 물이 모자라 모내기가 어려워 흉년이 든다고 믿고 있다.

 ◦ 마을사람이 당산나무 가지를 주워다 사랑방에 불을 지폈는데 그 뒤 며칠만에 화재가 발생했다.

 ◦ 마을에 소도둑이 들어 소를 끌고 당산나무 앞을 지나 가는데 밤새 당산나무 주위만 빙빙 돌다가 날이 밝아 그 도둑이 도망쳤다.

 ◦ 다리굿을 할 때는 다리가 아픈 환자들은 나와서 자신의 다리를 났게 해달라고 빌었으며 샘굿을 치고난 뒤 곧바로 샘물을 떠 마시면 잉태를 한다고 믿고 있으며 실제 효험을 보았다고 한다.



3. 용연동 용연 당산제


                                                   조사일시 : 1993. 10. 8

                                                   조 사 자 : 정 기 진 

                                                   조사방법 : 현지면담조사 (과거시행)

                                                   제 보 자 : 김옥렬 (77)


 용연마을은 무등산의 남서쪽 계곡의 깊은 곳에 위치하며 광주시의 제이수원지 아랫마을로 마을의 남서쪽 계곡만 트여 있고 나머지는 산으로 싸여 있다.

 이 마을은 1970년대에는 105호에 이르렀으나 그 후 점차 줄어 지금은 75호이며 김해김씨와  밀양박씨 양 성씨들이 비슷하게 거주하고 있다. 마을사람들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나 전답이 없는 사람은 시내로 일을 다닌다.

 이 마을의 당산은 모두 3곳으로 마을뒷산 중턱의 별신제 터와 마을입구의 윗당산, 그리고 아랫당산이 있다. 별신제의 터에는 약간의 평지가 있는데 그곳에 묘처럼 흙무덤을 만들어 그 밑에 진설을하고 그 꼭대기에 헌식을 한다. 윗당산은 마을입구 들에 있으며 귀목나무이다. 아랫당산은 윗당산에서 50m쯤 떨어진 곳인데, 당산나무는 일제말기에 일본인들이 베어서 가져가고, 후에 은행나무를 심어 현재는 그 곳에 은행나무 1그루가 있다. 윗당산나무는 마을사람들이 일본인들과 섭외를 하여 보존케 되었으며 신목이 없어진 아랫당산에는 그 이후로 제를 모시지 않았다.

 용연의 당산제는 정월 14일 밤 11시부터 모시는데, 일주일전에 화주 2명(화주1, 거화주1)과 축관 1명, 헌관 1명, 아헌 1명, 종헌 1명 등 모두 6명을 뽑는다.

 화주 2명중 1명은 별신제와 윗당산의 제물을 준비하고 다른 1명은 아랫당산의 제물을 준비한다. 화주의 선정은 깨끗한 사람으로 하되 나이가 많은 노부부 또는 젊은 사람들중 아이가 없는 사람중에서 본인이 희망하면 생기복덕을 맞추어 이에 적합한 사람을 화주로 선정한다. 화주로 선정되면 소변은 보면 찬물로 손을 깨끗이 씻어야 하고 대변을 보면 찬물로 목욕을 해야하는 등 어려움이 많았다.

 제의 음식을 준비하기 위하여 깨끗한 냇가에 막을 지어 화주는 그곳에서 생활하며 제수를 준비한다.

 금줄과 금토는 제일의 3~4일전에 하는데 당산주변과 막앞 등에 생죽을 꽂아 금줄을 치며 이 곳은 화주외에 다른 사람의 출입을 금했다.

 이 마을의 제비는 명자전, 지붕머리돈, 마을답의 세로 충당했다. 명자전은 마을자본을 마련하기 위하여 1인당 1전씩 거두는 것이며, 지붕머리돈은 이 마을에서는 「지붕몰랭이 깔린돈」이라 하는데 마을에서 집을 지니고 사는 사람은 누구나 명자전을 써야 했으며 그에 따르는 일정한 이자를 냈다.

 제물의 구입은 화주와 제관이 함께 하는데 제물 구입시 미리 당산용임을 밝힌 후에 값을 깍지 않을테니 받을 값만 부르고 또 깨끗하고 예쁜 것으로 달라고 이른다. 제기는 매년 새것으로 구입하며 사용 후에는 화주가 가져간다.

 제물의 장만은 화주가 하는데 비린 것은 안하고, 고춧가루, 마늘 등은 넣지 않는다.

『동계목청전합부』라는 책에 지붕머리돈에 대한 것이 있다. 「당산물종기」에는 황수 1, 백목삼척, 석작 1, 배석 1, 찹쌀 7되, 도기 2, 접시 3, 옴박지 3개, 말악기 2, 제병 1, 건어 1, 건시 1, 고사리나물약간, 뜸부기약간, 청채, 백지 3(60장), 조리, 주걱, 해우(김), 목맥, 오곡 등등 30여종이나 되었다.

 제일 초저녁에는 각 가정의 세대주는 모두 찬물로 목욕을 한다. 굿꾼들은 저녁이 되면 동청앞에서 굿을 치고 있다가 밤 11시가 되면 그들중 일부는 제관들과 함께 별신제단으로 오르는데 앞에는 횃불, 그 뒤에는 화주가 석작에 넣은 제물을 들고 따르며, 그밖의 제관, 굿꾼의 순이다. 제관들은 도복을 입고 유건을 쓴다.

별신제의 음식은 소머리에서 일부를 떼어낸 것과, 나물 등으로 간단히 준비한다. 당산에 올라 진설을 마치고 헌작을 한 후 위에서 나발을 불면 아래의 동청앞에 있는 굿꾼들이 나발을 맞추어 3번을 불면 굿을 그친다. 축을 끝내고 나발을 불면 굿을 다시 시작한다. 소지를 한 후 헌식을 하는데 헌식은 흙무덤의 꼭대기를 파 제물을 백지에 싸서 그 곳에 묻는다. 음복은 제관들만 간단히 한다. 소지하면서 마을의 안녕과 부귀영화를 별신님께 축원한다.

 하산해서 화주는 막으로 가고 제관들은 당산으로 가는데 굿꾼들은 당산 가까이 와서 굿을 치다가 진설이 끝나면 굿을 멈춘다. 윗당산, 아랫당산 등의 제차는 모두 같고 윗당산은 소머리의 윗턱을 아랫당산은 아래턱을 쓴다. 여기까지의 제가 끝나면 새벽 2시가 된다.

 아랫당산까지 제를 모신 후에는 액을 쫓는데, 깃대에 말목을 달아 들게 하고 꼭지달린 옹기동이에 물을 반쯤 부어 그 안에는 미역을 넣어 머리에 이게 하여 이들을 앞에 세우고 뒤에서 굿꾼들이 굿을 치면서 마을 아래쪽으로 쫓는다.

 삼우날 오후에 굿꾼들이 당산에 나와 굿을 치면서 위, 아랫당산을 3번씩 돌고 둥그렇게 서서 2번 절을 하고 제를 모두 끝낸다. 17일부터는 마당밟이를 하는데 보통 5일정도 했다. 이때는 각 가정에서 돈이나, 곡식 등을 내놓는데 이것을 걷어서 마을자본으로 하고 음식과 술은 대접 받는다.

 마당밟이가 끝나면 결산을 보는데 날짜는 정해져 있지 않다. 다른 마을에 비하여 마당밟이 기간이 짧은 것은 마을이 부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마을의 굿이 세기 때문에 다른 마을에서 초대받아 나가기도 했다. 「임진년」에는 걸궁나가서 봄에 돌아와 그 해는 파농을 했을 정도이다.

 일제말기부터는 경제사정이 어려워 돼지머리를 썼으며, 1986년까지 모시다가 상쇠 박현채씨가 작고하신 뒤로 굿치는 분이 없고 이농현상으로 당산제는 사라졌다.

 이 마을의 영험은 다음과 같다.

 ◦ 용연의 당산은 세기 때문에 당제를 잘 못모셔 동네에 불이나 다시 모셨던 경험이 있다.

 ◦ 화주를 한 후에 아들을 얻어 그 아들의 이름을 화주라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

 ◦ 소도둑이 들었으나 밤새 당산주위만 돌다가 날이 밝아 그냥 도망갔다.



4. 월남동 록동 당산제


                                                   조사일시 : 1993. 9. 2

                                                   조 사 자 : 정 기 진

                                                   조사방법 : 현지면담조사 (과거시행)

                                                   제 보 자 : 허남곤 (67)


 록동마을은 광주에서 화순으로 가는 도로 우측에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으며 분적산의 동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김해김씨, 나주임씨 등 70여호가 살며 요즈음은 대파 농사로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

 당산은 천룡당산과 할머니당산 두 곳이다. 천룡당산은 마을의 뒷산 8부쯤인데, 그 곳은 소나무가 우거져 있고 큰 바위아래에 제를 모셨다. 조사당시에는 사람이 갈 수 없어서 현지 확인은 못했다. 할머니당산은 마을입구의 은행나무이다. 원래는 그 자리에 큰 귀목나무가 있었는데 47년전에 죽자 그 곳에 이 은행나무를 심어서 지금에 이른다. 이 곳은 60㎝ 높이의 단을 쌓아 은행나무를 보호하고 있다. 이 은행나무에서 1.5m 떨어진 곳에 높이 70㎝의 입석이 하나 있는데 이 입석은 길옆에 있던 것을 옮겨 놓았다 한다.

 이 마을의 당산제는 마을의 안녕, 동민의 건강을 빌며 모셔지는데, 마을민들은 한 해도 거른지 않고 정성껏 모신 덕으로 6.25때나 그 후 마을민들이 군대에 가서도 인명의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제일은 음력 1월 6~9일경에 손이 없는 날을 택하여 저녁 10시부터 모신다.

 제의 준비는 정월 초사흘에 화주 1명을 비롯하여 축관 1명, 집사 1명을 선정하는데 특히 화주를 뽑는데 신경을 많이 쓴다. 화주는 마을회의에서 생기복덕이 맞고, 유고가 없고, 신수가 좋고, 가정이 깨끗하며, 어린이가 없는 사람을 선정한다.

 제비는 인구별로 거출하는 소위 인구전이다.

 제기는 준비되어 있는 것을 마을회관에 보관하였다가 매년 사용하며, 제물은 돼지머리, 건어물, 과실만 준비한다. 특히 나물은 하지 않는다. 제물의 장만은 화주집에서 하는데 화주 부인을 이웃집으로 보내고 남자들만이 준비를 하는데 물은 천룡당산 밑에 있는 샘에서 길러 온다.

 금줄은 제일 2~3일전에 마을입구, 당산주위, 화주집 등에 쳐서 부정의 출입을 막았고, 금토는 제일 아침 일찍 골목과 당산주위, 화주집 앞 등에 뿌린다.

 제일 아침에는 마을주민 모두 목욕을 하고 가정과 골목 등을 깨끗이 청소를 한다.

 굿꾼들은 저녁 9시부터 마을을 돌면서 굿을 치다가 10시쯤에 제관들과 함께 천룡당산으로 가서 제를 올리는데 여기에서는 음복이나 헌식을 안한다. 제를 올릴 때 나발을 불면 마을사람들은 천룡당산쪽을 향하여 절을 한다. 가정에서는 주부들이 떡시루에 참기름으로 불을 켜 놓고 때를 맞추어 절을 올리며 금년 일년 동안 무사를 빈다. 할머니당산에서는 돼지머리 등을 쓰며 소지와 음복을 한 후 제물을 약간씩 떼어 백지에 싸서 나무옆에 묻어 헌식한다.

 제가 끝나면 화주집에서 굿을 치면서 날이 밝을 때까지 논다.

 록동마을의 당산제는 20여년전 새마을사업이 한창이던 시기에 사라졌다.



5. 운림동 성촌 당산제


                                                   조사일시 : 1993. 9. 2

                                                   조 사 자 : 정 기 진

                                                   조사방법 : 현지면담조사 (과거시행)

                                                   제 보 자 : 백학봉 (75)

                                                             이종규 (70)


 성촌마을은 무등산 서쪽의 계곡으로 향로봉의 남쪽 기슭에 위치하며, 증심사 지구의 아랫마을로 이 마을 주변에는 작은 암자들이 다수 잇다. 80여호에 350여명의 주민이 거주하는데 나주나씨와 수원서씨 등이 혼성촌을 이루며 과거에는 대부분 농업에 종사했으나 지금은 시내에 일자리가 많다.

 이 마을의 당산은 모두 일곱 곳이다.

 제 1당산은 할머니당산으로 마을안에 있는 귀목나무로 주변에 가로 3m, 세로 3m, 높이 0.7m의 자연석으로 쌓은 제단이 있다. 제 2당산은 증심사로 가는 도로 중앙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제 3당산은 앞산에 있는 은행나무로 칠성당이라 불렀는데 지금은 없다. 제 4당산은 석장승 1쌍인데 마을앞에 있었으나 지금은 이동되어 학운국교에 있다. 제 5, 6, 7당산은 마을앞에 있었다하나 그 형체와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제일과 제관은 정월초에 마을회의에서 결정하는데, 당산제는 대체로 6~7일경에 모시며 제관은 화주 1명, 축관 1명, 헌관 1명, 집사 1명 등 4명을 선정하다. 화주는 한 가정을 선정하는데 어린 아이나 임산부가 없고 아픈 사람이 없는 다복하고 깨끗한 가정을 선정한다. 축관, 헌관 등은 연로한 분 중에서 선정하는데 부정이 없어야 하고 그 날의 생기복덕을 맞춰 뽑는다.

 제비는 인구전으로 거두는데 임산부는 두 사람 몫을 내며 모두 공을 드리는 일로 여기며 스스로 내기 때문에 어려움 없이 비용을 충당할 수 있다. 제기는 매년 새것으로 구입하고 제물은 남의 것을 사용하지 않는다 하여 마을의 것으로 준비하는데 돼지, 나물, 과일 등이다. 돼지는 머리만 제에 진설하고 나머지는 걸궁할 때 사용한다.

 제일이 결정되면 마을입구와 상을 당하여 3년이 되지 않는 집이나 산고가 든 가정 등 부정이 있는 가정은 그 집 둘레에 소나무를 세워 금줄을 치고 금토를 뿌려 출입을 막았다. 당산에는 불을 밝히고 당산주위에 솔가지로 울타리를 만들어 부정의 출입을 막았다.

 제물의 준비는 화주가 하는데, 정결을 유지하기 위하여 수건으로 입을 가렸으며 또한 말, 시식, 간, 양념 등을 안한다. 돼지머리는 생것을 그대로 진설한다. 제의 진설은 할머니당산에서만 하고 그밖의 당산에서는 진설을 안하고 굿만 쳤다.

 할머니당산에서의 재차는 진설-강신-재배- 헌작-재배-독축-농악과 함께 재배-소지-헌식의 순이다.

 농악은 8시쯤 마을앞 공터에서 시작하고 9시가 되면 화주집으로 가서 제물을 제관들과 함께 당산으로 운반한다. 제가 시작되기 전에 나발을 불어 시작을 알리고, 제가 모두 끝나면 나발을 불어 끝을 알리는데 이때는 자정을 넘는다.

 마당밟이는 보름부터 시작하며 그믐이면 끝내고 마을회의를 열어 동네의 일반사항을 의논한다. 이때 이장선출, 인부임 등을 결정한다.

 이 마을의 당산제는 해방직후 사라졌는데 당산제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함께 화주를 마을민들이 서로 기피하기 때문이라 한다,



6. 소태동 소태 당산제


                                                   조사일시 : 1993. 9. 2

                                                   조 사 자 : 정 기 진

                                                   조사방법 : 현지면담조사 (과거시행)

                                                   제 보 자 : 한순주 (75)

                                                              배정태 (57)


 소태마을은 무등산의 서쪽 봉우리인 마집봉(해발 480m)자락 끝에 위치하며 광주~화순간 국도변이다. 현재 지원동 12, 13통으로 소태골, 소태라고 하며 완전한 도시가 되었으나 아직 45호는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당산은 두 곳으로 마을 뒷산 중턱의 할아버지당산은 귀목나무로 고사되어 지금은 없고, 개울건너 앞산 기슭에 소나무를 할머니당산이라 관념했다.

 당산제는 마을의 안녕과 도둑방지, 질병방지, 득남을 기원하며 행해졌던 것으로 이는 새마을운동이 전개될 무렵에 계속 이어지지 못하고 사라지게 되었다.

 제관은 정월초 마을회의에서 축관 1명, 제관 1명, 유사 1명, 집사 1명 등 4명을 선출한다. 제일은 정월 14일 모시는 것으로 되어 있으므로 그 날짜의 일진과 유사의 생기복덕을 맞추어 맞는 사람을 선정하는데, 특히 유사는 가정에 어린이가 없고, 임산부가 없어야 한다. 유사에 선출된 날부터는 궃은 음식, 부정한 곳은 가지 않으며 보지도 않는다.

 제비는 인구전인데 태아까지도 자진해서 내므로 비용의 어려움은 없다. 베기는 매년 새로 구입하고 제 후에는 유사가 사용한다. 제물의 장만은 유사가 제일 아침에 준비하는데 그 종류는 떡, 술, 삼실과, 마른명태, 나물 등이다. 고춧가루, 마늘 등의 양념을 안하며 맛을 보면 벌을 받는다고 믿기 때문에 맛보지 않는다.

 제일 아침에 당산주변과 골목을 깨끗이 청소하고, 농악대는 저녁 6시쯤부터 당산과 마을을 오르내리며 굿을 치다가 저녁 10시에 유사댁으로 가서 유사와 함께 제물을 들고 할아버지당산으로 오른다.

 제는 진설-강신-재배-독축-소지-헌식 순이며, 끝을 알리는 나발을 분다. 할아버지당산에서의 제가 끝나면 다시 유사집으로 가서 할머니당산께 드릴 제물을 가질고 당산에 오른다. 제차는 할아버지당산과 동일하며 끝난 후 나발을 불어 제의 끝을 알린다. 비로소 각 가정에서도 가정의 선영에 제를 지낸다.

 제가 모두 끝나면 회관앞으로 나와 농악을 하며 나눠 먹고 밤새 논다.

 마당밟이는 정월 15일부터 각 가정을 돌며 하는데 이때 음식과 돈ㆍ곡식 등을 내놓는다. 돈과 곡식은 마을자본이 된다.

 2월 초하루에 마을회의를 하여 지난해를 결산하고 임금결정, 이장선출 등 마을의 대소사를 토의한다.

 소태마을의 당산제는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1970년대에 사라지게 되었는데, 표면상의 이유는 할아버지당산이 죽었기 때문이라고 제보자는 말씀하시지만 새마을운동 기간에 미신타파, 농한기추방 등등의 구호가 클 무렵이었으므로 전반적인 정서변화에 더 큰 원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7. 운림동 신림 당산제


 증심사를 지나 중봉으로 가는 길목에 당산나무가 있는데 매년 당산제를 모셨으나 해방직후 사라졌다.

 10년전부터 정월 보름 낮에 박형민씨가 개인적으로 당산제를 모시고 있다.


8. 서석동 당산제


 서석동 통시암 거리에는 주위 다섯자, 높이 아홉칸, 나무나이 삼백년이 넘은 신목이라 불리우는 느티나무가 있었다.

 이 고목에 음식을 차려놓고 빌면 무슨 병이라도 낫는다고 믿어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고 있다.

 만석이라는 총각이 가난했으나 노모를 모시고 부지런히 일을 하여 효자로서 고을에서 칭찬이 자자했다.

 어느날 만석의 어머니가 병을 얻어 눕게 되어 산삼을 구하러 무등산을 헤매다 이 서석동 느티나무밑을 지나게 되었는데, 느티나무가 하는 말이 너의 두눈을 빼어 나에게 바치면 어머니 병을 고쳐 주겠노라고 했다.

 마침내 만석이는 손으로 눈알을 뽑아 바치게 되니 효심에 감격한 느티나무가 잎을 주어 이 잎으로 통시암 물에 다려서 잡수시게 한 후 어머니 병환을 고치게 되었다.

 그 후로 고을사람들이 병이 나면 이곳 신목 느티나무에서 소원을 빌어 효험을 보았다고 한다.

 1970년대 도로를 확장하면서 불도저로 당산목을 베고 넘어뜨리다가 한 사람은 현장에서 즉사하고 한 사람은 발병하여 죽었다 한다.

 제보자 : 박선홍(광주민학회장)

 위  치 : 서석동과 남동의 경계(서남마을)



9. 불노동 당산제


 불노동 당산제는 수녕노인당(광주에서 처음 생긴 노인당으로 지금도 있다) 옆 당산나무에 제를 모셨다.

 현재는 노인당 건물만 있으며 당산의 흔적은 없다.

 제보자 : 박선홍(광주민학회장)

 위  치 : 불노동 11-2번지

나. 서 구

1. 유덕동 덕흥 당산제


                                                 조사일시 : 1987. 1. 12(음 1. 14)

                                                 조 사 자 : 주인택, 최강열

                                                 조사방법 : 현지참여조사 (현재시행)

                                                 제 보 자 : 문봉식 (54) : 농업

                                                            오승열 (64) : 마을의 어른

                                                            오일근 (79) : 노인회 회장

                                                            조연봉 (60) : 농업

                                                            김종선 (47) : 목청관리


 1. 마을 개관


 덕흥마을은 광주천과 극락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하며 강이 범람하여 만들어진 퇴적지형 위에 마을이 들어섰다. 야트막한 덕산뫼의 경사면에 반원형으로 길게 마을이 배치되었으며 마을의 동쪽을 동작이라 하고 서쪽을 서작이라 한다.

 원래의 명칭은 덕산이었는데 1914년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덕흥으로 바뀌었다. 조선후기에는 덕산면이 될만큼 큰 마을이었던 이 마을은 350호에 이르렀으나 지금은 240여호가 거주한다. 마을의 역사는 약 500년이 된다고 전해진다. 원래 한씨들이 성촌하였다고 전해지나 나주오씨(80여호)와 남평문씨(30여호)들이 많이 살고 있다. 1955년 광주시로 편입이 되었지만 아직도 농촌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미나리를 많이 재배하고 있다.


 2. 당산제의 현황과 신체


 1) 당산제의 현황

 덕흥마을에서 당산제를 시작한지는 240여년전이라고 하는데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덕흥마을은 도심에서 근거리에 있으면서도 지금까지 해를 거르지 않고 당산제를 시행하고 있다. 이 마을의 당산제는 하나의 자연부락을 동작과 서작으로 나누어 시행하고 있는데 서작보다 동작이 더 활성화되어 있다. 당산제가 쇠퇴하는 이유중의 하나가 농악기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이 부족하다는 점인데 동작은 젊은 정병길(36)씨가 상쇠를 맡고 있어 그런대로 운영되고 있으나 서작은 농악을 할 사람이 없어 당산제를 지내는데 애로가 있으며 4년전부터 거의 형식만 갖추고 있는 형편이다.

 당산제는 풍농, 마을의 제액, 마을민들의 건강을 위해 지내는데 당산제를 지내는 보름명절을 설보다도 더 크게 쇤다고 한다. 그러므로 주민들은 설에는 목욕을 하지 않아도 정월 대보름에는 필히 목욕을 한다고 한다. 이러한 풍습은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는데 정월 대보름에는 객지에 나가서 살고 있는 사람들도 모두 돌아와 제에 참여하고 농악대에 참여를 한다. 또 당산제에 쓰이는 물건이나 기금을 희사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당산제를 지내는 보름전야는 축제의 분위기로 들뜬다. 그러나 당산에 제를 지내는 의식은 매우 엄숙하며 주민들은 당산에 대한 경외심으로 가득차 있다.

 다른 마을과 마찬가지로 이 마을도 당산제가 사라질뻔 하였다. 약 20년전 당산제를 폐지하기로 하고 제를 지내지 않았는데 도둑이 들끓고 싸움이 잦아 젊은이들이 주장하여 다시 부활하게 되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당산제를 지낸 후 마을에 우환이 생기면 다시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고 한다.

 2) 당산과 신체

 덕흥마을의 당산은 원래 12당산이었다고 하나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동작의 상당ㆍ하당(2)ㆍ당샘, 서작의 상당ㆍ하당ㆍ자손당ㆍ당샘, 우마당, 짐대 등 10개뿐이다. 현재는 동작 서작을 합하여 6개의 당산을 모시고 있다. 즉 동작의 상당과 하당, 서작의 상하당과 자손당, 그리고 동작과 서작이 합제로 지내는 우마당이다.

 동서작의 상당은 부부관계를 이루고 있는데 동작이 할머니당산이고 서작이 할아버지당산이다. 각 당산의 신체와 신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명    칭

신     체

신   격

 

상당

하당

하당

  느티나무(240여년)

  팽나무(경지정리로 없어짐)

  삼나무(10여년)

  할머니

  자손

  삼신

 

상당

하당

하당

  팽나무(20년)

  느티나무(10년)

  팽나무(10년)

  할아버지

  작은할머니

  자손

공통

우마당

  팽나무(15년)

  마소

 서작 할아버지당산의 신체는 원래 매우 큰 팽나무이었으나 20여년전에 죽어버렸다. 그런데 당산나무 옆에는 큰 팽나무 2그루가 있지만 다시 작은 팽나무를 심어 당산으로 모셨다. 2월 초하룻날 나무를 심은 후 제물을 차려놓고 농악을 치면서 깨끗한 사람이 잔을 올려 신격을 부여하였다. 동작의 할머니당산을 제외하고는 다른 당산나무도 모두 고사하여 다시 심었는데 동작의 삼신당에 삼나무를 심은 것이 이채롭다.

 우당산이라고도 하는 우마당은 농경 노동력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소신에 대하여 제사를 지내는 일종의 농우제이다. 언제인가 1년에 소가 20여마리 떼죽음을 한 일이 있었으며 그 후로 소에 대하여 신경을 많이 썼다고 하는데 그 후 우당산을 모셨는지 그 전부터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장대 위에 기러기를 세워 이를 진떼(짐대)라 하고 그 부근을 진떼거리라 하였는데 이는 소의 죽음을 방지하기 위해서 세웠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당산으로 제를 지냈으나 오래전에 없어졌다.

 마을에는 샘이 여러개 있어 당일날 아침에 모든 샘을 퍼내고 깨끗이 소제를 한다. 그러나당샘으로는 동작과 서작에 각 1개씩만을 사용할 뿐이다. 오후 3시쯤 화주가 당산에 물을 올린 후 마을사람들이 물을 길러가는데 「재수가 좋다」하여 서로 길러가려고 다투기도 했다고 한다.


3. 제의 준비


 1) 제관의 선정

 제관의 선정은 정월 초이렛날 마을회의를 통하여 한다. 제관을 잘못 선정하면 제관 자신 뿐만아니라 마을 전체에 해가 돌아 오기 때문에 매우 신중을 기한다. 생기복덕을 보아서 탈이 없는 사람을 선정하는데 특히 제사 당일의 운을 따져보아 불택이 걸리지 않아야 한다. 제관은 치제의 과정이 힘들고 혹시 자신도 모르는 부정이 있어 해를 입을까봐 서로가 기피하는 경향이 있지만 작년의 제관이 연속하여 하는 경우는 없다.

 제관은 화주 1명, 헌관 3명, 축관 1명, 공원 2명, 황토관 1명 등 총 8명을 뽑는다. 헌관은 실제로 제를 집행하는 사람들로 수헌, 아헌, 종헌으로 나뉘지만 때에 따라서는 2명만을 선정하는 경우도 있다. 이 때에는 수헌을 제괸이라 부르고 나머지 1명을 헌관이라 불렀다. 공원은 화주를 도와 제물을 구입하고 당산제에 관한 사소한 일들을 심부름한다. 황토관은 황토를 놓는 일을 책임진다.

 2) 치 제

 일단 제관으로 선정되면 당일부터 몸과 마음가짐을 똑바로 하고 치제에 들어간다. 되도록 외출을 삼가고 대인접촉을 피한다. 상가집은 물론 지저분한 곳에는 일체 가지 않고 더러운 것은 보지 않는다. 대변을 보면 목욕을 하고 소변을 보면 손을 씻는다. 추운 겨울에 이렇게 정성을 들이기란 매우 힘든 일이어서 되도록이면 화장실에 가지 않기 위하여 먹지 않는다고 한다.

 1987년 동작에서는 8명, 서작에서는 5명의 제관을 선정하였는 바 다음과 같다.

동           작

서           작

   화  주      이인구(47)

   제  관      최상남(47)

   축  관      김광언(44)

   헌  관      오계헌(39)

   공  원      정병길(36), 유동석(46)

   황토관      강대운(52)

     화  주          송용현(61)

     제  관          선남길(68)

     축  관          오남열(53)

     헌  관          문경곤(51)

     공  원

백선기(55)

     황토관

 제관은 제를 마친 후에도 가리는데 옛날에는 3년을 가렸었다고 하나 3개월을 가렸다가 요즈음은 3일을 가린다고 한다.

 제관의 치제만큼은 못하지만 농악대들도 당산제에 참가하려면 스스로 몸조심하며 자신의 판단에 좋지 않은 곳에 다녀온 일이 있으면 당산제에 참가하지 않는다. 마을사람들도 행동을 조심하고 일심동체가 되어 경건한 마음으로 당산제를 준비한다. 개고기는 설을 쇤 후에는 일체 먹지 않으며 정월 열나흗날에는 비린 것은 물론 배추김치도 먹지 않고 싱건지국, 김, 콩나물 등으로 식사를 한다. 또 악취를 내는 행위를 하는 등 일체의 부정한 행동은 하지 못한다.

 3) 제 비

 이 마을에서는 당산제를 운영하기 위해 목청계를 운영하고 있으며 지금까지도 계첩을 착실히 기록하고 있다. 목청계의 회원은 마을민 모두가 당연히 가입되는데 뱃속의 아이도 인구전을 냄으로 이 때부터 회원으로 가입이 되는 셈이다. 계에서는 당산제 운영의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며 소용되는 기물을 만드는 작업을 한다. 또 경비로 쓰고 남은 쌀을 모아 빌려주고 전리를 받아 기금을 적립하기도 한다. 또 마당밟이를 하여 거출된 돈은 목청계에 적립한다.

 초이렛날 목청계를 열어서 인구전을 날파한다. 회의에서 날파하므로써 어느 정도 강제성이 있기는 하지만 한번 결정이 되면 스스로 납부하는 형식이며 뱃속의 아이까지도 스스로 계산하여 내놓는다. 인구전은 어른 5전 아이 3전과 같이 차등을 두어 날파하였다. 하지만 요즈음은 인구전을 추렴하지 않고 목청계의 기금으로 충당하고 있다. 또 당산제에 정성을 들이면 복을 받는다고 믿어 당산제에 소요될 물건 즉 징이나 꽹과리 등 굿물이나 술 등을 희사하기도 하는데 요즈음도 시내에 거주하는 이 마을 출신들이 금전과 물품을 희사하기도 한다.

 4) 제물의 장만

 제물은 동서작이 각기 장만하지만 우마당의 제물은 동작과 서작에서 매년 번갈아 준비한다. 그러므로 동작의 경우 한 해에는 제물 2벌, 또 한 해에는 3벌을 준비한다.

 제물은 당일 (음 1. 14) 준비하지만 제주는 일주일 전에 담근다. 제물과 기물은 당일 오전 화주와 공원이 함께 장에 가서 일체 새것으로 구입한다. 장에 갈 때는 입마개를 하고 가며 아는 사람을 만나도 인사나 말을 하지 않는다. 주로 광주 양동시장을 이용하는데 화주는 한 쪽에 가만히 서 있고 공원이 구입한다. 공원은 흥정을 하거나 가격을 깍지 않고 상인의 요구대로 값을 치루는데 간시기만 전해주면 상인들이 알아서 장을 보아주기도 한다.

 당산제를 모시는 날 폭풍이 불어도 당산나무 아래에 천막을 치고 솥과 시루를 걸고 떡과 밥을 하여 당산제를 모셨으나 요즈음은 천막을 치지 않고 화주집에서 모두 장만하여 가지고 간다. 음식을 장만할 때에는 장갑과 입마개를 하고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금년에는 얘기를 하기도 하였으며 장갑이나 마스크를 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음식에는 간을 하지 않으며 고춧가루를 사용하지 않는다. 옛날에는 흰떡을 하였으나 요즈음은 반드시 고물을 무친다. 예주는 반드시 집에서 담그는데 보통 일주일이 걸린다. 화주부부는 저녁에 잠잘 때 술동이를 보듬고 잘 정도로 정성을 드린다. 옛날에는 마을에서 통돼지를 잡아 사용하였으나 요즈음에는 장에서 제육을 구입한다.

 화주내외가 준비한 제물은 제관이 확인후 상당 하당 우마당 세벌로 분류하여 챙긴다. 수저와 젓가락으로 떠서 창호지에 싸고 짚으로 묶어 석작에 차곡차곡 담아둔다. 그런데 당산의 신격에 따라 제물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나 떡시루의 크기는 현격히 차이가 있다. 상당, 하당, 우마당의 순으로 떡시루의 크기가 작아졌다. 이는 당산의 격을 나타내어 주는 것이라 하겠다.

 

저육(돼지머리)1개  15,000원

두부  20모          2,000원

보세기 3개     

물동이 1개          3.800원

식기   2개          8,200원

솥     1개          2,000원

건시   3관          1,500원

과상   1포           500원

참기름 1병          1,000원

밭     1되

고깔  10벌         10,000원

달래                400원

도라지              1,000원

제주 1상자          5,000원

제석   1장          8,500원

사리   2개          2,500원

대야   1개          1,400원

깍쟁이 2개           400원

대추                1,000원

문어   1미          1,000원

미역                2,500원

양초   1갑          1,000원

창지   6매         

장갑                3,000원

무시(무)            1,000원

팥반대              1,800원

석미, 백미 4되        4,800원

죽석기 2개      

삼푼대기   

수저   2개            2.000원

접시   3개            2,400원

밤     2홉             500원

가조기 1미            1,000원

해채                   500원

향     1속            1,000원

화지   2권            2,000원

김     1톳            3,000원

고사리                1,000원

  ※경비              6,000원

- 총계 99,600원 -

   

제를 지내고 나면 제에 시용했던 그릇들은 화주집에서 사용한다. 물동이, 남비, 양동이 등 일체를 구입하기 때문에 살림이 없는 사람도 살림을 할 수 있을 정도라 한다. 경인년 (1986)의 간시기에 기록된 내용과 가격을 보면 다음과 같다. (품목은 미리 기록해 갔으며 가격은 추기하였다.)

 5) 금줄ㆍ금토

 금줄은 제관이 선정되는 초이렛날에 치고 열이렛날 치운다. 금줄을 치는 곳은 마을에서 외부로 통하는 모든 길과 화주, 헌관, 축관, 공원, 황토관 등 제관의 집에 친다. 그러나 당산에는 치지 않는데 이는 마을의 통로를 이미 차단했기 때문이란다. 황토는 황토관이 놓는데 당일 놓아도 괜찮지만 열사흗날 놓는 것이 일반적이다. 옛날에는 제관의 집앞에도 놓았으나 요즈음은 당산에만 각 1짐씩 놓고 제관집에는 놓지 않는다.


4. 제의 진행


 열나흗날 점심을 먹은 후 본격적으로 당산제의 준비가 시작된다. 목청에서 농악기를 꺼내어 점검하고 가락을 맞추어 보는 일이 첫째이다. 농악을 치는 사람들은 필히 제에 참례하여야 하기 때문에 궂은 일에 다녀온 사람은 스스로 참여하지 않는다. 농악대는 먼저 당산에「오늘 저녁 제사를 모십니다」하는 뜻으로 인사를 올리는데 상당, 샘굿, 하당, 우마당의 순서로 쇠소리를 낸후 축관댁, 화주댁, 3헌관댁, 공원댁의 순으로 제고나들의 집집마다 농악을 쳐준다. 그래도 시간이 있으면 부정함이 없는 집부터 마당밟기를 하다가 나발소리가 나면 화주집으로 모인다. 그러나 비가 오면 농악을 치지 않는다.

 당산제는 10시경에 시작한다. 먼저 서작과 연락하여 상당으로 올라가는데 나발이 앞장서고 떡시루를 안은 화주, 제물석작을 든 축관, 제주를 든 제관, 농악대의 순으로 행렬을 지어 간다.

 제는 동서작이 나발로 신호하여 동시에 시작한다. 당산목 아래 제석을 놓고 지설을 하는데 당산목의 반대방향으로 진설을 하여 당산목을 등지고 제를 지내는 것이 특이하다. 백석으로 비닐포장을 깔았으며 나물은 접시에 담고 나머지는 백지에 올려 진설하였다. 제의 절차는 유교식으로 진설-분향재배-초헌-개반삽시-아헌-독축-종헌의 손으로 지행되었다. 제가 끝나면 헌식하고 소지를 올리지만 음복은 하지 않는다. 헌식은 제물을 골고루 떼어서 싼 백지뭉치와 술 한잔을 미리 날라다 놓은 황토흙에 묻고 물을 반동이쯤 부어 황토흙을 반죽한 다음 반질반질 다듬어 놓는다. 옛날에는 헌식터를 덕석으로 덮었는데 이는 개가 파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또 제물 모두를 헌식하였으며 약 반년이 지나서 헌식터를 파보면 돼지뼈도 없어져 버렸는데 당신이 영험하여 다 잡숴 버렸다고 믿었다. 소지는 마을의 안녕과 주민들의 소원성취를 위해 올리는데 옛날에는 서로 올리려고 했는데 이는 당산신의 영험이 대단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잘 올라가면 이러한 것들이 성취될 것으로 믿는다.


            돼지머리           시첩            반              떡시루

                        삼색과        잔대

                고사리          톳나물        도라지     

                나물                           나물          문어포

                대추         밤           곶감


                       축관          제관          헌관

 

                                    당산목


                              <동작 상당의 진설도>


 상당의 제가 끝났음을 알리는 나발소리가 나면 각 가정에서는 차례상을 차린다. 제관들은 나발로 서작과 연락한 후 화주집으로 가서 제물을 챙겨 하당으로 향한다. 하당의 제의 절차는 상당과 같으나 독축이 없다. 옛날에는 축문이 있었으나 소실되어 버렸다고 한다. 상차림에서 저육이 없고  비린 음식인 생선이 첨가되는 것이 다르다. 또 당신의 신격이 삼신인 까닭에 제석으로 짚을 깔고 제를 지냈으며 제가 끝난 후 음복을 하는 점이 상당과 차이가 있다. 하당의 제가 끝나면 다시 화주집으로 가서 우마당의 제물을 챙겨 우마당으로 향한다.우마당에서는 동서작이 합제를 지내므로 먼저 온 팀이 기다려야 한다. 제의 절차는 상하당과 비슷하고 독축의 절차가 있다. 상차림은 순수한 나물을 중심으로 차리고 저육은 놓지 않는데 당산의 신격이 소이기 때문이다. 동서작의 제관들은 우마당 아래에서 당산제에 대한 이야기와 마을사에 대해 자유로이 이야기를 하면서 음복을 한다. 제를 지낼 때의 엄속한 분위기와는 달리 큰 소리를 하기도 하고 춤을 추기도 한다. 이때에는 마을사람들이 나와 함께 음복을 하기도 하는데 당산제에 쓰인 떡은 약이 된다 하여 모두 얻어 가는데 특히 그 떡을 먹으면 혼인발이 잘 선다고 한다.

 음복이 끝나면 동서작의 제관들은 각자 나누어져 집집마다 마당밟이(마당볼비)를 한다. 마당밟이는 다음날 09시경까지 계속된다.

 1987년 조사당시의 동작 당산제의 지해이과정을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18:50 목청관리인 댁에서 굿패들이 가락을 맞추어 본다. 농악대는 꽹과리(상쇠: 정병길)2, 징 1, 장고1, 북2 등 6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20:15 농악대가 목청관리인 댁을 출발하여 상당과 하당에 인사를 하였다.

 20:30 화주댁에 도착하였으나 제를 지낼 시간이 아직 되지 않아서 휴식을 취하였으며 df부는 제물준비를 도왔다.

 21:50 서작과 전화로 연락을 하여 22:00에 제를 지내기로 약속을 하였다.

 22:15-22:45 상당에 제사. 제사의 사작과 끝에 나발을 불어 서작과 연락을 하엿다.

 23:00-23:15 하당에 제사. 상당의 제물 일체를 화주집에 갖다 놓고 미리 준비해 놓은 하당의 제물을 챙겨 하당에 제사하였다. 나발로 신호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23:25-24:00 동서작이 우마당에 합제한 후 음복. 금년에는 우마당의 제물을 동작에서 준비하였다. 동작이 상하당의 제를 마치고 우마당에 도착하니 서작의 제관들이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음복을 할 때에는 상하당의 제의 때와는 달리 큰소리로 akdf의 대소사와 당산에 고나한 이야기를 자유로이 주고 받는 것으로 보아 제의에서 축제로 이전이 되는 시점인 듯하였다. 일기가 좋지 않아 마당밟이는 못하였다.


5. 결 산


 삼우날(정월 17일) 새벽에 화주는 밥과 미역국만 들고 당산에 올라가 절을 하고 내려온다. 오전에는 목청계를 열러 결산을 하는데「하기를 닦는다」,「문서 닦는다」고 한다. 당산제에 소요된 경비를 결산하고 그 해의 품삯 등을 정한다. 결산이 끝나면 마당밟이를 못하였던 집을 돌아다니며 한집도 빠짐없이 마당밟이를 한다. 이때는 이웃끼리 술을 나누어 먹고 한바탕 축제의 마당으로 승화된다. 옛날에는 각 가정에서 짚을 추렴해 왼새끼를 꼬아 줄을 드려 동작과 서작이 줄다리기를 하였다고 한다.


6. 당신의 영험


   ◦ 서작에서 당산나무가 죽어서 베어버렸는데 나무가 1년간 울었다. 그래서 다시 당산제를 다시 지내기 시작했다.

   ◦ 일제시대에 소사동마을에 사는 하동정씨라는 사람이 와서 우마당 당산나무에 앉은 까치를 총으로 잡은 후 지골을 맞아서 죽었다.

   ◦ 한 30여년전 오만기라는 사람이 정월 열나흗날 합수를 내고 나서(악취를 냈다) 배가 장군처럼 불러 돌아가셨다.

   ◦ 당산나무를 베니까 빨간 피가 흘러 나왔으며 나무를 벤 사람이 죽었다.

   ◦ 잉태한 지도 모르고 화주를 한 적이 있었다. 그 부인이 낙상을 하여 죽을뻔 하였으며 아이가 태어나 귀가 먹고 말을 못하였다. 그 후 부인은 아이를 갖지 못하였으며 사라호 태풍때 벼락을 맞아 죽었다.

   ◦ 태풍이 불어서 당산나무 가지가 부러져도 한 쪽으로 치워 놓을 뿐이지 절대 화목으로는 사용하지 않는다.

   ◦ 열나흗날 부부관계를 하면 떨어지지 않는다.

   ◦ 도둑이 소를 훔쳐 도망가다가 저녁내 마을만 돌았다.



2. 덕남동 덕남 당산제


                                             조사일시 : 1993. 2. 14

                                             조 사 자 : 박임봉, 윤성실

                                             조사방법 : 현지참여조사 (현재시행)

                                             제 보 자 : 박복암 (78) : 현 새마을지도자

                                                        김상선 (69) : 전 새마을지도자

                                                        전해신 (60) : 집사

                                                        심극주 (74) : 축관


1. 마을 개관


 덕남마을은 삼면이 산으로 싸여 있고 서쪽만 트여 있으며 뒷쪽은 화순군과 경계를 이룬다. 전형적인 농촌으로서 주로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지금은 시설원예를 해서 많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 이 마을의 형성은 약 400년전이다. 마을의 성씨는 김해김씨, 천안전씨, 밀양박씨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혼성촌이다. 옛날에는 마을의 촌명을 「둔택」이라 했었다. 처음에는 설씨가 거주하였고 그 후 350년전 김해김씨가 들어와 거주하고 약 200년전 천안전씨 등 여러 성씨들이 모여 80여호 마을을 형성하여 살면서 촌명을 덕남으로 개명했다. 마을의 경제력이 풍부하여 부근에서 말하기를 광주에서는 첫째가 재매(지금의 신안동)마을이고 둘째가 덕남마을로 꼽을 정도로 잘 살았는데 서기 1908년 (무신년) 음력 11월에 마을이 큰 화재를 당하여 모두 전소되었으나 부근 (광주, 나주, 남평, 화순) 주민들과 정부에서 적극 구호하여 마을이 다시 복원되었다. 1910년 일제침략 후 광주군 효천면 덕남리로 불렸다가 행정구역 변경으로 효천면과 지한면이 합쳐져 효지면으로 개칭되고 광주시 확장으로 덕남동으로 개칭되었다.

 현재 어느 농촌이나 그렇듯이 젊은 사람들이 마을을 떠나 지금은 주로 나이 많으신 어른들이 마을을 지키고 있다. 지금은 마을의 규모가 40여호에 인구 250명 정도에 불과하지만 옛날에는 부촌으로 마을의 경계를 나타내는 대문이 마을입구와 마을 뒷편에 있을 정도로 큰 규모의 마을이었다고 한다. 이 마을에 있었던 마을대문은 성과 속 경계이며 세속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재액과 역신을 차단하는 우실신앙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지금은 마을대문은 없어지고 마을사람들을 통하여 구전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2. 당산제의 현황과 신체


 1) 당산제의 현황

 이 마을은 마을제사를 당산제라 한다. 할아버지당산은 천룡당산이라고 하고 할머니당산은 그냥 당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약 400년전 마을이 형성될 때부터 지금까지 매년 당산제를 한번도 거르지 않고 지내고 있다. 일제시대에는 단속이 심해 당산제를 지내지 못하게 인근 효천주재소에서 굿물을 모두 공출해 갔어도 마을사람들이 몰래 당산제를 지냈다고 한다.

 2) 당산과 신체

마을의 당산은 두 곳이다. 할아버지당산과 할머니당산이라 부르며 마을입구 왼쪽에 동산이 있는데 동산 윗쪽에 할아버지당산이 있고 그 아래의 도로가에 할머니당산이 있다. 동산은 그리 높지 않지만 귀목나무 등이 숲을 이루고 8부 능선쯤에 우산각이 있다. 동산에는 약 400년된 느티나무가 있는데 「당산나무」라 한다. 예전에는 3그루의 당산나무가 있었는데, 1그루는 해방직후 고사되고 1그루는 불에 타버리고 지금은 1그루만 남아 있다. 하지만 당산나무에 제사를 모시는 것은 아니다. 아래쪽을 돌로 둘러 쌓고 그 위에 무덤같은 형태로 만든 신체에 제사를 모시는데 그 꼭대기에 사방 70~80㎝가 되는 널찍한 돌을 얹어 두었다. 그 곳은 당산제를 모시고 나서 헌식하는 곳이기도 하다.

 동산 아래 마을입구의 도로가에 있는 할머니당산의 제상은 원래는 무덤 앞에 있었는데 89년 도로 확장 관계로 할머니당산 위(7m)로 옮겼다가 금년에 노인당 신축관계로 약 5m위로 옮겨서 임시로 제상을 만들어 당산제를 지냈다. 할머니당산 제상은 다시 만들 계획중에 있다.


 3. 제의 준비


 1) 제관의 선정

 설이 지나면 정월 5일쯤에 날을 받아 이장의 주제하에 마을회의를 연다. 제관을 선정하고 제비를 결정하기 위한 회의이다. 이 마을에서는 화주와 제관을 한 사람이 겸한다고 한다. 화주는 일체의 제물을 준비해야 되므로 깨끗한 사람을 고른다. 화주를 선정한 다음 축관 1명, 집사 2명, 순으로 선정한다. 이들 역시 깨끗한 사람으로 한다. 즉, 상복을 입고 있지 않은 사람 또 정월에 개고기를 먹지 않은 사람으로 한다. 그러나 화주의 경우 이런 일반적인 선택기준보다 더 엄격해서 집안에 어린이가 있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젊은 사람은 피한다. 금년에 마을의 화주ㆍ제관으로는 김상제씨(78세)가 선정되었고, 축관 심극주씨 (74세), 제관의 보좌 역할을 해주는 집사로는 박복암씨(78세), 전해신씨(60세)가 각각 선정되었다. 제보자에 의하면 옛날에는 화주를 3명 뽑았다 한다. 한 명은 제주를 담그고, 한 명은 장을 보아오고, 또 다른 한 명은 제수를 준비한다. 그렇지만 지금은 인구가 적고 화주의 조건이 까다롭기 때문에 선뜻 화주를 맡으실 분이 많지 않아 한 사람의 화주를 뽑는것도 힘든 일이라 한다.

 2) 치 제

 제물은 화주집에서 그들 부부가 함께 만들며 제물을 만들기 전에 샘물로 목욕을 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는다. 또 제물을 만들 때는 화장실에 가는 것도 피하고 만일 다녀오게 되면 찬물로 목욕을 해야 한다. 음식을 만들 때는 말을 삼간다. 제물은 절대 맛을 보거나 깨끗하지 못한 손으로 만져서도 안되며 간을 하거나 양념을 해서도 안된다.

 화주는 항상 몸을 깨끗이 하는 동시에 며칠전부터 소식을 하여 음식을 만들면서 화장실에 가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조심한다.

 지금은 제주로 막걸리를 쓰지만 전에는 청주를 썼기 때문에 집에서 제일 먼저 제주를 담갔다. 제주를 앉혀 놓은 술도가지는 안방 아랫목에 두어 잘 익도록 하는데 밤에 잠을 잘 경우에도 술독이 놓인 쪽으로는 발을 뻗지 않고 잔다. 술이 익는지 어떤지 알아 보려고 술독에 귀를 댔던 사람이 귀가 멀은 일도 있다 한다.

 대개 제물 장만은 해질무렵부터 시작한다. 이는 제물을 장만할 때는 다른 집에서 음식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비린 것이나 칙한 음식을 장만하지도 않고 먹지도 않는다. 제물이 만들어지면 깨끗한 곳에 놓고 두 곳에 제물을 나누어 놓는다. 할아버지당산과 할머니당산에 올릴 제물을 따로 하는 것이다. 마을에 금줄이 쳐지면 집안에 차례 모실 제물을 사가지고 그 밑을 지나 다니지 못한다. 그래서 금줄을 치기 전에 각 가정에서는 미리 차례에 쓸 물건들을 사다 놓는다.

 화주는 선정된 날부터 몸과 마음에 정성을 다하지만 특히 제사를 모시는 14일에는 온갖 열성을 다하고 마을을 위해 신중을 기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본인에게도 복이 된다고 믿어 공을 드리는 마음 가짐으로 임한다. 가끔 이렇게 힘든 화주를 지원하는 사람도 있다. 깨끗하고 정성껏만 모시면 본인에게 복이 돌아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특히 아들이 없는 사람들이 화주를 지원하는 예가 많은데 그렇게 정성을 드리면 반드시 아들을 낳게 해 준다고 믿고 있다.

 3) 제 비

 당산제의 제비는 전에는 마을이 크고 사람이 많아서 인구수로 거출하였는데 금년에는 인구가 많이 줄어 호당 5,000원씩 거출했다. 옛날에는 제비를 걷을 때 농사가 많고 살림이 넉넉한 사람들은 쌀을 함께 내준다. 그 쌀을 깨끗한 집의 쌀과 바꾸어 제주, 떡, 메를 짓는데 썼다.

 4) 제물의 장만

 당산제의 준비는 제주를 담그는 것부터 시작된다. 초이레경에 화주는 깨끗이 목욕을 한 후 제주를 담그는데 샘물을 새로 품고 청소한 다음 물을 길어다 정성껏 술을 앉힌다. 1950년대 까지는 제주를 담가서 사용했으나 지금은 제주를 따로  담지 않고 막걸리를 썼다.

 대개는 14일 당일에 제물을 사러 장에 간다. 장에서 사올 물건은 이미 마을회의에서 제비를 산정하기 위해 정해 놓는다. 전에는 장을 보러 가는 화주를 따로 뽑았으나 지금은 사람이 많지 않아 따로 뽑지 않고 화주와 마을 대표들이 장을 보기 앞서 목욕을 하고 깨끗이 세탁한 옷으로 갈아 입고 간다. 장은 광주시내 양동시장에서 보아 오며 전에는 걸어서 다녔다. 걸어서 다닐 때는 제물을 내려 놓아서는 안된다고 하여 장에서부터 한번도 쉬지 않고 마을까지 직행했다. 지금은 3-1번 시내버스가 하루에 8번씩 왕래하고 있어 장을 보러 갈때는 시내버스를 이용한다. 장을 보러가서 제물을 사는 이외의 다른 일을 해서는 안되며, 또 궂은 곳에 가서 궂은 사람과 만나면 안되고, 절대로 흥정을 하거나 값을 깎아서도 안된다. 당산제를 모실 물건을 사러가면 오히려 물건 파는 상인들도 복을 받으려고 값을 비싸게 받지 않는다 한다. 장에서 사는 물건은 제수로 쓸 삼실과와 삼채, 마른 명태 등이며 돼지고기나 생선같이 비릿한 것은 사지 않는다.

 제보자에 의하면 해방직후까지는 소머리로 제사를 모시다가 차츰 간략하게 제를 모시자는 의견이 있어 소머리를 쓰지 않는다. 그 후 지금까지 칙한 것이나 비릿한 것을 쓰지 않고 마른 명태를 쓰고 있다. 이밖에 양초와 백지, 향, 그리고 당산제에 필요한 시루, 제기 등을 새로 구입한다. 제기는 매년 당산제를 모시고 나서 화주에게 주기 때문에 매년 새로 구입하게 되며 이 또한 제사를 정갈하게 모시기 위함이다.

 장에 가서 제일 먼저 사는 것이 시루이다. 시루를 서로 먼저 구입하려고 새벽부터 경주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먼저 시루를 구입하는 것이 제일 깨끗한 시루라고 한다. 장에서 사온 물건은 화주집으러 가져가서 깨끗한 곳에 가려 놓는다. 아침 일찍 장을 보러 가는데 사람들이 떠나면 마을사람들이 청소도구를 들고 나와 마을 곳곳을 깨끗이 청소한다.

 5) 금줄ㆍ금토

 마을어구에 공동샘이 하나 있다. 지금은 집집마다 수도시설이 되어있지만 전에는 이 샘 하나로 모든 마을사람들이 생활용수로 사용했다. 샘 청소는 열나흗날 오전에 마을의 깨끗한 사람들이 나와서 하고 청소를 끝마친 후 화주가 제물을 장만하는데 쓴다. 샘 청소 후 마을사람들은 절대 물을 써서는 안된다. 전에는 깨끗한 성인 남자 10여명으로 구성되어 마을 청소나 샘 청소를 하였는데 요즈음 젊은 사람이 없어 남자 어린이들과 나이드신 어른들이 주로 청소를 한다. 또 이날 깨끗한 마을사람들이 금줄과 금토를 할아버지당산과 할머니당산, 샘터 그리고 화주집에서 설치하고 뿌려놓는다. 금줄을 설치할 때는 생대나무를 베어 꼭대기 부분의 잎만 놓아두고 깨끗이 다듬은 다음 백지를 꽂는 새끼줄을 윗쪽에 묶어 땅에 세운다. 금토는 마을 뒷산 아래에서 깨끗한 날 깨끗한 곳의 황토를 파다가 한 걸음 거리로 한 움큼씩 놓는다. 일단 금줄과 금토를 마을입구에 치면 외지 사람은 스스로 들어오지 않고 마을사람이라 하여도 함부로 출입할 수 없으며 특히 화주집에 출입하는 것은 당산제와 관계되지 않은 사람의 경우 일체 출입을 금한다.


 4. 제의 진행

 초저녁이 되면 일찍 저녁을 먹고 할머니당산 옆 넓은 공터에 나무를 모아서 화톳불을 지핀다. 전에는 호당 나무 한 짐씩을 걷어 화톳불을 지피고 농악을 시작하면 온 마을 사람들이 굿을 보러 모여들어 마을의 분위기가 고조되었으나 지금은 사람이 많지 않아 마을 어린이들이 쥐불놀이를 할뿐 제를 지내기 전에는 농악 놀이를 하지 않는다. 제관들이 깨끗한 옷을 입고 밤 9시 30분 정도가 되면 화주집으로 간다. 제관의 복식은 한복에 검은 두루마기, 건, 검은 고무신을 신는다. 화주집에 당도해 이미 장만해 놓은 제물을 석작에다 두 군데로 나누어 두었다가 먼저 할아버지당산에 올릴 것을 양손에 받쳐 들고 이동한다. 떡시루를 든 제관이 앞장선다. 떡은 깨끗하고 청결하다는 의미에서 백설기를 한다. 무덤처럼 생긴 할아버지당산 앞에는 널직한 자연석으로 제상이 있어서 여기에 축관 등이 진설을 한다. 제를 지낼 때는 제관, 축관, 집사만이 당에 올라 제를 올린다. 제물은 삼실과 삼채 그리고 명태와 메, 국, 떡 등이 전부다. 메는 한 그릇만 올린다.

 제물의 진설은 다음과 같다.


  

            메            국

  

  명태                                 시루

 

      고사리      무나물      도라지

      나  물                  나  물

 

  대추    밤       곶감       배      사과

 

                                      향


 제는 분향재배-강신재배-초헌-독축-아헌-종헌-사신-소지-헌식-음복 순으로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행하여 진다. 전에는 촛불을 썼지만 양초가 흔하지 않던 시절에는 대나무를 쪼개 살을 만들고 그 주위에 창호지를 발라 등을 만들어 참기름 종지기에 심지를 넣고 불을 밝혔다. 그러나 지금은 전기불을 쓰고 있다. 예전에는 샘물이 많이 나오라는 끗에서 참기름 불을 샘속에 밝혀 두기도 했다. 참기름불 종지기를 바가지 속에 넣고 샘물 위에 띄워 놓는 것이다. 또 이 마을에서는 한지에 지방을 쓴 위패를 세곳에 붙이는데 할아버지당산에 「천룡지신」, 할머니당산에 「당산지신」 그리고 샘에는 「원천지신」이라 써서 붙인다. 이들은 소지할 때 축문과 더불어 소각한다.

 당산제가 있는 날에는 젊은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오기도 한다.

 저녁 10시 정도가 되면 제사가 시작된다. 요즈음은 전에 비해서 제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 시간을 빨리 정해서 제를 모신다 한다. 제사는 방안제사와 같은 순서대로 잔을 올리고 재배를 하며 이들이 모두 끝나면 소지를 한다.

 헌식은 상에 차렸던 음식물을 조금씩 떼어내 깨끗한 한지에 싼 다음 땅에 묻는다. 묻는 곳은 앞에서 말한 무덤 모양의 할아버지당산 윗부분 헌식터이다. 맨 위에 있는 돌을 일으켜 세워 그 밑을 조금 파고 헌식물을 묻고 다시 돌을 덮는다. 이때 「영차영차」하는 기합소리와 함께 돌을 덮는다. 헌식을 한 후 몇 사람이 음복을 하는 것으로 제사가 모두 끝난다.

 할아버지당산에서의 제사가 끝나면 제관들은 다시 화주집으로 가서 미리 준비해 놓은 할머니당산의 제물을 석작에 담아 양손으로 받쳐 들고 할머니당산에 오른다. 이때 시루는 없다. 시루 하나에 떡을 해서 할아버지당산과 할머니당산에 나누는데 시루는 할아버지당산에 올리고 할머니당산은 반쪽의 떡만 가지고 간다. 할머니당산에서의 제사방식은 할아버지당산의 경우와 같다. 그러나 대개 당신에 대한 기대가 크고 또 영험의 힘이 전해 내려오는 것이 할머니당산이다. 대화중에 간단히 나오는 당신의 신력에 대해서도 거의 할머니당산이 어떻다는 식의 이야기가 많다.

 할머니당산 옆 공터에 불을 피워 놓기 때문에 그 주변으로 동네사람들이 모여 들어 구경을 한다. 따라서 엄숙한 분위기 보다 잔치와 같은 분위기가 할머니당산에서는 어우러진다, 또 할머니당산에서 제사가 끝나면 음복하는데 할아버지당산에서의 제한된 사람만 하는 것과 달리 모인 사람들이 함께 참여하여 떡 한쪽이라도 나누어 먹는다,

 11시 30분 정도가 되면 제가 끝났다는 신호로 징을 3번 두드린다. 예전에는 징 대신에 나발을 불었다고 한다. 이 신호가 있어야만 일반 가정에서는 차례를 지낼 준비를 할 수 있다. 음복까지 모두 마치고 화주는 철상을 하여 집으로 가고 굿을 치는 사람들이 할아버ㅓ지당산과 할머니당산 주위를 돌면서 굿을 친다. 그 다음 샘으로 가서 샘굿을 신명나게 치면서「물이 펑펑 나와라」라고 외친다. 금년에는 굿치는 사람이 많지 않아 상쇠 심극주씨를 비롯하여 꽹과리, 징, 장구만이 흥을 돋구었다. 이렇게 굿을 치는 것은 잡귀나 액을 쫓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이 굿 놀이는 밤새 계속된다. 이렇게 굿을 치고 나서 새벽이 되면 굿 놀이를 마치고 화주집에서 메구를 쳐주고 대접을 받는다. 당산제를 지내고 나서 16일 밤에 삼우제를 지내는데 화주가 과일과 메만 새로 장만하여 혼자서 제사를 지낸다.

 화주는 당산제를 맡았던 일년 동안은 상가나 산고든 집 등 궂은 곳에는 가지 않는다. 그리고 마을에서 울력을 하는 경우 빼주게 된다. 삼우제를 마치고 마을총회를 하는데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남은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마을 책임자가 지난 해의 결산을 하고 여러 가지 마을 일을 논의한다.


 5. 영 험


 이 마을에서 전해오는 당산신의 영험담은 아래와 같은 것들이 있다.

 1. 목욕을 하지 않고서는 할머니당산이 있는 길을 지나지 못한다. 만약 그것을 지키지 못한 사람이 지나가면 당산할머니가 화가 나서 그 자리에 꿇어 앉혀 버린다고 한다.

 2. 아들을 못가진 사람이 화주를 자원해서 제사를 올리면 아들을 점지해준다.

 3. 마을에 도둑이 들어와 소를 끌고 밤새 도주했으나 날이 새어 보니 당산 주위만 맴돌고 있었다. 또 마을에 도둑이 들면 당산할머니가 꼼짝 못하게 꿇어 앉혀 버렸다 한다.

 4. 한번은 당산제를 모셨는데 마을이 좋지 않아서 새로 장을 보고 택일을 하여 제사를 다시 모셨다. 당시 화주가 제주가 익었는지 알아보려고 맛을 보았기 때문이다.

 5. 일제시대나 6.25때 마을 젊은이들이 전쟁에 나아갔으나 한 사람의 부상자나 전사자가 나지 않았다.



3. 노대동 노대 도제


                                               조사일시 : 1991. 2. 28(음 1. 14)

                                               조 사 자 : 주인택, 서영미

                                               조사방법 : 현지참여조사 (현재시행)

                                               제 보 자 : 김호검 (59) : 새마을지도자

                                                          박동백 (52) : 현통장

                                                          김호석 (73) : 상  쇠

                                                          양덕애 (65) : 김호석씨 부인


 1. 마을 개관


 행정구역상으로 광주직할시 서구 효덕동 3통에 속하며 서구의 최남단에 위치하는 노대마을은 광목간 도로에서 광주대학교를 지나 동남쪽 2㎞지점에 위치한다. 마을 동쪽의 분적산(해발 412,5m)과 남서쪽의 정광산(해발 353,8m. 광산구 양과동, 나주군 남평면, 화순군 화순읍과의 경계를 이루는 산)의 협곡에 있는 이 마을은 칠거재(마을의 동남향)를 통해 화순읍 세양리와 연결되는데 칠거재는 지원동의 너릿재와 함께 화순과 광주를 연결하는 주요 통로이었다. 1980년 광주민중항쟁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였다고 한다.

 노대는 노대마을과 효우동마을 2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김해김씨, 함안윤씨, 밀양박씨 3성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남양홍씨(6호), 순흥안씨(3호)등이 함께 살고 있으며 90여호 120세대에 이른다.

 이 마을에서 직접 정리한 마을의 연혁과 구전을 통하여 노대마을의 역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일반적으로 약 400년전 윤폐비의 후손인 함안윤씨가 성촌했다고 전해지며, 약 350년전 김일손의 후손인 김해김씨가 이거해 왔다고 한다. 전자는 효우동을 이르는 얘기인 듯하고 후자는 노대를 얘기한 듯하다. 그런데 현 마을의 윗쪽에는 이 마을들이 성촌되기 전부터 석림촌이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설씨들이 집촌해 살았다고도 하고 창녕조씨들이 생거하였다고도 한다. 350년전 이주해왔다는 김씨들은 피란을 온 형편이어서 처음에는 석림촌에서 조씨집안의 머슴살이를 하며 숨어 지냈으며 후에 설림촌 아래에 새터를 잡아 노대실이라 하였다 한다.

1789년에 간행된 호구총수에는 세 마을이 모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1912년 간행된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석림촌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 석림촌은 언제 없어졌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단서가 구전되고 있다. 석림촌에는 당산밖에(당산바위)라 부르는 큰 바위를 당신으로 모시고 있었으며 지금도 일부 마을민들에 의해 신앙되고 있다. 이 당신의 바로 위 등성이에 김해김씨 7대조 묘소를 썼다고 한다. 7대라 하면 약 200년에 이르지만 족보상으로 보면 약 250여년 된다. 마을의 신앙터인 당산등에 묘를 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러한 일이 행해진 약 250여년 전에는 석림촌에 거주하였던 세력이 마을을떠났던지 아니면 세력이 극히 약화된 상태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호구총수의 기록으로 볼 때에는 200여년 전까지는 마을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단 효우동, 노대, 석림촌 세 마을이 인접해 있었으면서도 광주군 서면의 여러 마을중 석림촌이 기재의 순위에서 제일 마지막이었다는 사실이 당시 세력이 극히 약화되었음을 알려준다. 그러므로 석림촌은 호구총수가 간행된 1789년경 세력이 매우 약화되었고 늦어도 1912년까지는 떠난 것으로 유추되며 이후 효우동과 노대만이 남았다. 1912년 행정구역 개편시 광주군 효우동면으로 지칭된 것으로 보아서는 그 당시 효우동마을이 노대마을 보다 규모가 더 컸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으나 현재는 노대부락이 대촌이 되어 있다.

 대대로 농업을 주업으로 살아온 이 마을은 광주시로 편입(1955. 7. 1)된 지 40년이 가깝지만 아직도 농업위주의 생산체계를 유지하는 자연부락으로 남아 있다. 해방 후 몰락했다는 이 마을은 협소한 농경지로 인해 6.25 전후에는 하루 나무 한 짐을 광주 양동시장에 내다 팔아야 죽을 쑤러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빈한한 마을이었다. 1970년대 전개된 새마을 사업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이 마을은 도로나 마을 안길을 넓히고, 농업생산력을 증대해 나가면서 점차 삶의 질을 향상시켜 왔다. 특히 새마을사업으로 많은 공로자들이 각종 표창장을 수상했으며, 1971년에 마을회관을 준공하고 회관 앞에는 300녀평의 광장을 마련해 놓고 있다. 동남쪽이 막혀 일조량이 부족하고 북풍받이가 되어 고등원예는 하지 않으나 주위의 야산에 무공해 호박을 재배하여 짭짤한 수익을 올리고 있다. 마을에서 관장하는 저수지로 남쪽의 조대남제(몽리면적 : 200두락)의 북쪽의 효덕제(몽리면적 120두락)이 있다. 마을의 조직은 부녀회가 있을 뿐 동계 등 여타의 조직은 없다. 마을의 행사 때는 통장, 새마을지도자, 새마을 임원, 영농회장 등이 참여하는 마을회의에서 의견을 수렴하여, 결정한다.


 2. 당산제의 현황과 신체


 1) 당산제의 현황

 이 마을의 당산제는 광주권에서 매우 큰 당산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9-10년전 마을 유지들이 모여 지내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 이유로는 당산제에 필히 등장해야 하는 농악을 다룰줄 아는 사람이 점차 줄고, 여러 가지를 가려야 하는 제관을 서로 기피하는 현상이 심화되었기 때문이다. 그후부터 마을공동으로 제사는 지내지 않았지만 겉당산 옆에 사는 김호검씨가 해년마다 정성껏 음식을 장만해 개인적으로 제를 지내왔다. 그런데 마을에 젊은 사람들이 죽는 등 마을 사람들의 생활에 지장을 초래하는 일이 자꾸 생김에 따라 부녀층과 노인층에서 당산제를 다시 모셔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어 1991년 마을회의를 통해 당산제 부활 결정과 함께 당산제를 모셨다. 첨단과학의 시대에 그것도 농촌이 아닌 대도시에 속해 있는 마을에서 당산제를 부활시켰다는 것은 마을신에 대한 뿌리깊은 믿음 때문일 것이다.

 노대마을 당산제의 명칭은 당제, 당산데, 도지라 부르고 있다. 젊은층에서는 당산제라는 용어를 많이 쓰지만 도지는 노인층에서 채집된 용어로 도제의 와음이다. 전남지역에서 상당수 쓰이고 있는 도지는 어느 제사보다도 큰 제사라는 뜻으로 이 마을에서는 설보다도 당산제를 모시는 보름을 더 크게 여기고 있다.


 2) 당산과 신체

  이 마을에는 마을의 역사가 깊은 만큼 당산으로 모셨던 대상물이 중첩되어 나타나고 있다. 마을에서 당산으로 모시고 제를 지내는 안당산과 겉당산 이외에도 마을입구의 바깥당산 그리고 석림촌의 신앙물인 당산바위가 있다.

 안당산은 마을 중앙부 골목의 중간쯤에 위치하고 있다. 신체는 없고 약 60~70㎝ 높이의 단위에 제물을 차리는 반석이 하나 놓여 있었으나 1970년대 초반 새마을사업으로 단을 헐어 버렸으며 당신은 겉당산과 합신하였다고 한다. 할머니당산이라고 전해지는 안당산은 일명 천룡당산으로 불리고 분적산쪽을 향해 제를 지낸다는 것으로 보아 신체는 없지만 신격은 분적산의 산신인 듯하다.

 할아버지당산이라 불리는 겉당산은 마을입구의 좌측에 위치한다. 도로면에서 120㎝정도의 축대위에 나무둘레가 약 340㎝인 거대한 당산나무(느티나무) 1주가 서있고, 당산나무 아래에는 높이 70㎝의 선바위가 있다. 느티나무에서 3~4m 떨어진 곳에는 느티나무 만큼 거재한 팽나무가 있었으나 오래전에 고사했다 하며 수년전 이곳에 은행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았다. 약 50평 정도의 이 구역이 신역인데 원래는 7자 정도의 담장이 둘러쳐져 있었으나 이를 헐고 콘크리트 축대를 낮게 둘렀으며 전체적으로 시멘트 포장을 하였다. 또 선바위 앞에는 자연석의 제단이 있었으나 이를 들어내고 시멘트 제단으로 바꾸었다. 제를 선바위에 모시는 것으로 보아 신체는 분명 선바위이다. 그러면 할아버지당산의 신격은 무엇인가. 해답은 화주를 정하는데서 나온다. 이 마을에서는 당산신이 아이를 안아서 준다는 속신이 전해져 화주는 결혼하였지만 아직 아이가 없는 30대 안팎의 젊은 부부를 선정했다고 한다. 이를 볼 때 신격은 삼신이 아닐까 한다.

 여기에서 안당산과 겉당산의 신체와 신격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명   칭

신  체

신  격

안당산

   할머니당산     철룡당산

분적산

산 신

겉당산

   할아버지당산

선바위

삼 신


 표를 보면 안당산과 겉당산의 명칭에 약간의 의문이 생긴다. 분적산의 산신을 모시는 천룡당산이 과연 할머니당산이 될 수 있는가. 겉당산의 신체는 선바위로 산신의 성격이 강하며 산신은 보통 삼신할머니로 불리어 여성으로 상징되는데 할아버지당산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또 제를 지내는 순서를 볼 때 할아버비당산부터 모시는 것이 통례인데 여기에서는 안당산부터 모신다고 하니 할머니당산부터 모시는 격이 된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보면 할머니, 할아버지당산의 명칭이 서로 바뀌었지 않았는가 하는 의심을 갖게 된다. 이 마을 가옥의 배치상태로 약간의 해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김, 박, 윤씨 등 이 마을의 종가들은 모두 천룡당산이 있는 가운데 골목의 아래쪽에 위치한다. 통념상 작은 댁은 종가댁의 윗쪽으로 분가하지 않음을 볼 때 성촌 후 일정기간 까지는 가운데 골목 아래쪽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고 천롱당산은 마을의 윗쪽에 위치하고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 가운데 골목의 윗쪽에 마을이 생기면서 천룡당산은 자연히 마을의 안쪽에 위치하게 되었으며, 명칭도 안당산이라 부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또 안과 밖이라는 위치개념의 내외의 성별 개념으로 와전되어 안당산이 할머니당산이 되고 겉당산이 할아버지당산이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한다. 이 보고서에서는 현지에서 부르는 명칭 그대로 사용하고자 한다.

 이 마을에는 또 하나 바깥당산이라는 당산이 있다. 광주대쪽에서 들어오면 다리를 건너기 전 마을의 첫들머리에 가옥 2채가 있는데 이곳을 동정지라 한다. 두 채의 가옥은 앞산을 등지고 북향으로 위치하며 그 옆에는 팽나무 1그루가 있다. 이 팽나무가 바깥당산이다. 바깥당산은 동정지의 가옥에서 음식을 장만해 제를 지내는데 제의에 대하여는 마을에서는 전혀 관여하지 않지만 마을의 굿패들이 농악만은 해준다고 한다. 근래에는 제를 모시지 않는다.

 마을의 윗쪽에는 당산바위라고 부르는 석림촌의 당산터가 있다. 마을에서 칠거재 쪽으로 약 1㎞ 지점에 지석묘로 보이는 바위 7개가 널려 있는데 이 중에서 2개의 바위가 신앙대상물이다. 이곳은 마을에서 제를 지내거나 농악을 치는 일이 없고 일체 관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부 마을 사람들은 명이 짧은 자녀들을 「당산바위」신에게 팔고 치성을 드리는 등 개인적인 신앙터로 이용되고 있다. 이 때는 과일 등 간단한 제물을 차려 치성을 드리는데 보통 정월 대보름이 지나서 한다고 하며 정월 이외의 달에는 하지 않는다. 가난했던 시절 배고픈 사람들이 이곳에 가면 음식을 푸짐히 먹었다고 한다.


3. 제의 준비


 1) 제관의 선정

 정월 초닷새경이 되면 임원(지도자, 고문 등), 반장, 명예여반장, 부녀회장, 통장, 새마을지도자 등이 참석한 마을 임시총회를 열어 제관을 선정한다.

 제관으로 화주와 축관을 선정한다. 화주 선정의 첫째 조건은 결혼은 했지만 아직 자녀가 없는 신혼부부이다. 신혼부부가 화주가 되어 제를 모시면 당산할아버지, 할머니가 빨리 자녀를 갖게 해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둘째는 몸이 깨끗하고 제를 모실 분이다. 신병이 없어 건강하고 산고가 들거나 집안에 상을 당하지 않아야 하며 목욕을 자주하여 신체를 깨끗이 하고 나쁜 짓을 하지 않으며 예의범절을 갖춘 사람이어야 한다. 즉 화주는 집안 환경, 몸과 마음이 정결한 사람으로 정한다. 옛날에는 책력과 사주를 보아 따지기도 하였으나 요즈음은 그렇지 않다.

 화주는 건화주와 진화주로 나뉘어지며 그 역할 분담 또한 뚜렷하다. 건화주는 제를 모시는 실질적인 제관으로 제주와 제물을 장만하고 샘을 푸는 일을 하며 진화주에 비해 훨씬 많은 정성을 드리고 또 많이 가린다. 진화주는 건화주를 도우는 입장이며 건화주보다 활동적으로 궂은 일을 맡는다. 즉 건화주를 도와 샘을 푸고 금줄치는 일, 화목을 장만하는 일, 겉당산에 드릴 돼지머리를 삶고 마을민들이 마실 술을 장만하는 일 등을 맡는다.

 축관은 화주와 마찬가지로 깨끗한 사람이어야 하며 축문이 한문으로 되어 있는 관계로 한문은 읽을 수 있는 학문이 있는 사람을 선정한다. 근래에는 한문에 능하지 못하여 한글로 토를 달아 사용한다.

 2) 치 제

 일단 제관으로 선정되면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준비를 한다. 옛날에는 초열흘부터 제계하여 삼우제가 끝나는 16일까지 7일 동안을 가렸다. 되도록 외출을 삼가고 외부인과 대화도 절제하며 부정한 곳(상가, 산고든 집)은 절대 출입을 금한다. 부부생활은 물론 술 담배도 금한다. 육고기나 비린 해물은 일체 먹지 않고 김, 장, 싱건지, 나물 등으로 한다. 배추김치도 고춧가루가 들어 있기 때문에 먹지 않는다. 제관뿐만 아니라 마을민들도 조심하는데 행여 자신이 알지 못하는 부정으로 제에 누를 끼칠까 봐 제를 모실 분들과는 대화를 절제한다. 잿물 빨래를 하지 않으며, 문에 구멍이 나도 당산제 지내고 나서 바르며, 집안의 흙일을 하지 않는다. 특히 제에 참가하는 마을의 지도자 급인 통장, 새마을 임원과 농악대는 절대 조심하며 개고기 등 부정한 음식도 먹지 않는다.

 열하루가 되면 건화주, 진화주가 함께 샘물을 퍼내고 청소를 한다. 청소한 후 금줄을 치고 깨끗한 물이 고이면 화주들은 우선 제주를 담글 물과 열사흘까지 4일간 목욕과 일상생활에 사용할 물을 큰독에 길러 저장한다. 물을 다 길르면 금줄을 벗기는데 화주들이 물을 길러 가기 전까지는 마을의 누구도 물을 길러 갈 수 없다. 이 때부터 화주들은 본격적으로 제계하는데 화장실에는 신을 갈아 신고 가야 하며 대변 후에는 필히 찬물로 목욕을 해야 하고 소변 후에는 손을 씻어야 한다. 찬물로 목욕을 하는 것이 당산제를 준비하는 과정 중 가장 힘든 일이다. 그렇기에 화주로 선정이 되면 되도록 먹지 않는다고 한다. 4일간을 이렇게 해야하기 때문에 몸이 많이 축나고 힘이 들어 화주되기를 회피한다고 한다. 어느 제보자의 말로는 목욕 후 머리가 꽁꽁 얼어서 낭자를 제대로 틀지 못하고 부엌에서 제물을 장만하노라면 얼음이 녹아 온몸이 젖을 때도 있었다고 한다.

 만일 정초부터 당산제 지내는 동안 마을에 상을 당하면 곤란을 겪게 된다. 상가에 간 사람은 당산제에 참가하지 못하며 제를 모실 분들이 상가에 가지 못하기 때문에 마을사람들의 충분한 협조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3) 제 비

 제비는 인구전과 쌀을 추렴해 충당한다. 인구전은 누구나 일정한 액수로 거출을 하며 강제성은 없으나 가난하다고 내지 않는 경우는 없다. 설령 제에 참석하지 않더라고 인구전은 냄으로서 당산제에 참가하는 것이 되며, 그렇게 함으로서 당신에게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며 객지에 나가 있는 자식의 몫도, 남이 알지 못하는 뱃속의 태아까지도 스스로 계산해서 내어 놓는다.

 인구전과 함께 걷는 쌀은 빈부에 따라 차이가 많다. 가난한 사람은 내지 않으며 살림의 정도에 따라 자의반 타의반으로 추렴이 된다. 이 쌀은 밥쌀 3되, 떡쌀 3되, 술쌀 3되, 총 9되를 제물 장만용으로 미리 챙겨두고 나머지는 필요물품을 구입하는데 보탠다. 또 자식을 공들이기 위해 제구나 굿물 등에 이름을 써서 기증하기도 한다. 금년에는 영기, 쌀, 소주, 맥주, 현금, 화목 등이 희사되었다.

 4) 제물의 장만

 12일에는 제물을 장만하는 일이 논의되며 열나흗날 제구와 음식 등을 구입하기 위해 장을 보러 간다. 주로 광주 양동시장을 이용하며 마을의 책임자, 건화주, 진화주가 함께 가는데 가는 도중 아는 사람을 만나도 이야기하지 않으며 나쁜 일은 되도록 보려하지 않는다, 대개 구입할 품목들을 적어서 가져가며 건화주는 실제로 물건을 사지 않고 일정한 장소에 서있으면 마을 책임자와 진화주가 물건을 사온다. 장을 본 후 돌아올 때 건화주가 모든 제물, 제구를 지고 오며, 진화주는 돼지머리만 안고 온다. 이 마을에서는 제물을 사오는 동안 중간에서 내려 놓으면 안된다는 속신이 있어 양동시장에ㅓ서 마을까지 무거운 제물을 지고 단번에 와야하므로 매우 힘들다고 한다.

 장에서는 제에 소요되는 기물 즉, 시루, 시루뚜껑, 사푼데기, 물보새기, 접시, 깍쟁이, 석작, 배석, 옹구술병, 백지, 양초, 향, 향로 등 제구와 과일 (옛날에는 과일을 놓지 않았다), 참기름, 소금, 양념류, 부족한 굿물 등 일체를 새로이 구입한다. 장을 보아오면 안주인은 웃목에 배석을 깔고 가지런히 정리해 둔다.

 제물 준비가 다 되었으면 화주들은 우물을 다시 한번 푼다. 열하룻날 우물울 퍼 제주를 담고 그 동안의 제계를 했으나 이때쯤이면 길러 놓은 물이 거의 소요되었을 뿐만 아니라 깨끗한 물로 제물을 장만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을 푼 후 금줄을 치고 화주들이 물을 길러간 후  금줄을 벗기고 나면 마을 사람들이 물을 길러가는 것은 마찬가지다.

 음식을 장만하는 데는 굉장한 정성을 들인다. 수건으로 입을 막고 부부간에도 말을 하지 않는다. 고춧가루는 쓰지 않고 소금과 장으로 간을 하고 제물을 입으로 간을 보지 못한다. 절구통에 떡쌀을 찧을 때는 쌀이 튀지 않도록 조심조심 찧는다. 행여 쌀이 튀어 땅에 떨어지면 그대로 두지 않고 주워서 장독 위에 갖다 올려 놓는다. 이 쌀은 이상하게도 새나 닭도 주워 먹지 않는다고 한다. 쌀뜨물도 함부로 버리지 않고 장꼬방에 살짝이 붓는다. 담가 놓은 제주는 아랫목에 이불을 덮어 놓으며 술독쪽으로는 엉덩이를 두르고 자지 않는다. 또 술이 빨리 익지 않으면 내외간에 술독을 안고 잘만큼 정성을 들인다.

모든 제물은 안당산, 겉당산 두 벌을 똑같이 장만한다. 다른 점은 돼지머리는 겉당산용 하나만 준비한다는 것이다. 떡을 할 때, 메를 담을 때, 나물을 뜰 때 등 제물의 준비는 안당산부터 한다. 제물은 만들어 지는대로 웃목에 마른 음식과 함께 가지런히 놓아 두었다가 석작에 넣어 운반할 준비를 한다.

 5) 금줄ㆍ금토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고 모든 정성을 다해 제를 모시는 신성한 큰제사에 부정과 잡귀가 침범하면 큰 일이다. 금줄과 황토는 이러한 것들을 방지한다. 금줄은 열나흗날 화주댁, 당산, 샘에 친다. 금줄은 왼새끼에 백지편을 중간 중간 꽂아 만든다. 당산의 금줄은 신역의 둘레에 둘러치고 마을 입구의 길을 가로 질러 치는데 길 저편에 고정시킨 4~5m 높이의 생대와 당산나무를 연결하여 금줄을 친다. 대는 깨끗한 집의 대밭에서 베어오며 옆가지를 치고 윗부분만 남겨 둔다. 일단 금줄을 치면 당산에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며 부정한 사람은 금줄밑을 통과하지 못한다. 칠거재를 통해 보름 대목장을 보러 다니는 화순사람들은 특히 금줄 밑을 통과하지 않으려 산비탈을 이용했다 한다.

 금토는 화주집은 치제를 시작하는 열하룻날, 당산과 샘에는 당일날 놓는다. 화주집에는 당산에서부터 시작해 화주집의 문앞까지 황토를 연결한다. 특히 당일날은 각 가정에서도 사립문 앞에 황토를 놓는데 집집마다 각자 자기집에 소요될 황토를 파오면서 당산에 한 줌식 덜어 놓고 오므로 따로 준비할 필요는 없다. 또한 각 가정에서는 황토를 파올 때 솔가지를 꺾어다 헌식터 주위에 꽂고 자기집 초가지붕 끝에 꽂아 놓는데 이렇게 하면 싸래기(벌레)가 없어진다고 믿는다. 올해에는 각 가정에서 황토나 솔가지를 하지 않아 화주가 황토 한짐을 져다 부어 놓았다.

 당일날은 마을민 모두 당산제에 임하는 준비를 하는데 화주는 당일날 당산나무 주변을 깨끗이 청소하며 주민들도 목욕을 하고 집안팎을 청소한다.


 4. 제의 진행


 열나흗날 오후가 되면 농악 소리가 난다. 이는 마을의 젊은이들이 농악도 배우고, 농악기 점검도 겸하여 목청(농악기 보관소, 마을 회관)에 모여 서투른 농악을 하는 것이다. 해가 기울면 어린이들은 불깡통을 들고 집밖으로 나가고 겉당산에 장작불도 피운다. 농악대는 당산에 모여 농악을 한다.

 당산제는 안당산, 겉당산 순으로 모신다. 밤 11시경이 되면 농악대는 건화주 집으로 향한다. 건화주는 제를 모실 준비를 해놓고 기다리고 있다가 농악대가 오면 제물운반용 들것에 싣고 안당산으로 향한다. 들것은 당일날 만드는데 깨끗한 집의 대나무로 사다리 처럼 만들어 초석을 덮는다. 초석은 제모실 때 배석으로 사용한다. 당산에 오르는 순서는 대로 만든 초롱을 필두로 명기 2개, 제물, 제관, 농악대, 마을민의 순이다.

 안당산에 도착하면 진설 후 제를 올리는데 유교식으로 한다. 맨 앞줄에 과일(조, 율, 시, 이순서)을 놓고, 잔대 2개, 메 2그릇 그리고 왼쪽에 불을 켠 떡시루를 놓는다. 제상 좌우에는 초롱이 한 개씩 서 있다. 진설을 할 때는 집사가 돕는데 집사는 특별히 정하는 것이 아니고 예에 밝은 사람을 현장에서 정한다. 진설이 끝나면 12시경이 되는데 이 때부터 제를 지낸다. 먼저 향불에 잔대를 가신 다음 초헌, 아헌, 독축, 종헌의 순서로 제를 지낸다. 제를 지낼 때는 줄곧 농악을 치는데 독축할때만 잠시 멈춘다. 소지를 올린 후 헌식을 하는데 건화주 집으로 가져갈 과일, 술, 떡을 제외한 메, 나물 등 모든 제물을 백지에 싸서 낮에 준비한 황토흙에 헌식한다. 이 헌식터는 짐승(특히 개)이 파면 뒤가 맑고 좋으며, 파지 않으면 뒤가 좋지 않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대개는 개가 먹기 위해서 판다고 한다.


    백설기떡       메        메        돼지머리

             잔대              잔대

                    무우나물

    대추    밤       곶감     배      사과    유과

〈노대마을 진설도〉


 안당산의 제가 끝나면 다시 건화주 집으로 가서 겉당산의 제물을 들고 나온다. 시간은 15일 새벽 1시경이 된다. 진설이나 제의 진행은 안당산과 같으나 겉당산에서는 돼지머리가 추가되며, 제가 끝난 다음 겉당산의 제물은 제장에서 모두 음복을 하는 점이 다를 뿐이다. 겉당산에서는 제를 지내는 동안 자신니 부정함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제장에 나온다. 여자들은 금줄을 쳐 놓은 신역에 오르지는 않지만 골목에서 지켜 볼 수 있다. 제가 끝나면 음복을 하는데 제일 중요한 것은 떡을 나누는 일이다. 당산제에 쓰인 떡은 겨울에 감기가 걸리지 않고 여름에 하지거리도 걸리지 않는 무병의 신약으로 믿어 이 떡을 먹지 않으면 큰 일이나 알 것처럼 생각한다. 쌀 3되 분량의 떡을 100에 가깝게 나눈 것이지만 자는 아이를 깨워 먹일 만큼 극성스럽다고 한다. 겉당산에서 음복을 한 후 농악대를 필두로 마을의 유지들은 화주집으로 가서 마당밟이를 하고 결산을 한다. 화주집을 나와 원식수와 샘에 샘굿을 치고 나면 날이 새는데 각자 헤어져 가정으로 돌아간다.

 제를 마치고 나면 나발을 불어 신호를 했는데 요즈음은 앰프로 한다. 이 때에 비로소 각 가정에서는 오곡밥으로 차례상을 차린다. 비린내나는 음식은 일체 차리지 않으며 삼실과도 놓지 않으나 가정에 따라서 놓는 곳도 있다. 차례를 마치면 가햇불을 놓는다. 고춧대나 가짓대를 안쪽에 놓고 생대를 위에 놓아 불을 지르면 생대가 튀는 소리에 잡귀가 도망가 집안이 평안하다고 한다. 또 「가랫불 넘자」하면서 자기 나이대로 가랫불을 뛰어 넘으면 무병하고, 병충해가 없어 농사가 잘 된다고 한다.

 당산제를 지낸 이틀 후인 17일 자시에 건화주 내외가 소찬과 메 등 간단한 제물을 준비해 겉당산에 삼우제를 지내고 돌아온다.

 금년 겉당산의 제사는 10시 30분에 시작하여 11시에 종료하고 음복하였다.


 5. 당신의 영험


 당신의 영험을 말해주는 사례들을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 도둑이 들었는데 밤내 당산주위만 돌았다.

 ◦ 당산제 모시는 날 당신을 믿지 않는 여인이 엉덩이로 절을 해서 지골을 맞아 죽었다.

 ◦ 일제때(대동아 전쟁) 당산제를 못 모시게 해서 당산나무를 외지인에게 팔았으나 구매자가 당산나무를 베다가 사람이 죽었다. - 당신이 노해서 벌을 주었다고 생각하며 이때부터 더욱 당산에 대한 관심이 대단해졌다고 한다.

 ◦ 염씨라는 분이 화주를 할 때 말을 하고 다녀 벙어리가 되어 돌아가셨다.

 ◦ 진화주 맡았을 때 일이다. 질부가 아퍼서 초 아흐렛날 굿을 했는데 바깥양반이 굿 끝머리에 허수아비를 태웠다. 10일 샘을 푸러 갔는데 허리가 몹시 아팠다. 그래서 고통을 겪던중 13일날 꿈에 현몽을 했는데 이웃의 할아버지 할머니다 와서 「괴씸한 것들이 어른 모셔놓고 횃대에 피바지를 걸어 놓았다」 하면서 참기름을 내려 음식에 뿌리고 다녔다. 다음날(14일) 마당에 밥을 차려놓고 무조건 당할아버지, 할머니께 빌었더니 바깥양반의 허리가 깨끗이 나았다.

 이렇게 영험이 있는 신이 깃든 당산나무 아래에서는 부정한 짓을 하지 못하며 어린이들이 나무위에 올라가는 일 또한 하지 못하게 한다.



4. 진월동 진제 당산제


                                                   조사일시 : 1993. 9. 4

                                                   조 사 자 : 정 기 진

                                                   조사방법 : 현지면담조사 (현재시행)

                                                   제 보 자 : 김두성 (72) : 축    관

                                                              한옥교 (68) : 제    관

                                                              안판영 (71) : 화주경험


1. 마을 개관


 진제마을은 광주의 남쪽에 위치하며 광주 목포간 도로변이라 교통이 매우 좋다. 봉선동을 「U」자형으로 싸고 있는 산맥의 남서쪽 자락에 자리하며 마을앞으로 광주-화순간  도로로 연결되는 소로가 있다. 지금은 이 도로를 확장하고 있으며 마을앞쪽으로 광주 제2순환도로가 한창 공사중이다.

 이 마을은 조선후기에는 광주군 효우동면이었다가 1914년에 광주군 효천면에 속했는데 1935년에는 광주읍이 광주부로 승격되어 독립하면서 광주군은 광산군으로 개칭되어 광산군효지면 관할이 되었다. 1955년 7월 1일 광주시역 확장에 따라 광주시 진월출장소 관할이 되었고 1957년 12월 2일 광주시 효덕동에 속하게 되었다. 1986년 11월 1일 광주직할시 서구 효덕동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근래에는 주위에 택지 개발과 도시형 주택이 건설되어 주변의 지형이나 생업의 변천이 심하다. 이 마을은 도시와 접해 있는 자연부락으로 정세추이에 민감하여 젖소의 보급이 한창이던 1975~1985년에는 낙농단지가 조성되었으나 후에 낙농업이 쇠퇴하자 지금은 원예, 화훼 등이 주류이나 최근에는 서비스업으로 전업이 가속화되고 있다.

 광산노씨가 처음 들어와 성촌했다고 전해지나 확실한 자료는 없고 밀양박씨, 청주한씨 등이 거대한 집촌을 이루고 있는 혼성촌이다. 마을에는 위친계가 있는데 모든 세대주(65세대)가 직접 참여하고 있으며 애경사가 있을 때는 전원 출석하여 도움을 주고 40여년 전부터 마을회관에서 합동세배를 하고 경로잔치를 열고 있다. 노인회에서는 방학 때 효교실을 열어 어린학생들에게 효정신을 심어주고 있다.


 2. 당산제의 현황과 신체


 1) 당산제의 현황

 이 마을의 당산제는 현재 노인회에서 주관하여 시행되고 있다. 제는 정월 14일 밤 9시에 시작하여 11시까지 모신다. 마을의 안녕, 농사의 풍년, 재앙방지, 대동화목을 기원하며 모셔오고 있다.

 2) 당산과 신체

 진제마을의 당산은 130년된 느티나무를 할머니당산으로 관념한다. 이곳은 마을의 뒤쪽 구릉이었으나 지금은 마을의 중앙이 되었다. 당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주변을 시멘트로 60㎝ 높게 쌓아서 그곳을 제단으로 사용한다. 지금의 당산 서쪽에 수호신이라고 하는 할머니당산 흙무덤이 있었으나 파헤쳐졌다. 옛날에 할머니당산 흙무덤을 파버린 사람은 할머니의 노여움을 사서 죽었다 한다. 그러므로 그 옆에 있던 입석을 지금의 마을회관 앞에 옮기고 그 곳에 당산제를 모셔 왔으나 1992년부터 지금의 당산목으로 신체를 바꾸었다.


 3. 제의 준비


 1) 제관의 선정

 제관은 제일의 일주일전에 화주 1명, 헌관 3명, 축관 1명, 집사 1명 등 모두 6명을 선정한다. 제관은 초상집에 가지 않는 사람으로 하고 나이가 아홉수인 사람을 제외하고 나머지 사람들을 생기복덕을 보아가며 마을회의를 거쳐 뽑는다. 제는 정월 보름(14일밤)에 모신다.

 1993년에는 화주겸 초헌관에 전창병(67세), 아헌관에 한옥교, 종헌관에 노규봉, 축관에 고흥석씨가 하셨다.

 2) 치 제

 화주나 제관에 뽑히면 부정을 피하고 많은 것을 금기했다. 특히 화주는 제일까지 부인과 동침을 못하여 당샘을 품어 깨끗이 한 다음 그 물로 매일 목욕하고 세탁한 옷으로 갈아 입는다. 깨끗하지 못하면 본인 뿐만아니라 마을 전체가 해를 본다고 믿기 때문이다.

 마을앞의 논에 샘이 있어 이를 당샘이라 했으나 지금은 폐쇄되고 없다.

 3) 제 비

 옛날에는 집집마다 쌀이나 돈으로 걷는 호구전이었고, 또 3일굿이라고 하는 걸궁을 해서 마을 자금을 마련하여 충당했는데 지금은 하지 않는다. 근래에는 희사금과 행정당국에서 보조하는 돈으로 충당하는데 1993년에는 10만원 정도 들었다.

 제물은 돼지머리, 대추, 밤, 곶감, 사과, 배, 귤, 도라지, 미역 등을 약간씩만 준비를 한다. 제기는 매년 새로 구입하여 제후에는 화주가 가져갔으나 이는 마을사람들이 낭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은 보관해 두었다가 다시 사용한다.

 4) 제물의 장만

 제물은 제일 오전에 시장에 가서 구입하는데 노인회에서 주관하며 통장이 동행한다. 이는 비용을 마을돈으로 충당하기 때문이다. 장을 봐온 짐은 화주집에 가져다 주며 화주집에서 장만한다. 음식의 준비는 마을앞 들에 있는 당샘에서 물을 길러다 준비를 하며 메도 이 물로 짓는다. 음식을 만들기전에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 입는다. 나물 등 음식에는 소금으로 간만하며 고추나 마늘 등의 양념은 하지 않고, 음식의 맛을 보지 않는다.

 5) 금줄ㆍ금토

 금줄과 금토는 화주가 깨끗한 마을사람과 같이 14일 아침에 하여 부정의 출입을 금한다. 금줄은 당산주변을 깨끗이 청소한 후에 치며, 화주집 앞, 당산으로 통하는 길도 친다.


 4. 제의 진행


 진제마을의 당산제는 14일 저녁 9시에 시작하여 11시쯤에 끝이 난다. 저녁이 되면 8시부터 굿을 치면서 마을의 골목을 다니는데 이것으로 제일을 알리는 것을 대신한다. 제관은 모두 한복에 두루마기를 입고 유건을 쓴다. 남녀노소 모두 구경을 할 수 있으나 여자는 참여를 못한다.

 9시쯤에는 화주집으로 가서 준비된 제물을 나누어 들고 당산으로 향한다.


당   산

                  정화수                      메

    돼지머리                                            시루 

               술              접시              생미역

 

              고사리          도라지             뜸부기

              나  물          나  물             나  물

                        귤             고막

      대추         밤         곶감            사과       배

〈진설도〉


 제차는 분향-강신-초헌-독축-아헌-종헌-사신-소지-음복-헌식의 순이다. 제중에 모닥불을 피우는데 이를 화톳불이라 하며 이는 추위와 조명 등의 효과가 있다.

 화목은 약간씩 걷우었으나 근대에는 구입하였고 요즈음은 제가 간소화되어 간단히 끝이 나기 때문에 몇 개씩 가져와서 충당한다.

 소지와 음복을 제관들이 간단히 하고 헌식을 한다. 헌식은 진설한 제물을 조금씩 덜어 백지로 싸서 당산목 옆에 땅을 파고 묻어준다. 헌식까지 끝나면 어른들은 돼지머리를 안주삼아 음복을 하고 부녀자와 어린이들은 백설기 떡을 복 받는다 하여 얻어 먹는다. 제가 끝나면 굿치면서 날이 새도록 마을을 돌면서 노는데 보름날 저녁에 잠을 자면 안된다고 전해 내려오기 때문이다. 요즈음은 굿이 약해져 자정쯤이면 끝나고 경로당에서 덕담을 나누면서 보낸다.

 제를 모신 후 삼일이 되는 날부터 샘굿 당산굿을 치고 집집마다 다니면서 걸궁을 치는데 이때 음식을 대접받고 돈이나 곡식은 걷우어 마을자금으로 활용했으며 일부는 다음해의 당산제 비용을 충당하기도 했다.

 정월은 노는 때라하여 정월 한 달을 놀고 2월 초하루에 마을회의를 하여 제의 결산을 하고 품삯을 정하는 등 마을 대소사를 논의한다.


5. 영 험


◦ 제보자 한옥교씨에 따르면 지금부터 약 30년 전에 당산제를 안모셨는데 그 해에 본인은 다리를 다쳤으며 부인은 몸져 누웠고 마을의 젊은이가 2명이나 죽는 등 우환이 잦아 다시 모시게 되었다 한다.

◦ 지금은 큰 예배당이 있는 등 여러 가지 악조건이 있지만 옆에서 못모시게 하는 발언이나 압력 등이 전혀 없고 설령 있다 하더라고 제만은 꼭 모신다는 각오가 대단하였다.


5. 임암동 임정 벅수제


                                                   조사일시 : 1993. 9. 4.

                                                   조 사 자 : 정 기 진

                                                   조사방법 : 현지면담조사 (현재시행)

                                                   제 보 자 : 김영만 (63)

                                                              정남석 (35) : 반장


1. 마을 개관


 임정마을은 해발 100m 내외의 낮은 산의 북동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어 가옥은 북동쪽을 향하며 83호에 인구 578명으로 천안김씨, 광산김씨가 거주하며 주로 농업과 노동으로 생활한다. 임정마을은 지형이 지네 형국이라 지세가 세어서 벅수를 세웠다 하며 마을이 생긴이래 한번도 제를 지내지 않는 해가 없었다 한다.


 2. 당산제의 현황과 신체

 1) 당산의 명칭

 임정마을의 벅수제는 장승제라고도 하며 매년 모시는데 마을민의 질병방지 농사의 풍년 등을 기원한다. 마을민들은 「벅수할아버지 제를 모신다」고 한다. 몇해 못모시다가 마을의 단결을 도모하기 위하여 1987년 지금의 벅수를 세우면서 부활되었다.

 2) 당산과 신체

 임정마을의 벅수는 마을의 어귀에 2기가 있는데 길의 양쪽에 10m의 간격을 두고 있는데 서로 마주보고 있다. 지금의 광주시내쪽으로 통행이 많으나 과거에는 대촌쪽으로 왕래가 많았으므로 벅수있는 곳이 마을의 입구가 되었다.

 영감벅수는 마을쪽 즉 도로의 남쪽에 있으며 크기는 240㎝, 머리둘레 110㎝, 몸둘레 90㎝ 몸의 전면에 「천하대장군」이라 양각되어 있고 나무의 뿌리가 머리가 되어 뿔이 난 것처럼 보인다. 이것을 장발이라고도 하며 5행(금, 목, 수, 화, 토)을 의미한다고 한다.

 할멈벅수의 크기는 195㎝, 머리둘레 100㎝, 몸둘레 80㎝의 전면에 「지하여장군」이라 양각되어 있고 뿌리쪽이 머리이다. 뿌리는 잘 다듬어 영감벅수보다 더 얌전해 보인다. 위의 벅수를 이 마을 김영찬씨가 1987년에 소나무로 만들었는데 전에 있던 것을 보고 만들었다.

 과거에는 벅수를 가죽나무로 만들어 오래 보존되었으나 소나무는 내구성이 낮아 1993년 조사시에 밑둥이 썩어 넘어질 위기에 있었다.


3. 제의 준비


 1) 제관의 선정

 정월 초순에 마을회의를 열어 제관의 선정과 제일을 결정한다. 화주는 깨끗하고 여자 혼자 계신 분으로 나이가 많은 사람을 선정한다. 어린아이가 없고 부부관계 등 부정의 소지가 없기 때문이다. 제일은 매년 상황을 봐가며 하므로 일정하지 않다. 1993넌에는 정월 15일 낮에 모셨는데 화주는 전복례(여 70세), 전경순(여), 제관은 박병천(남 60세)씨가 선정되었다.

 2) 치 제

 제관은 선정된 날부터 제일까지는 매일 목욕을 하고 산고든 집, 초상 집 등 부정한 곳은 가지 않으며 개고기 등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는다. 특히 화주는 매일 저녁 찬물로 목욕을 하므로 어려움이 많아 화주를 안하려고 회피한다. 근래에는 간소화 되어 형식만 남아 있다.

 3) 제 비

 제비는 호당 거출하는데 돈이나 쌀을 내놓아 이것으로 제물을 구입한다. 근래에는 마을돈으로 하는데 마을돈은 마을사람들이 금줄에 끼워 놓는 희사금이다. 벅수제 모실 때 마을사람들이 벅수에 걸려 있는 금줄에 돈을 끼워 놓고 각자의 소원을 빈다. 제기는 새로 구입하지 않고 화주집에서 가져다 쓰며 사용 후 화주가 다시 가져간다. 이와같은 것도 간소화된 결과이다.

 4) 제물의 장만

 제물의 장만은 화주집에서 하는데 적은 량을 준비하므로 큰 어려움은 없으며 다만 정결을 유지해야 하므로 정성을 다한다. 제물은 돼지머리, 삼채, 사과, 배, 시루, 명태, 막걸리 등을 준비한다.

 5) 금줄ㆍ금토

 임정마을의 벅수제에서는 벅수에만 금줄을 감아 놓는 것으로 대신한다.


4. 제의 진행


 제의 시간이 가까워 지면 벅수주변과 마을 앞길에서 굿을 쳐서 제의 시작을 알리고 이무렵 화주댁에서는 제물을 가지고 나와 진설한다. 제는 영감벅수에서 먼저하고 할멈벅수로 제상을 옮겨서 모시는데 약 30분 정도 진행된다. 시루를 2개하여 하나는 진설하고 나머지는 화주집에 참기름 불을 켜 놓는다. 제를 모시는 시간은 과거에는 해가 질무렵에 모셨으나 노인들이 주관해서 모시므로 1993년은 정월 15일 낮 12시에 모셨다. 제관의 복장은 평상복을 깨끗이 세탁하여 입는다. 제를 모실 때 벅수에 금줄을 감아 놓고 하는데 이때 마을사람들이 희사를 한다. 이 금줄에 돈을 끼워 놓는 것을 마을사람들은 「복돈」이라 한다. 헌식은 제물을 약간씩 덜어 짚을 놓고 벅수 부근에 놓아 두고 명태는 벅수에 묶어 놓는다.

 제가 끝나면 술과 음식을 동네사람들이 나누어 먹고 샘에 가서 굿을 친다. 임정마을의 벅수는 1970년대 초에 젊은 사람들이 「미신타파」라 하면서 땅에 묻어버렸던 경우가 있었는데 후에 다시 세웠다.

 옛날에는 제를 지낼 때 마을앞을 지나지 못했으며 혹 지날 때는 통행세를 내야 했다. 보름에서 2월 1일까지 농악놀이, 줄다리기 등을 했었으나 지금은 거의 사라졌다.


5. 영 험


 ◦ 벅수가 썩어서 도둑이 마을에 자주 들어 왔었으나 다시 만들어 세우니 도둑이 들어오지 않았다.

 ◦ 소 도둑이 들어 끌고가다 벅수 근처에 오면 도망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있었다 한다.

 ◦ 옛날에는 괴질병인 염병이나 호열자가 들어 왔으나 영감벅수 할멈벅수의 도움으로 마을에서는 한사람도 희생되지 않았다.


6. 농성동 연화 당산제


                                                   조사일시 : 1993. 10. 15

                                                   조 사 자 : 정 기 진

                                                   조사방법 : 현지면담조사 (과거시행)

                                                              노행규 (75)

                                                              정병선 (77)

                                                              윤승임 (74)


 농성동 연화마을은 돌고개의 북쪽으로 뻗은 능선의 서쪽 사면에 위치한다. 현재는 광주서부경찰서에서 광천교로 가는 도로변에 해당하는데 그 중간지점의 남쪽에 연화노인당이 있다. 이 노인당건물은 당산나무 아래에 있던 우산각건물을 그대로 놓아둔 채로 벽과 방을 만들어 노인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마을의 당산은 이 노인당 담에 있던 느티나무였으나 1991년에 일부가 부러졌고 1993년에 마지막 부러지고 지금은 노인당 담장에 밑둥만 남아 있다.

 농성동 연화마을의 당산제 유래를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제보해 주신 분들 역시 그곳에서 거주하신지 20여년 정도 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분들의 증언은 2년전까지만 해도 연화마을 태생인 노인이 계셨는데 작고하시고 지금은 아무도 없다고 한다. 제보자들이 과거에 연화마을에 대하여 이야기를 들었던 것들 뿐이다.

 제보자에 의하면 연화산(짓봉산 : 서부경찰서 서북쪽 능선)의 서남쪽 기슭은 1960년대부터 70년대에는 마을이 형성되어 있지 않았으며 이곳 주변은 모두 논밭이었다 한다. 들가운데 당산나무가 있었고 그 밑에 우산각이 있었는데 지금의 연화노인당이다.

그러므로 이곳의 당산제는 어느 마을에서 모셨는지 분명하지 못하다.


다. 북 구

1. 충효동 충효 당산제


                                                   조사일시 : 1993. 4. 15

                                                   조 사 자 : 최강열, 이순영

                                                   조사방법 : 현지면담조사 (현재시행)

                                                   제 보 자 : 김응규 (78)


 1. 마을 개관


 이 마을은 본래 광주군 석저면 지역으로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지형이 성안처럼 되어 있어 ‘성안’ 또는 ‘성내’마을로 불리다가 조선 22대 정조때 김덕령장군이 태어나 자란 곳이라 하여 충효리라는 마을이름이 하사되어 지금껏 사용되고 있다. 마을의 성촌시기는 450여년 전이며 현재 60여호 250여 주민이 농업에 종사하며 살고 있다. 대부분의 주민이 충장공의 후손들인 광산김씨여서 마을입구의 충장공 비각과 취가정 (충장공이 젊은 시절 술을 마시며 시를 읊었던 곳에 후손인 김만식이 세웠다 함) 등 충장공과 관련된 유적도 잘 관리되고 있다. 그리고 수령이 500여년 된 왕버들 나무(시지정 기념물 16호) 3그루가 충효동 동사무소 길 건너편에 자리잡고 있다. 예전에는 풍수지리상 마을의 수세가 빠진다 하여 입석으로 수구막이를 세워 놓았으나 광주댐이 생기면서 수몰되었다.


2. 당산제의 현황과 신체


 1) 당산제의 현황

 충효마을이 생긴 이래 한 차례도 거르지 않고 정월 보름에 당산제를 모셔왔으나, 많은 주민들이 광주시내로 이주하였고 젊은이들 마저 미신이라 하여 참여하기를 꺼려해 근래에는 구색만 갖추는 정도로 모시고 있다. 당산제를 지내는 목적은 오곡의 풍년과 마을사람들을 액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인데 수호신인 당산이 영험해서인지 6.25 때에도 마을에 큰 피해 없이 넘겼다고 한다.


 2) 당산과 신체

 충효마을에서는 매년 할아버지당산과 할머니당산에 당산제를 모시고 있다. 할아버지당산은 마을입구 모정곁에 있는 수령 500년 정도의 귀목이었으나 오래전 벼락을 맞은 후 새로 가지를 친것이라고 한다. 할머니당산은 광주댐 상류의 서쪽 논가에 무덤처럼 흙을 돋우어 세운 입석과 그 주위의 팽나무 3그루이다.


3. 제의 준비


 1) 제관의 선정

 정월 초사흗날부터 초닷새사이에 열리는 마을회의에서 제를 지내기로 결정하고 제관 등 집례자들을 뽑는다. 제관은 그 해의 운세를 점쳐보고 생기복덕이 맞는 사람 중 연장자를 우선하여 제관 3인, 축관 1인, 화주 1인, 집사 4인 등으로 구성하는데 금년에는 제관을 선출하지 않고 김대순(67)씨가 축관겸 헌관으로, 김종율(47)씨가 화주를 맡았다.

 2) 치 제

 당산제를 주관하게 될 제관들이 선정되면 이들은 이때부터 제를 모시기까지 금기사항을 지텨야 하는데 특히 화주는 금기를 철저히 지켜야 한다. 궂은 곳을 다니지 않으며, 부부가 잠자리를 같이해서도 안되며, 대ㆍ소변을 보면 찬물로 목욕을 해야하기 때문에 심지어 먹는 음식을 줄여서 먹기도 하였다. 그런 까닭에 요즈음은 화주를 맡으려는 주민이 없다.

 3) 제 비

 제의 비용은 마을 공동답이 있어 거기서 수확된 쌀로 충당했으나, 1957년 충효리가 광주시로 편입되면서 공동답을 팔아 마을 공익사업ㅇ에 사용한 후부터는「지붕머리돈」이라 하여 한 가정에 한되씩 쌀을 거두어 사용하였다. 이때에도 상을 당했거나 산고가 든 집은 부정하다고 제외시켰다. 6년전에 당산제를 지낸 후 마당밟이로 거둔 성금을 모아두었다 두마지기의 동답은 다시 마련하여 당산제의 비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4) 제물의 장만

 13일이 되면 화주와 집사가 목욕재계를 하고 양동시장에 나가 배석, 시루, 그릇 등 제기와 미역, 김, 가조기, 삼실과 등 제물을 일괄 구입하는데 값은 절대로 깎지 않고 지불한다. 제사에 쓰일 돼지머리는 동네에서 돼지 한 마리를 잡아 사용하며 나머지 부분은 당산제를 지낸 후 삼우날 마을사람들이 화주집에 모여 나누어 먹는다.

 14일에는 마을사람들이 각 가정과 마을 안팎을 깨끗이 청소하며 화주집에서는 제사음식을 준비한다. 당산제를 정갈하게 모시기 위해 제물장만에 사용되는 물은 전날 저녁 동네 청년들이 마을공동우물을 모두 퍼내고 깨끗이 청소하고 난 후 새로 솟아 오른 물을 14일 첫 새벽에 길어다 쓴다. 마을사람들도 조상들에게 올릴 제사음식을 마련하기 위해 화주가 물을 길은 후 서로 먼저 퍼가기 위해 일찍부터 줄을 서서 기다린다고 한다. 화주가 제물을 준비할 때는 머리에 흰수건을 쓰고 입은 마스크로 가리며 일체 간을 안하고 맛도 보지 않는다. 또 상에 올릴 떡만큼은 동답에서 수확한 쌀로 만든다.

 5) 금줄ㆍ금토

 마을회의가 끝나면 마을입구와 당산, 제관, 축관, 화주댁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놓아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막는다.


4. 제의 진행


 저녁 9시경 할아버지당산 앞마당에 모닥불을 지피면 마을사람들이 모여들어 농악대를 구성하며 서로 가락을 맞춰보고 굿을 준비한다. 농악대는 제를 모시기 전에 굿을 치는데 화주댁을 시작으로 마을 공동샘, 할아버지당산, 할머니당산, 충효국민학교 순서로 진행된다. 그동안 마을사람 중 궂은 일이 없었던 남자들은 흰옷과 흰장갑을 착용하고 화주댁에 모여 제물을 운반하며 당산제 준비를 서두르는데 한 사람이 한 가지씩만 운반한다. 충효마을 당산제에서는 할아버지당산과 할머니당산에 따로 제를 지내지 않기 때문에 자정 무렵이 되면 농악대가 할머니당산으로 가서 굿을 치고 당산할머니를 할아버지당산으로 모셔와 함께 제를 모신다. 농악대가 당산할머니를 할아버지당산으로 모셔오면 운반해 놓은 음식을 진설하고 당산제를 시작한다.

 제는 진설-초헌-메올리기-아헌-독축-종헌-헌작-소지-음복-헌식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축문은 예전부터 내려오던 것이 너무 길고 어려워 짧게 줄여서 사용하고 있었으며, 소지는 축관이 먼저 마을의 평안을 비는 마을소지를 드리고 나면 제에 참여한 제관, 농악대, 연장자 순으로 동민소지를 올린다. 지신을 달래기 위한 헌식은 상에 올렸던 음식을 약간씩 덜고 돼지머리에서 코, 귀, 입술을 떼어내 흰종이에 싸서 묻는데 짐승들이 파먹지 못하도록 돌로 눌러 놓는다. 이로써 충효마을 당산제의 모든 절차가 끝나게 된다.

 다음날 아침에는 마을주민 모두가 화주집에 모여 제를 지내고 남은 음식과 마을에서 잡았던 돼지고기를 먹으며 흥을 돋군 후 마당밟이를 한다.

 충효마을에서 사용한 축문내용은 아래와 같다.


2. 덕의동 석저 당산제


                                                   조사일자 : 1993. 9. 14

                                                   조 사 자 : 정기진, 이순영

                                                   조사방법 : 현지면담조사 (현재시행)

                                                   제 보 자 : 김복규 (73)

                                                              장현승 (73)


1. 마을 개관


 본촌, 석제, 석보, 돌밑이라고도 불리우는 이 마을은 무등산의 기슭에 위치하며 광주호와 접해있다. 돌이 많다 하여 석저마을이라 한다. 예전에는 충효마을이나 금곡마을보다 규모가 더 컸으나 1970년대 초에 광주호가 생기면서 이 마을의 입구쪽이 수몰되어 50~60여호가 시내로 이주하게 되어 지금은 20여호에 50여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는 아주 작은 마을이다.

 광산김씨가 먼저 들어와 성촌을 하게된 이 마을은 농사를 주업으로 하고 있다. 이 마을은 산의 골짜기 부분에 있기 때문에 광주호 건너편 식영정에서 바라보면 이 마을이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이유인즉 예전에는 서당골이라 하여 산 위쪽에 마을이 있었는데 건너편 산에 호랑이가 살고 있어 마을이 훤하게 잘 보여 호랑이의 피해가 잦게 되자 산 중턱의 마을들이 아랫마을쪽으로 내려오게 되고 집들이 산의 골짜기에 생기게 되었다 한다. 현재는 아랫마을은 광주호로 인해 수몰이 되었고 골짜기에 남아 있는 마을만이 있다. 이 마을입구 다리 옆에 높이 130㎝의 입석 1개가 있는데 이곳에 당산제가 끝나면 금줄을 쳐 놓는다. 이 금줄은 당산주변에 사용했던 것이다.


 2. 당산제의 현황과 신체


 1) 당산제의 현황

 석저마을의 당산제는 정월 보름에 모시며 언제부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제보자인 김복규 할아버지는 선친께서 이 당산에 기자 치성을 드려 마침내 아들을 얻었는데 그 아들이 바로 자신이며 그 후로 부친의 뜻을 받들어 당산에 대해 지극히 정성을 들인다고 한다.

 2) 당산과 신체

 이 마을에는 마을입구에 귀목나무 2그루가 있는데 윗쪽에 있는 것을 윗당산, 아래쪽에 있는 것을 아랫당산이라 한다. 아랫당산의 제단은 높이가 낮아 축대를 70㎝ 정도 쌓고 시멘트로 발라 윗당산 제단과 높이를 같게 하였다. 제단은 각각 있는데 자연석으로 되어 있으며 신목 옆에 헌식터가 마련되어 있다.


 3. 제의 준비


 1) 제관의 선정

 석저마을에서는 당산제를 김복규 할아버지가 주관하고 있어서 제관 등은 특별히 뽑지 않고 있으며 마을사람들이 옆에서 도와주고 있다.

 2) 치 제

 정월초부터 할아버지는 상가나 산고든 곳을 가지 않고 근신한다. 매일 목욕을 하여 청결을 유지한다.

 3) 제 비

 당산제에 사용되는 비용은 마을자금에서 쓸 때도 있지만, 마을자금이 없을 경우에는 김복규 할아버지가 모든 비용을 부담하여 제물을 장만하기도 한다. 금년에는 제비로10만원 정도 소요되었다.

 4) 제물의 장만

 올해의 제물은 미역, 마른 상어, 나물류 등을 준비하였다. 비린 음식은 장만을 하지 않으며 당산제에 사용되는 제기는 매년 새로 구입해 사용하고 있다.

 5) 금줄ㆍ금토

 12일이 되면 왼새끼로 꼰 금줄을 대나무에 걸어 마을입구에 치고 황토를 뿌려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막는다.


 4. 제의 진행


 당산제는 아랫당산을 먼저 지내고 윗당산을 그 다음에 모신다. 14일 저녁 9시부터 제를 지내는데 제를 알리는 신호로 옛날에는 나발을 불었으나 지금은 징으로 대신한다. 장만한 음식은 손으로 직접 운반을 하여 먼저 아랫당산에 올린다. 재차는 진설-재배-헌작-재배-독축-재배-소지-헌식 순으로 진행되었다. 헌식은 진설한 음식의 일부를 조금씩 떼어 백지에 싸서 헌식터에 묻는다. 아랫당산의 헌식터는 밑지름이 70㎝ 정도 되는 원뿔형의 시멘트 구조물로 위에는 납작한 돌로 덮혀 있다.

 이러 윗당산에 제를 올리는데 재차는 아랫당산과 같다. 제사를 모시고 남은 음식은 모인 주민들과 나누어 먹는다. 그래야 그 해에 무병한다고 하였다. 소지할 때는「모든 병은 물아래(광주호)로 내 보내고, 마을사람들 무병장수하고 재수 좋고 올해도 풍년이 들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라고 기원을 한다. 제가 끝나면 다음 날까지 마당밟이를 한다.


3. 오룡동 신흥 당산제


                                                 조사일자 : 1993. 4. 2

                                                 조 사 자 : 최강열, 이순영

                                                 조사방법 : 현지면담조사 (현재시행)

                                                 제 보 자 : 이영자 (여, 50) : 부녀회장


 1. 마을 개관


 오룡동 신흥마을은 광주시 중심부에서 11㎞ 떨어진 변두리에 위치하며 아직까지 농촌경관을 유지하고 있는 마을이다. 현 삼소동사무소에서 서북쪽으로 1㎞쯤 떨어진 야트막한 산자락에 자리한 이 마을은 ‘신점’, ‘새점’으로 불리워왔는데 1984년에 주민들의 결의로 ‘신흥’으로 개칭하였으며 약 40여호 150여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신흥마을은 효덕동 원제마을, 광산구 평동출장소 지로촌과 함께 광주지역의 대표적인 옹기마을로 그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성업했던 마을이었다.

 주민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였으나, 이영자씨 등 3가구가 옹기굴을 소유하고 옹기점을 크게 경영한 까닭에 농한기 때는 거의 모든 주민이 옹기점의 뒷일꾼이나 옹기행상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광주에서 마지막까지 옹기의 명맥을 유지해 왔던 신흥마을은 1989년 2월 삼소동 일대가 광주테크노폴리스 건설입지로 선정되므로써 마을은 완전히 없어지게 되어 생업으로 자리해 왔던 옹기점도 함께 사라지게 되었다.


2. 당산제의 현황과 신체


 1) 당산제의 현황

 신흥마을에서는 할머니당산 한 군데에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매년 정월 보름(14일 밤)에 모시는데 광주지역에서 유일하게 부녀회에서 주관하고 있는 곳이다. 과거에는 밤중에 모셔왔으나 근래에는 저녁 9시에 시작한다.

 2) 당산과 신체

 원래의 당산은 6.25전까지 마을안 지금의 이영자씨 옹기가마 옆에 있는 느티나무를 할머니당산으로 모시고 지내왔으나 땅주인이 천주교 신자이어서 당산나무를 베어버려 신체가 입석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입석은 높이 165㎝, 둘레 160㎝의 화강암으로 윗쪽은 좁고 아래쪽이 넓은 형태이다. 이 마을에서는 당산제를 모시면서 마을을 평안하게 하고 오곡의 풍년을 빌며 옹기그릇도 잘 되게 (잘 구어지게) 해달라고 기원한다. 이 마을이 폐촌됨에 따라 주민들의 동의를 얻어 광주민속박물관에서 입석을 기증 받아 야외전시장에 이설 복원하였다.


 3. 제의 준비


 1) 제관의 선정

 정월 10일경에 제관을 선정하는데 먼저 마을회의를 열어 그 해의 생기복덕을 보아 제관, 축관, 화주를 결정하였으나, 근래에는 제관은 매년 이재청씨(52, 통장)가 하고 축관은 이오갑씨(71)가 맡아 보다가 1991년부터 이봉옥씨(63)가 맡아 하고 있다. 하지만 화주만은 일년동안 궂은일이 없었던 사람을 골라 선정한다.

 2) 치 제

 제관의 금기사항은 매우 엄격하여 생기복덕이 맞고 궂은 일을 당하지 않는 정갈한 나이든 분이 선정되는 것이 통례이다. 제관으로 선정되면 당산제 1주일 전부터 마을 당샘에서 매일 목욕재계하며 여러 가지 금기사항을 철저히 지켜왔으나 요즈음은 당산제 3일전부터 출입을 삼가고 근신하는 등 변화된 모습이었다.

 3) 제 비

 제의 비용은 동네사람들이 성의껏 희사하여 지내왔으나 이영자씨(50)가 부녀회장이 되면서 당산제를 지낸 후 가가호호 마당밟이를 해주고 거둔 성금과 마을 구판장을 세놓아 받은 돈을 모아두었다가 다음 해의 당산데 비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4) 제물의 장만

 제물은 음력 12~13일경 양동시장에서 일괄 구입하는데 예전처럼 마스크를 쓰거나 다른 사람과 말을 건네지 않아야 하는 금기는 지키지 않지만 가격만은 절대로 깎지 않는다고 한다. 제물은 화주집에서 정갈스럽게 장만하는데 백시루떡, 돼지머리, 북어, 명태탕, 전, 삼실과, 나물, 메, 술 등을 유교식 제사상처럼 걸게 준비한다. 특별히 할머니당산에 기원할 일이 있는 가정에서는 여러 가지 음식을 장만하여 내놓기도 한다. 음식 장만은 고춧가루만 넣지 않고 갖은 양념을 다 넣는다. 당산제에 사용되는 제기들은 다른 마을의 경우처럼 화주가 갖지 않기 때문에 보관해 두었다가 다시 사용한다.

 이날만은 마을사람들도 비린내 나는 음식을 먹지 않으며 산기가 있는 집과 가축이 새끼를 낳으려는 집안의 사람들은 문밖 출입을 삼간다. 대체로 제일에는 집안의 개를 묶어 두지만 풀어놓아도 집밖으로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5) 금줄ㆍ금토

 14일 아침이 되면 온 동네를 깨끗이 청소하고 당산입구, 제관, 축관, 화주집 앞에 금줄을 치고 금토를 뿌려 부정의 출입을 금한다.


4. 제의 진행


 당산제는 자정무렵 꽹과리, 징, 소고, 북, 장고 등으로 구성된 농악대가 쇠가락을 맞춰보며 굿을 준비하면서 제의 시작을 알린다. 상쇠는 최순자(45)씨가 맡고 있으며 농악대의 복장은 검정바지와 흰 블라우스의 간편한 차림에 가새드림을 드리운 복장을 한다. 한복차림의 제관과 마을사람 중 부정타지 않은 사람들이 화주집에 모여 준비된 제물과 제구를 하나씩 손에 들고 농악대를 앞세워 당산으로 향한다. 입석으로 된 할머니당산에 당도하면 진설-분향-강신-독축-소지-음복-헌식 순으로 제의가 진행된다. 신흥마을의 당산제에서는 대대로 내려오던 축문이 망실되어 마을의 평안과 안녕을 비는 내용으로 책에서 옮겨 적어 사용하고 있었으며, 헌식은 상에 차려진 음식을 조금씩 떼어 당산주위에 뿌린다.

 제가 끝나면 당산앞에서 굿을 쳐 마을사람들에게 끝났음을 알리고 제에 사용되었던 향과 초를 그대로 둔 채 마을로 돌아와 공동샘을 돌면서 굿을 치므로써 모든 행사는 끝난다.

 다음날 아침에는 각 가정을 돌며 마당밟이를 하여 거두어진 돈으로 다음해의 제사비용을 마련해 둔다.

 신흥부락에서는 테크노폴리스 건설을 위한 마을 철거로 올해 마지막으로 당산제를 모셨다. 당산제를 지낼 당시에도 많은 주민이 이미 떠나버린 상태여서 형식적으로 지낼 수 밖에 없었다. 마당밟기에서 거두어진 성금은 현재까지 남아 있는 주민들끼리 뿔뿔이 헤어지기 전에 동네잔치를 마련할 계획이라 하였다.


 5. 영 험


 이 당산신은 영험해서 20~30년 전에 2~3년간 제를 지내지 않았더니 동네남자들이 여럿 사망하자 당산제를 지내지 않았기 때문이라 하여 동네부녀회에서 다시 당산제를 모시도록 추진하였다.

 이때부터 당산제를 올릴 때 제관은 남자가 맡으나 모든 추진은 부녀회에서 하고 배례, 헌작 등도 여자들이 함께 참여하게 되었다 한다.


4. 대촌동 하대 당산제


                                                   조사일시 : 1993. 2. 5

                                                   조 사 자 : 최강열, 정기진, 이순영

                                                   조사방법 : 현지면담조사 (현재시행)

                                                   제 보 자 : 김시태 (62)

                                                              임영팔 (74)

                                                              김익권 (74)


1. 마을 개관


 하대마을은 대촌의 아랫마을이며 북쪽은 장성군 진월면과 접하고 앞은 넓은 평야로 현재 200여 호나 되는 큰 마을이다. 이 마을은 풍천임씨가 맨 먼저 들어와 성촌했다고 구전되며 그 뒤 김해김씨 등 여러 성씨들이 이주해 혼성촌을 형성하게 되었고 주민의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마을이 풍수지리상 배 형국인지라 샘(우물)을 파면 흉하다고 하여 솟대에 해당하는 짐대를 마을안에 세웠다고 전하여 온다. 조사시에는 광주첨단과학기지 건설공사로 앞들은 매몰되어 오고 있었으며 마을은 이주하여 빈집이거나 이주준비를 하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2. 당산제의 현황과 신체


 1) 당산제의 현황

 대촌의 당산제는 성촌시부터 모셨다고 전해지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마을이 크다 보니 원래는 일곱 곳에서 당산제를 지내왔다고 하는데 정확히 증언하는 사람은 없고, 현재는 할머니당산이라 불리우는 입석에만 모신다.

 2) 당산과 신체

 원래 이 마을의 당산은 마을앞 들녘에 할아버지당산(귀목나무)과 할머니당산(입석)이 있었는데 1967년 농지 정리시에 나무는 베어버리고 입석만 현 위치로 이동하였다. 현재는 마을안 공동샘 옆에 시멘트 건물로 당집은 만들고, 그 안에 신체인 입석 1기와 제사음식을 묻는 작은 항아리가 남아 있다. 입석의 크기는 높이 60㎝, 폭 60㎝이며 헌식 항아리는 입지름이 30㎝이고 뚜껑이 있다.


3. 제의 준비


 1) 제관의 선정

 당산제 준비는 정월초( 맨처음 드는 사일(巳日) )에 마을회의를 열어 화주 1명, 제관 1명, 축관 1명을 뽑는다. 이들은 생기복덕이 맞아야 하고, 집안에 궂은 일이 없는 정결한 사람이어야 한다.

 2) 치 제

 화주, 제관, 축관으로 뽑힌 사람은 잡인과의 대면은 피하고 부정한 곳의 출입을 삼가는 등 청결과 근신을 해야 하며 제물 등을 구입하는 화주는 부정한 일이나 상을 당한 사람을 보지 않으려고 삿갓을 쓰며 제물구입시 값을 깎는 일이 없다.

 3) 제 비

 제비는 과거에는 인구전으로 거출하였으나 근래에는 마을 재산이 있어 따로 걷지 않는다. 제는 1990년까지 모시고 중단하였는데 그때의 경비는 벼 2섬이 들었다. (현재는 약 20만원 정도)

 4) 제물의 장만

 제물은 장구짐이라고 하는데 화주와 보조자 등 3인이 비아장으로 간다. 구입내역은 닭 1마리(흰색 장닭), 명태 5마리, 사과, 배, 대추, 밤, 곶감, 톳나물, 도라지, 무나물 등을 구입 또는 준비를 한다. 그릇은 매년 새것으로 구입하여 당산제가 끝나면 화주가 가져간다.

 제주는 화주가 미리 담그며, 정월 13일 오전부터 마을 공동샘을 청소하고 화주가 제물 장만을 하기 위한 물을 길러 가면 이 우물에 제가 시작되기 전에 두레박 속에 참기름 불을 켜 놓는다. 그렇게하므로써 이 샘이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풍부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제물의 장만은 특별한 양념을 하지 않고 소금으로만 간을 하며, 청결을 유지하기 위하여 마스크를 쓰고 한다.

 5) 금줄ㆍ금토

 금줄은 1월 13일에 마을골목에 치는데 ‘금령’, ‘잡인불입’등을 쓴 백지를 끼워 부정의 출입을 막으며, 금토는 1월 14일 아침 일찍 마을옆 산에서 파다가 마을 곳곳에 뿌린다. 금줄이 쳐진 13일 이후는 외부손님은 들어올 수 없기 때문에 마을민들이 금줄밖으로 나가서 만난다. 또한 산모와 그 가족 등은 집밖을 나오지 못하게 한다.


 4. 제의 진행


 마을주민들은 제일 아침에 비린 것을 먹지 못한다. 제는 유교식으로 진행되며 밤 10시쯤에 화주집에서 준비된 제수를 가지고 나와 집사가 진설한다. 진설이 끝난 후 인사굿을 친 다음 강신-재배-초헌-축원-재배-아헌-재배-축원-종헌-사신-헌식-음복 순으로 진행된다. 헌식은 지름이 30㎝ 정도되는 오가리 안에 장닭머리와 차려 놓았던 제물을 조금씩 덜어 내어 한지로 싼 유지지를 담는다.

 당산제를 모두 마치면 농악소리를 울려 당산제가 끝났음을 알리며 이후 각 가정에서는 선영에 메를 올린다.

 15일부터 약 3~5일간 굿을 치는데 각 가정에서는 음식과 찬조금을 내놓는다. 마당밟이는 문굿-조왕굿-장광굿-곳간굿-노적굿-샘굿-마당굿 순으로 한다.

 2월 초하루에는 주민들이 마을회관에 모여 당산제의 결산과 마을의 공동 관심사를 논의하고 갈무리 값이나 노임 등을 결정한다.

 1970년대의 새마을사업으로 줄다리기 등 민속놀이는 자취를 감추었고 마당밟이도 시들해졌다. 근래에는 이 마을 당산제를 주관하던 김용수씨가 작고한(1990년) 후로는 당산제를 주도할 사람이 없어 제를 올리지 못하였으며 1993년에는 광주첨단산업기지 건설로 인하여 마을은 영원히 사라졌다.


 5. 영 험


 ◦ 제를 모셨던 시루 등 제기를 마을민들이 가져다 사용하면 벌을 준다고 해서 무서워했다.

 ◦ 제일 밤에 부부관계를 가지면 떨어지지 않는다.

 ◦ 소도둑이 밤새 당산주위만 돌다 도망갔다.

 ◦ 특히 이 마을에는 기자치성으로 영험을 보았다는 사례가 있다. 조종섭(작고)씨는 매월 초사흘에 메, 삼실과 등 제물을 준비하여 당산에 정성껏 치성을 드려 마침내 아들을 얻었다고 한다. 그분이 조영수(남 53세)씨라 한다.


5. 금곡동 금곡 당산제


                                                   조사일자 : 1993. 4. 16

                                                   조 사 자 : 최강열, 이순영

                                                   조사방법 : 현지면담조사 (과거시행)

                                                   제 보 자 : 유몽룡 (76)


 금곡마을은 충장사에서 광주댐으로 가는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다. 본래 광주군 석저면 지역으로 1955. 7. 1 담양군 남면에 통합되었다가 1957. 11. 6 광주시에 편입되어 충효동의 관할이 되었다.

 마을에 쇠가 났다 하여 금곡, 서촌이라고 하였으며 최근 마을앞 산등성이에서 조선시대 분청사기 가마터의 복원, 보존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500여년전 성촌된 이 마을은 남평문씨 일촌이었으나 현재는 타성도 더러 들어와 살고 있다. 원래 120여호의 큰 마을이었으나 일제때 60호까지 줄었다가 현재 90여호 500여 주민이 거주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주민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근래에는 소득증대를 위해 약초로 사용되는 작약재배를 겸하고 있는 가구가 많다.

 금곡마을에서는 옛날부터 세 곳의 당산에 매년 정성스럽게 당산제를 모셨다. 그러나 일제 때 미신이라 하여 강력히 규제하여 지내지 못하다가 해방 후 다시 당산제를 모시면서 동네 여자 두명이 정신이상(자칭 당산할머니라 함)이 되어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두 곳의 당산은 아직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할아버지당산은 마을가운데 있는 귀목이었으나 땅주인이 일본인으로 바뀌면서 베어지고 그 후 이팝나무를 심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큰할미당산은 동네 논가운데의 들돌인데 논주인이 논둑을 막는데 사용해 없어졌으며, 작은할미당산은 남근형태의 입석으로 꾀꼬리당산이라고도 불렀으며 현재는 동네에 사는 문해일씨가 세운 삼괴정 옆으로 옮겨 놓았다.

 금곡마을 사람들은 당산제를 모시면서 마을의 무병과 안녕, 자식의 성공, 출산 등을 기원했다고 한다. 본 조사는 금곡마을이 40년 이상 당산제를 지내지 않았기 때문에 제보자 유몽룡(76)씨가 어렸을적 지냈던 당산제의 진행과정을 구술로 받아 작성한 것이다.

 제의 준비는 정월 초순경 마을회의를 열어 제관 3명, 축관 1명, 화주 1명은 선정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제관과 축관은 마을의 덕망 있는 어른들 중에서 그해의 운세를 보아 생기복덕이 맞고 깨끗한 분이 맡게 된다. 특히 3명의 제관들은 당산제를 모실 때까지 서로 왕래하지 않는다. 화주는 제를 지내기 3일전부터 날마다 목욕을 하고 부정한 곳에 출입을 삼가며 화장실에 다녀와도 옷을 새로 갈아 입는 등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하여 제물을 준비해야 한다. 제의 비용은 마을의 공동답이 있어 거기서 수확된 쌀로 충당하였다.

 12일에는 마을입구와 당산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뿌려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막는다. 이후에 마을에서 상을 당하는 가정이 생기면 2월 초하루로 연기하거나 아예 제를 지내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13일에는 화주가 당산제에 쓸 제물과 제기를 구입한다. 제물로는 돼지머리, 과일, 채소 등을 준비하여 제기는 제사가 끝나면 화주가 갖기 때문에 해마다 새로 마련한다. 14일 아침부터 화주부부는 음식을 장만하는데 흰 마스크를 쓰고 간을 하지 않으며 맛도 보지 않는다.

 저녁무렵이면 농악대를 구성한다. 당시는 머슴 등 지체가 낮은 사람들로 농악대가 이루어졌으며 상쇠는 화순출신인 양띠보라는 사람이 잘했다고 한다. 또 당골이 있어 집집마다 무녀 걸궁을 하였으며 이 무녀가 상쇠를 겸할 때도 있었다.

 제는 자정무렵부터 시작된다. 먼저 농악대가 굿을 치면서 마을을 한바퀴 돌고 난 후, 할아버지당산, 큰할미당산, 작은할미당산 순으로 모신다. 제관과 축관은 유건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으며 나머지 참석자들은 평상 한복을 깨끗이 빨아 입었다. 제물의 운반은 장가를 들지 않은 총각들이 한가지씩 운반하며 떡은 시루채 상에 받쳐가지고 간다.

 제차는 진설-재배-헌작-재배-강신-소지-음복-헌식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소지는 분축-마을소지-개인소지 순으로 올리며 헌식은 상에 올렸던 음식을 조금씩 떼어 당산뿌리 부분에 묻는다. 제가 끝나면 나발을 불어 끝났음을 알려 각 가정에서 조상제사를 올릴 수 있게 하였다. 다음날부터 마당밟이를 하는데 여러 날 계속되었다.


6. 충효동 평촌 당산제


                                                  조사일자 : 1993. 9. 21

                                                  조 사 자 : 정기진, 이순영

                                                  조사방법 : 현지면담조사 (과거시행)

                                                  제 보 자 : 정남수 (76) : 노인회장


 광주호에서 담양군 남면으로 통하는 포장된 길을 따라 가면 오른쪽으로 다리가 보인다. 이 다리가 김윤제가 값진 돌로 놓았다는 금다리이다. 여기서부터 닭뫼, 동림, 버성골(우성), 담안, 평모 등 다섯 마을이 모여 평촌마을을 이루고 있다. 현재 평모는 없어졌다. 평촌 1반이 닭뫼, 2반이 버성골, 3반이 담안, 4반이 동림으로 이 네 마을 중 닭뫼만 좀 떨어져 있으며, 버성골과 동림은 이웃하여 있고, 담안은 금곡에서 흐르는 개울을 사이에 두고 있다. 때문에 당산제도 같이 모시고 있다. 이 마을은 남평문씨, 광산김씨, 연일정씨, 전주이씨 등 50여호에 200여명이 거주하며,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평촌마을은 12당산이 있어 매년 당산제를 지내다가 비용이 너무 많이 들고 낭비라 생각되어 해방 이후부터 지내지 않고 있다.


 12당산의 신체와 위치를 보면

 제 1 당산 - 귀목 - 산 중턱,                  제 2 당산 - 팽나무 - 버성골,

 제 3 당산 - 귀목 - 동림 (할아버지당산),      제 4 당산 - 귀목 - 동림 (할머니당산),

 제 5 당산 - 귀목 - 담안,                     제 6 당산 - 귀목 - 버성골,

 제 7 당산 - 팽나무 - 담안,                   제 8 당산 - 귀목 - 평모 (없어짐),

 제 9 당산 - 귀목 - 버성골,                   제 10 당산 - 귀목 - 닭뫼 (불에 타버림),

 제 11 당산 - 귀목 - 동림,                    제 12 당산 - 귀목 - 버성골 등이다.


 당산제를 지내면 마을이 귀신이나 질병으로부터 벗어나고 풍년이 들게 된다고 믿었다.

 제는 정월 초순에 마을회의에서 제관, 축관, 화주를 선출하여 음력 정월 14일 초저녁부터 보름날 새벽까지 12당산에 제를 모두 모셨다. 그러나 12당산을 모두 모시기가 매우 힘이 들고 금기사항이 너무 많아 제물을 준비하는 화주를 서로 맡지 않을려고 했다. 제를 지내는 비용 또한 많이 들어 약식으로 간단히 지냈다지만 동네답도 없어서 각 반별로 쌀을 거두어 지내어오다가 결국은 너무 낭비다 하여 두 당산(할머니당산, 할아버지당산)에만 해방전까지 유지되었고 그것도 힘들어 현재는 지내지 않고 있다.

 제의 준비과정은 정결하고 정숙하며 금기사항도 많다. 제보자이신 정남수씨의 집이 화주가 되어 제를 지낼 음식을 장만하던 어느 해 어머니 되시는 분이 칼로 손을 베인 일이 있었다. 그 손을 헝겊으로 묶고 춥지만 동네 개울에서 목욕을 하고 한 손으로 음식장만을 했다. 그런데 그날 저녁에 호랑이가 내려와 집에서 기르던 개 한 마리를 물어 갔는데 이는 제를 지내는 정성이 부족하여 부정을 탔기 때문이라 믿고 있다.

 당산제를 지낼 당시에는 열두 당산 모두에 음식을 차리고 모셨으며, 제물은 닭, 떡, 삼실과, 술 등을 간단히 차렸다. 여기에 쓰였던 닭은 작은 것으로 12마리를 준비하고 떡은 작은 시루를 사용했다. 그리고 제물을 장만할 때는 꼭 동림에 있는 동네샘만 이용하였다.

 제가 끝나고 음복을 하는데 떡은 마을사람들이 고루 나누어 먹는데 그 떡을 액맥이 떡이라 하며 이 떡을 먹으면 부스럼이 나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

 보름날 오전에는 개울을 사이에 두고 마을사람들이 편을 나누어 줄다리기를 하였으며 아낙들은 그네뛰기도 했다.


7. 화암동 화암 당산제


                                                   조사일시 : 1993. 9. 21

                                                   조 사 자 : 정기진, 이순영

                                                   조사방법 : 현지면담조사 (과거시행)

                                                   제 보 자 : 이승옥 (69)


 화암마을은 본래 광주군 상대곡면의 지역으로 지형이 꽃처럼 되고 바위가 있어서 꽃바우 또는 화암이라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등촌리 일부지역과 화암리 일부지역을 병합하여 석곡면에 편입되었다가 1955년 광주시에 편입되고, 1957년 동제실시에 따라 청옥동의 관할이 되었다.

 산수동 오거리에서 전망대를 지나 제4수원지에서 충민사쪽으로 가는 도로 주변에 마을이 있는데 광산김씨, 광산이씨, 하동정씨 등 50여 세대가 살고 있다.

 마을앞에는 논이 있고 주위로는 산이 둘러 싸고 있으며 대부분의 주민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과거에는 화암마을이 무등산 수박의 본거지였으나 예전만큼은 수박을 재배하지 않는다고 한다.

 화암마을에서는 6.25이후로 당산제를 지내지 않고 있으나 당의 형태는 몇 곳이 남아 있다. 원래 12당산이 있었는데 현재는 5곳만 남아 있고 나머지는 사라지고 없다. 제1당산은 천룡으로 동네 뒤에 있었던 팽나무로 원래 있던 팽나무는 없고 새로 심은 나무가 있다.

 제2당산은 마을 아래에 있는 여러 소나무 중 제일 큰 300년 이상된 나무로 할아버지당산이라 하였다.

 제3당산은 작은당산으로 이승옥씨댁 앞에 있는 소나무이다.

 제4당산은 마을앞에 있었던 귀목나무였는데 6.25때 어떤 상인이 벌목하여 없어지고 몇해 전에 심은 귀목나무가 현재 있다.

 제5당산은 충민사 앞에 있는 팽나무이다. 그리고 제6당산부터는 12당산까지 동네주변에 있는 돌무덤(작은 돌을 쌓음)이 있었는데 현재는 사라지고 없다.

 이 마을에서는 음력 정월 열나흗날 초저녁부터 당산제를 지내는데 마을의 안녕, 농사의 풍년을 기원했다. 정월 초닷새경에 마을회의를 열어 축관과 화주집을 선정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제의는 축관이 제를 주관하게 되는데 나이가 지긋하고 깨끗하며 아들이 많은 집의 사람을 선정하기 때문에 매년 거의 같은 사람이 맡게 된다.

 제일의 수 일전부터 마을입구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놓아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막으며, 외부손님이나 상 당한 곳을 다녀온 사람, 정결치 못한 사람들은 금줄을 쳐 놓은 곳으로 다니지 못하고 마을 밖 논으로 우회하여 다녔으며, 물을 길러 갈때도 마찬가지이었다.

 제비는「지붕머리돈」이라 하여 집집마다 일정하게 거출했다. 3일전부터 제기와 제물을 준비하는데 제기는 매년 새로 구입했고 제물은 나물, 마른포, 쇠고기, 밤, 대추 등을 화주가 시장에 가서 구입한다. 화주는 금기를 철저히 지켜야 하고 또 깨끗한 사람이 제물을 장만해야 되기에 보살생활을 했던 배상문씨라는 분이 매년 맡아 하였다. 제물의 준비는 화주가 열두 당산의 모든 음식을 마련하였다.

 음력 정월 14일 저녁 때부터 농악대가 마을을 돌면서 농악을 치고 당산에 불을 밝히고 나면 큰당산, 작은당산 순으로 제를 지내며, 나발로 당산제의 시작과 끝을 알렸다. 제관의 복장은 흰 도포에 한복차림이고 제는 진설-강신-헌작-독축-소지-헌식-철상 순으로 진행된다. 소지는 축관, 이장, 연장자, 농악대 등의 순으로 올리며 소지를 올리면서 각자의 소원을 빌었다. 그리고 헌식은 명태머리와 다른 음식을 조금씩 떼어 헌식터에 묻는다.

 15일부터 마을에서 마당밟이가 시작되고 집집마다 음식을 차려 나누어 먹는다. 그리고 정월 그믐경에 마을회의를 열어 전년도의 결산과 이장의 선출을 하며 품삯 등을 결정한다.


8. 청풍동 신촌 당산제


                                                   조사일자 : 1993. 6. 22

                                                   조 사 자 : 이 순 영

                                                   조사방법 : 현지면담조사 (과거시행)

                                                   제 보 자 : 문재룡 (78)

                                                              정은주 (78)

                                                              문근섭 (37)


 신촌마을은 광주 제4수원지 제방 밑에 있는 마을로 500여년전에 남평문씨들이 터를 잡아 성촌된 마을이다. 지금은 54호에 200여명이 농업에 종사하며 살고 있다.

 마을입구에는 남평문씨의 제각인 균산정, 서당이었던 괴양정, 행주기씨의 서재였던 서석단이 자리하고 있다. 마을사람들에 의하면 이 곳은 일조량이 짧아 다른 부업을 하기가 대단히 힘들고 교통 또한 광주시내로 나가기에 불편하여 대부분이 농사에만 전념하고 있다고 한다.

 신촌마을은 뒤에는 산이 있고 앞으로는 시냇물이 흐르며 논이 펼쳐져 있는 한국의 전형적인 배산임수형의 마을이다.

 이 마을에서 당산제를 지내는 목적은 오곡의 풍년과 마을사람들의 안녕을 위해서라 한다. 당산은 마을입구의 개울가에 있는 세 그루의 나무 중 가장 큰 400여년 된 귀목나무가 할아버지당산이고 그 옆의 자연석이 있는 곳이 헌식터이다. 또 수구막이로 세워진 입석이 있다.

 이 마을의 당산제 유래는 다음과 같다.

 이 마을앞에는 논이 많아 큰 보가 하나 있었는데 어느 해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보가 터지게 될 지경이었다. 이 보가 넘쳐 흘러 마을로 들어와 곧 마을이 떠내려갈 지경에 이르러 마을사람들은 마을앞 정자나무에 고사를 지냈다.「당산할아버지, 당산할아버지, 할아버지가 나와서 보를 터 주셔야 우리 마을이 무사하겠습니다.」하고 마을사람들이 빌고 있을 때 그 정자나무에서 흰 노인이 나오더니 물이 넘쳐 흐르는 보를 긴 막대기로 두어번 저으니 보가 둘로 갈라져 그 물이 개울로 흘러가 마을이 무사하게 되었다 하여 그 후부터 매년 그 당산나무에 제를 지내왔다고 한다.

 당산제 준비하는 과정은 정월 초사흘경에 마을회의를 열어 제관 3명, 축관 1명, 유사 1명을 정한다. 축관과 제관은 나이 많은 남자, 마을에 공이 있는 사람 등 학식이 있고 마을에 오래 거주하신 분으로 선출한다. 그리고 유사는 궂은 일이 없고 집안에 액운이 없는 나이 많으신 할머니, 할아버지 내외가 사시는 집을 선정해 제물장만을 하도록 하였다.

 제물을 장만할 분이 선정되면 제 지내기 일주일전부터 목욕재계하고 몸가짐을 깨끗히 한다. 제물장만에 쓰일 경비는 전년도에 당산제를 모신 후 각 가정을 돌며 마당밟이를 하여 모아 놓은 기금을 사용한다. 제물은 가까운 시장에 가서 삼실과, 산채, 마른명태, 돼지머리 등을 구입하며 제기도 매년 새것으로 준비한다.

 초열흘이 되면 마을입구와 화주집, 당산주위에 금줄을 치고 마을입구와 화주집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황토를 놓아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막았다.

 제일 저녁 8시에서 9시가 되면 농악을 치며 마을사람 중 깨끗한 사람이 제물을 손으로 들고 할아버지당산에 올라 진설을 한다.

 제관의 복장은 한복에 도포를 입었으며, 여자는 참석하지 못했다.

 제는 분향-강신-초헌-독축-아헌-종헌-소지-헌식-음복 순으로 진행되며, 헌식은 상에 올렸던 음식을 조금씩 떼어 흰 종이로 싸서 헌식터인 입석밑에 묻는다. 제가 끝나면 끝을 알리는 신호로 나발을 불었다.

 마을사람들은 음복으로 시루떡을 조금씩 나누어 먹는데, 이것은 그 해에 무병을 기원하기 위한 것이다.

 제가 끝나면 다음날 아낙네들의 그네타기와 마당밟이가 시작된다. 마당밟이는 부락의 샘굿을 먼저 하고 가가호호를 방문하여 농악을 쳐주며 여기서 나온 경비를 모아 다음 해 당산제 기금으로 사용한다.

 이 당산나무는 특히 영험해서 옛날 마을에 도적이 들어 재물을 훔쳐가지고 당산 밑을 지나가려 하였는데 밤이 새도록 당산나무를 뱅뱅 돌다가 날이 밝아 도적은 달아나지 못하고 잡혔다고 한다.


9. 청풍동 배촌 당산제


                                                   조사일자 : 1993. 9. 25

                                                   조 사 자 : 이 순 영

                                                   조사방법 : 현지면담조사 (과거시행)

                                                   제 보 자 : 정홍모 (59)


 웃대실, 상대곡이라 부르기도 하는 이 마을은 마을 뒷산이 덕봉산인데 무등산으로 보면 이 마을이 덕봉산의 등에 해당된다고 하여 등촌이라고 불리워졌다. 이 곳은 신촌마을의 윗마을로써 김해김씨가 터를 잡았으며 현재는 95호 20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성씨분포는 평산신씨가 30여호 천안김씨 20여호 밀양박씨 15여호가 살고 있으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한다.

 이 마을입구에 2기의 입석이 있는데 전언에 의하면 6.25이전까지는 동네의 당산제를 지내고 난 후 풍요벽사를 위해 줄을 감았다고 한다.

 이 마을에서는 해방이후 당산제를 지내지 않고 있으며 현재 거주하고 있는 주민중에서도 당산제의 진행과정을 아는 이가 없어1987년 광주직할시에서 발간한「민속지」에 박내경씨의 조사기록이 있어 여기에 제의 준비과정과 진행과정을 옮겨 적는다.

 당산제라 부르는 이 마을 당제는 해방이후부터 지내지 않고 있다. 윗당과 아랫당에 제를 지내는데 윗당은 정자나무(귀목)로 마을입구에 500여년이 넘어 보이는 세 그루 중 가장 오래된 나무이다. 옛날에 당산나무 가지를 베다가 나병이 걸린 일도 있었다. 아랫당은 소나무로 마을에서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청풍국민학교 정문옆에 있는데 수령이 100년쯤 된다.

 제는 음력 정월 14일 밤 12시부터 지내는데 마을의 안녕과 질병이 돌지 않기를 기원한다. 이 마을의 당산제는 당산이 영험하여 도둑이 들어왔었는데 못나가고 당산나무를 맴돌게 되었다 하여 제를 지냈다. 정월 초순 마을회의에서 제관을 뽑는데 3헌관과 축관 1명, 유사 1명, 집사 2명을 뽑는다. 3헌관은 자식이 많은 다복한 사람을 선출하고, 축관은 연령이 많은 사람이 된다. 제물을 준비하는 유사는 자식이 많고 집안에 아픈 사람이 없으며 임산부가 없고, 상을 당하지 않는 등 정결한 가정이어야 한다.

 제비는 각 가정에서 거두기도 하나 마을의 산에 있는 소나무 등을 팔아 사용하였다. 제기와 제물은 대개 유사와 집사가 양동시장에서 준비하는데 3일전부터 매일 목욕을 하고 갔으며 돼지머리, 삼실과, 채소(나물) 순으로 준비한다. 제기는 매년 새것으로 사며 떡시루, 사기그릇, 접시, 술잔 등은 제를 지낸 뒤 유사집에서 사용한다. 떡과 술을 만드는데 필요한 쌀은 유사집에서 부담한다.

 시장은 남자만 가고 제찬은 유사 부부가 같이 장만하나 부인은 제에 참여할 수 없다. 제를 지내기 일주일전부터 당산주위에 금줄을 치고 산에서 깨끗한 황토를 가져다 부정한 사람은 들어오지 못하도록 유사집에서 당산에 이르는 골목에 금토를 놓는다.

 정월 열나흗날 오전부터 농악대는 당산과 마을, 공동샘을 돌면서 굿을 친다. 유사집에 가까운 샘에도 금줄을 치는데 유사집에서 제물을 모두 장만할 때까지는 일반 가정에서는 샘을 사용하지 못한다. 유사집에서 당산제 음식 장만을 마치면(대개 자정쯤) 동네회관에서 3초간격으로 나발을 분다. 이 신호로 가정에서는 이 샘물을 길어 가정제사를 지낸다. 자정이 되면 깨끗한 사람 중에서 남자만 유사집에서 음식을 운반하여 윗당산에 진설을 한다. 떡시루에는 가운데에 참기름으로 불을 밝히며 한 사람이 한 가지씩 음식을 운반한다, 윗당과 아랫당의 제물은 각각 따로 준비한다. 제는 진설-분향-청신-초헌-독축-아헌-종헌-소지 순으로 하며 소지는 제관소지, 동네유지소지, 희망하는 동민소지 등을 한다. 당산제가 끝났다는 나발소리가 나면 각 가정에서는 일제히 폭죽을 터트리고 대개는 참대를 반발씩 토막내서 사용하는데「집안 액맥이 한다」,「잡귀 물러가라」고 외치기도 한다.

 이어서 마당 가운데 오곡대(가짓대, 피마자대, 고춧대, 수숫대, 참깨대)를 모아 불을 지른 뒤「모두 불 넘자」고 외치며 식구대로 다 뛰어 넘는다. 이는 다리가 아프지 않게 해달라는 것인데 각각 세 번씩 넘는다.

 이튿날에는 유사집에 모여 음식을 나누어 먹고 당제 결과를 보고한 뒤 마당밟이를 하는데, 이때 각 가정에서는 짚을 한 다발씩 들고 나와 줄을 만들어 줄다리기도 한다. 줄다리기한 줄은 토막내서 동네답의 거름으로 사용했다,

 이 마을의 당산제는 해방직후 당산나무가 벌목된 후 사라졌다.


10. 망월동 분토 당산제


                                                   조사일시 : 1993. 6. 21

                                                   조 사 자 : 이 순 영

                                                   조사방법 : 현지면담조사 (과거시행)

                                                   제 보 자 : 김처녀 (여 77)


 분토마을은 청옥동 동사무소 맞은 편에 위치한 마을로 청옥동 관할의 6개 마을 중 가장 큰 마을이다. 현재 126가구 400여 주민이 거주하고 있으며 제주양씨, 남평문씨, 김해김씨, 밀양박씨 등이 주를 이루고 있다. 동명은 분토가 많이 났다 하여 붙여지게 되었고 마을입구에는 고려말의 명장 경렬공 정지장군의 사우인 경렬사가 자리하고 있다. 경렬공이 왜적을 물리칠 때 입었던 갑옷은 보물 제 336호호 지정되어 광주민속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이 마을은 25번 시내버스의 종점으로 교통은 좋은 편이나, 영세농가가 많아 젊은 사람들은 대개 광주시내로 일을 다니기 때문에 노약자들만 남아 힘들게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분토마을의 당산제는 일제시대 이전에는 성했으나, 해방이후부터 제를 지내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오래전에 당산제를 지냈을 때 마을의 어떤 분이 당산제가 미신이며 지낼 필요가 없다 하여 지내지 않게 되었다. 그 후로 번성했던 마을이 빈농으로 변해가고 점점 쇠퇴해졌다고 하며, 당산제를 지내지 못하게 했던 이 마을의 유지분이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소문에 의하면 그 집에 좋지 못한 일만 생겼다 한다.

 2~3년 전부터 극소수의 부녀자들이 당산제를 모시고 있다. 하지만 지금도 이 마을에서는 당산제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는 주민이 많다 한다.

 이 마을의 당산제는 김처녀라고 하는 할머니를 주축으로 마을의 여성들이 주관하여 당산제를 지내는데 마을의 안녕과 가정의 평안을 기원한다. 마을의 당산은 2곳인데 할아버지당산은 마을의 우산각 옆에 있는 수령 500년 정도의 귀목나무로 이 곳에 제를 모시고 있으며, 할머니당산의 당산나무는 고사하고 그 터만 남아 있다.

 금년 당산제 때는 여러 사람들이 도와주셨다고 한다. 이곳의 당산제 준비는 정월 12일경에 황토와 선죽, 금줄을 치는 것부터 시작된다. 여기에 쓰이는 황토는 마을 뒷산에서 깨끗한 흙으로 마을입구와 당산나무 근처의 길목에 뿌린다. 제물장만에 쓰이는 돈은 동네에서 제를 모시고자 하는 사람만 돈을 걷어서 마련하며, 개인적으로 음식을 장만하기도 한다. 이번에는 동네에서 새로 집을 지으신 안희선씨가 음식장만을 맡아 주셨다.

 제물의 종류로는 떡, 메, 대추, 곶감, 사과, 배, 도라지, 고사리, 국(마른명태 두부국)을 준비하며 음식에는 마늘, 고춧가루 등은 넣지 않고 간을 보지 않는다.

 열나흗날 저녁 8시쯤에 화주집에서 여러 사람이 제물과 제기를 하나씩 들고 당산나무로 가서 돗자리를 깔고 상을 편 후, 음식을 진설한다. 진설할 때 특이하게도 메와 국은 통째로 올려 놓는다. 또 당산제에 쓰이는 그릇은 김할머니가 매년 보관하고 계셨다가 깨끗이 닦아서 다시 사용하고 있으며 제는 진설-분향-강신-독축-소지-헌식-음복의 순으로 진행된다. 제를 다 지내고 나서 헌식을 하는데 당산나무 옆 개울에 상에 올린 음식을 조금씩 떼어 흘려 보내고 남은 음식은 그 자리에서 나누어 먹는다.

 이곳 당산제는 지내고 있지 않다가 몇 년 전부터 지내기 시작하였고 또 여자분들이 주축이 되어 있어서 축문과 여러 가지 제의 진행과정이 아직은 미흡하지만 차차 주민들사이에 당산제를 모시면 마을과 집안에 액이 끼지 않을거라는 믿음이 생겨나 제를 지내고자 하는 사람이 늘어간다고 한다.


11. 망월동 죽곡 당산제


                                                   조사일자 : 1993. 11. 13

                                                   조 사 자 : 정기진, 이순영

                                                   조사방법 : 현지면담조사 (과거시행)

                                                   제 보 자 : 김선문 (80)


 죽곡마을은 대실마을이라고도 불리워지고 있는 마을로 무등산의 북동쪽으로 뻗어내린 산자락 사이의 계곡에 형성된 농촌이다.

 이 마을은 청옥 사거리에서 광주 제4수원지 쪽으로 3㎞쯤에 위치하는데 길을 따라 마을이 길게 형성되어 있고 집들은 서쪽 산을 뒤로하고 있어 모두 동향이다. 마을은 약 60호쯤 되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며, 여러 성씨들이 모여 사는 혼성촌이다. 근래에 시내 사람들이 들어와 사는 집이 늘면서 서로간에 알고 지내는 인사마저 없다고 한다.

 당산은 마을앞에 있는 느티나무로 수령은 400여년이고 나무높이 15m, 둘레 5m로 거대하며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당산곁에 모정이 있는데 이는 해방직후 건립했던 것을 1992년 전면 개축하였다.

 이 모정은 과거에는 들일을 하며 쉬는 휴식공간이었으나 농사짓는 일이 줄어들면서 여름철 노인들의 휴식처나 오가는 나그네의 휴식처 정도로 그 기능이 약화되었다,

 죽곡의 당산제는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며 정월 14일 밤 11시쯤에 시작하여 12시쯤에 끝이 난다.

 제관의 선정은「촌계」라고 하는 마을총회에서 결정한다. 촌계는 가구주의 부부가 참여하는 마을의 대동계로 음력 섣달 10일에 개최한다. 이때 유사 2명 및 제관을 결정한다. 유사는 깨끗한 사람을 가려서 뽑으며 제가 끝나는 정월 보름까지 산고든 곳, 상가 등을 가지 않는 등 철저하게 가린다고 한다. 그리고 유사로 결정되면 거절하는 법은 없다고 한다.

 제비는 가자전의 이자로 충당하였으며 돼지머리, 환육(소고기), 삼실과(대추, 밤, 은행), 떡(백설기, 인절미), 탕, 나물, 피문어 등을 준비한다.

 금줄은 제일 일주일전에 당산주변에 치고 금토는 당산주변과 유사집 앞에 뿌려 부정의 출입을 막았다.

 음식의 준비는 제일 낮에 하는데 음식준비시 양념은 넣지 않으며 생선 등은 전혀 마련하지 않는다.

 제는 제관과 농악대만이 참여하며 여자들은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다. 제관들의 복식은 평상복이었으며, 유사 2명 중 1명은 초헌, 나머지 1명은 아헌을 맡고, 제는 강신-분향-재배-잔올림-재배 등의 순서이다. 소지, 음복 등이 끝나면 헌식을 하는데 진설했던 음식을 조금씩 떼어 각각 백지에 싸서 나무 옆을 파묻고 납작한 돌 3개로 누르고 그 위에 황토를 발라서 덮는다. 그리고 금줄을 준비해서 그곳에 둘러 놓는다.

 제가 끝날 보름날 저녁부터는 마당밟이를 하는데 매일 밤에만 했으며 보통 하루저녁에 1~2집 정도를 다녔다고 한다. 굿은 정재굿(부엌굿), 마당굿, 길굿, 샘굿, 장광굿(장독) 등을 차례로 쳤으며 이때 돈, 곡식 등 음식과 술을 대접한다.

 마당밟이가 끝나면 정월 그믐께 결산보고를 하게 되는데 걸궁을 하는 동안에 어느 댁이 돈 얼마, 곡식 얼마 등을 희사했다는 내용을 보고한다. 그리고 이것들을 마을자본이 되어 마을의 대소사에 사용된다.

 이 마을의 당산제는 해방에서 6.25사이에 사라졌는데 당산제를 주도하셨던 송씨가 작고하신 후로 주도적으로 나서는 사람이 없어서 사라졌다고 한다.

 당산에 얽힌 영험담은 당산의 잎이 한꺼번에 활짝 피면 그해 물이 좋아 풍년이 들고 여러번에 조금씩 피면 물이 적어 흉년이 든다고 했으며 지금도 그것을 믿고 있다. 특히 아랫마을인 월산마을에서는 이 나무의 잎이 피는 것을 보고 머슴을 데릴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였다고 한다.


12. 장등동 용호 당산제


                                                   조사일자 : 1993. 11. 11

                                                   조 사 자 : 정기진, 이순영

                                                   조사방법 : 현지면담조사 (과거시행)

                                                   제 보 자 : 최막동 (89)


 용호마을은 호남고속도로 동광주에서 순천쪽으로 5㎞쯤의 좌측에 있는 마을로 북쪽에는 낮은 산이 있다. 이 마을의 주민은 80여호에 200여명이 거주하는데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며 광산김씨, 전주이씨 등 여러 성씨들과 함께 사는 혼성촌이다.

 이 마을의 당산은 모두 3곳으로 큰당산, 큰마누라당산, 작은마누라당산으로 불리워졌는데 현재 남아 있는 곳은 큰당산 하나 뿐으로 마을 윗쪽에 있다. 이 당산나무는 광주시 보호수로 지정되었으며, 나무높이 15m, 나무둘레 6.6m, 수령 400년 된 느티나무로 밑둥은 고목이 되어 구멍이 뚫려있다.

 나머지 두 당산은 마을 앞 동쪽에 있었는데 비슷한 시기에 고사하고 지금은 없다.

 이 마을의 당산제는 음력으로 정월 맨 처음 정일에 제를 모시는데 만약 설날과 겹치면 그 다음 정일로 바꾸었다고 한다.

 제관은 헌관 1명, 축관 1명, 유사 1명 등 3명을 선정하는데 특히 유사로 뽑히면 모든 정성을 다하여 모셨다고 한다. 유사는 섣달 스무날 정도에 마을어른들이 모여 선정하는데 일단 유사가 선정되면 상가나 산고든 곳 등은 가지 않았으며 궂은 음식 등을 먹지 않는 등 제가 끝날 때까지 가리는 것이 매우 많았다.

 제비는 호당 거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마을자금이나 여름에 공동으로 논매는 삯 등을 모아 두었다가 제비용으로 충당했다.

 금줄과 금토는 제일의 일주일전에 하는데 마을입구와 당산주변에 했으며 이 기간에는 다른 마을사람의 출입을 금했다.

 제물은 일반가정에서의 방안제사 수준으로 준비하고 특히 돼지는 통으로 진설한다. 또한 제물의 준비는 깨끗하게 하며 맛을 본다거나 특별한 양념 등은 하지 않고 소금으로 간만 약간 했다.

 진설은 큰당산에서만 했고 할머니당산에는 술잔만 올리고 굿을 친다.

 이 마을의 굿은 초저녁에 마을을 돌며 굿을 치다가 시간이 되면 유사집으로 가서 제물 등을 가지고 당산에 오른다. 제물은 준비한 그대로 진설하기 때문에 특별히 제기 등은 준비하지 않고 자리는 유사집에서 가져와 사용했다.

 큰당산에 제를 모시는 동안 모닥불을 피우는데 이는 추위 때문이라 한다. 나무는 주변의 산에서 벌목하여 사용했다.

 큰당산에는 제관들과 농악대만 참여하는데, 이때 제괸들의 옷은 깨끗하게 손질한 평상복을 입었다. 소지와 간단한 음복이 끝나면 당산 옆에 헌식을 하게 되는데 이때 진설된 음식을 조금씩 덜어 백지에 싸서 묻는다. 당산에서의 제가 끝나면 나발을 불어 제의 끝을 마을에 알렸다.

 큰마누라당산, 작은마누라당산에서 간단한 제를 올리고 큰샘에 가서 샘굿을 친 후 마을앞 터에서 음식을 먹으면서 놀다 헤어진다. 이 때는 남녀노소 모두 나와 음식을 나누며 음복한다.

 용호마을은 제가 끝나면 10여일 정도 걸궁을 치고 2월 1일(초하룻날)에는 당산제, 걸궁 등을 총 결산하고 마을의 대소사를 논의한다. 이 관행은 현재까지도 이어져 2월 1일에 마을회의를 한다.

 용호마을의 당산제는 일제말인 대동아전쟁 때 일제의 억압 때문에 사라지게 되었다.

 이 마을 당산의 영험담은 모두 세가지가 있다.

 ◦ 봄에 당산나무의 잎이 피는 것을 보고 풍ㆍ흉을 가름했는데 한 번에 활짝 피면 풍년이 들고 여러번에 걸쳐 피면 흉년이 든다고 믿고 있다.

 ◦ 제일 밤에 부부가 동침을 했는데 붙어서 안떨어지니 마을민들이 마당에 꺼내 놓고 굿을 했더니 떨어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 소도둑이 소를 끌고 가다가 당산 앞을 못 지나가고 그 자리에서 맴돌다 날이 밝자 소를 놓고 도망갔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13. 운정동 주룡 당산제


                                                   조사일자 : 1993. 11. 11

                                                   조 사 자 : 정 기 진

                                                   조사방법 : 현지면담조사 (과거시행)

                                                   제 보 자 : 박원양 (71)


마을의 뒷쪽으로 낮은 구릉성 산이 호를 이루고 있는데, 마을은 그 안에 남향으로 형성되어 있어 아늑하다. 약 200여년 전에 성양박씨, 천안김씨 등이 들어와 마을이 되었고 현재는 45호가 생활하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한다. 이 마을의 당산은 마을 뒷산 고개마루에 있는 소나무 3그루로 소나무 2그루는 여자나무라 불리우고 여자나무 사이에 작은 남자나무가 있었으나 20여년 전에 고사하고 없다. 당산의 크기는 나무둘레 3m, 나무높이 15m 정도로 2그루가 비슷하며 서로 10m쯤 떨어져 있다.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며 모셔온 당산제는 1월 14일 저녁 11시에 모신다. 정월 11~12일에 동네회의에서 깨끗한 사람으로 유사를 지명한다. 유사에 지명되면 가리는 것도 많고 매일 찬물로 목욕을 해야하는 등 어려움이 많기 때문에 모두들 회피하려하나 지정되면 어쩔 수 없었다. 변소에 갔다오면 옷을 갈아입고 매일 밤에는 마을 앞 샘물을 길러다 찬물로 목욕을 했다.

 제비는 호당 거출을 했는데 돈이나 곡식(쌀)으로 했으며, 제기는 보관해 두었다가 다시 사용하며 이를 빌려다 사용할 수는 없다. 제물은 유사집에서 준비하는데 깨끗한 이웃들이 도운다. 금줄ㆍ금토는 일주일전에 이장이 주도하여 청년들과 함께 마을입구와, 당산주변에 한다. 제물의 운반은 제관들이 지고 들고 당산으로 오르는데 앞에는 햇불로 길을 밝히며 농악대는 뒤를 따른다. 제는 방안제사와 유사하다. 제관은 두루마기에 유건을 쓰며 소지, 음복은 제관들만 간단히 한다. 헌식은 당산 옆에 땅을 파고 돼지머리, 명태머리 일부를 떼어 백지에 싸서 묻어 준다.

 제의 시작과 끝은 나발을 불어 알린다. 굿은 정월 14일 저녁부터 당산에서 당산굿 마을 앞 큰 샘에서 샘굿 등의 순서대로 하며 밤중에 자진 해산한다. 정월 보름부터 마당밟이를 하는데 원하는 가정에서만 걸궁을 하고 음식, 술 등을 제공받고 쌀이나 돈 등을 형편에 따라 내놓는데 이것들은 모아져 마을자본이 되며 2월 1일에 마을총회 때 이에 대한 결산을 한다.

 이 마을의 당산제는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의 억압에 의하여 사라졌다. 또 다른 이유는 먹을 것도 부족한 시절이라 당산제를 모실 여력이 없었다고 한다.

 이 마을의 당산제에는 궂은 곳을 다녀온 사람이 참석하면 몸이 아프거나 사망한다는 말이 있기 때문에 스스로 참석을 안한다.

 30여년 전에 이 마을의 고씨는 당산나무의 자장개비를 따다 불을 땠는데 그 후부터 아프기 시작해서 사망했다 한다.


14. 운정동 어운 당산제


                                                  조사일시 : 1993. 11. 20

                                                  조 사 자 : 정 기 진

                                                  조사방법 : 현지면담조사 (과거시행)

                                                  제 보 자 : 박삼순 (여 73) : 유사경험


 어운마을은 광주시립공원묘지 아랫마을이다. 마을을 낮은 구릉성 산들이 에워싸고 있어 매우 아늑하다. 50여호가 거주하는데 여러 성씨들의 혼성촌이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한다.

 당산은 마을의 동쪽 그릉의 능선에 위치하며 당산밑에 우산각이 있다. 원래는 4그루의 느티나무가 있어서 할아버지당산이 2그루, 할머니당산 2그루였으나 지금은 2그루가 남아 있는데 신격을 구별하지 못한다.

 제는 마을의 안녕과 유사의 소원을 비는데 정월 14일 밤 12시경에 모신다. 정월초에 유사를 뽑으며 손(자식)없는 사람으로 한다. 자식이 없어서 당산신께 공들여 자식을 얻으려는 목적과 자식이 있으면 청결을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마을의 당산제는 정월 14일 인적이 드문 밤 12시경에 모신다. 부정한 사람이 제 모시는 것을 보면 부정탄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마을의 당산제는 유사부부만이 당에 올라 제를 모신다. 제비는 호당 각출하는데 삼신이 있다거나 상복을 안벗은 가구는 빼고 한다. 금줄과 금토는 3일전에 당산주변과 유사집에 하였으며 유사는 문밖 출입을 금했다. 물은 고서면 죽산에 좋은 샘이 있어 거기에서 떠다 당산제를 모시는데 사용한다. 샘을 품어서 3일만에 물을 떠다 그 물로 쌀을 담근다. 샘물을 깨끗이 하기 위하여 대나무를 엮어서 샘을 덮었다.

 제기는 매년 새로 구입하는데 사용 후에는 유사가 가졌다. 제물로는 시루, 감, 대추, 밤, 명태 등 매우 간단하다. 헌식은 간단하게 하는데 명태 1마리를 그대로 백지에 싸서 놓고 감 1개, 대추 1개, 사과 1개, 밤 1개 등을 주변에 던지고 명태는 그 곳에 그대로 둔다.

 이 때는(해방전후) 궁핍하던 시절이라 매우 간략하게 했다. 제가 끝나면 걸궁을 치는데 걸궁은 반드시 당산에 걸궁을 하겠다고 보고하고 마을을 돌며 걸궁을 한 후 다시 당산에 가서 걸궁을 끝내겠다는 보고를 하고 끝을 냈다.

 제보자는 당산할머니가 노후되어 세지 않으니까 간단히 모셔도 된다고 느끼고 있다.

 어운마을의 당산제는 일제말기에 안모시다가 해방 후 몇 년 모시는데 6.25사변이 일어나 완전히 사라졌다.

 이 마을의 당신에는 몇가지 영험담이 있다.

 ◦ 소도둑이 들었는데 당산할머니가 세서 밤새 당산주변만 돌다가 날이 밝자 도망갔다/

 ◦ 당산제를 준비하던 중 남자분이 나무를 무릎으로 꺾다가 무릎을 다쳐 고생고생 하였는데 용한 곳에서 알아보니 당산제를 잘못 모셨기 때문이라 해서 3년 후에 다시 모셨더니 나았다 한다.

 ◦ 제일 밤에 부부관계를 맺다가 안 떨어져서 부엌문으로 들어가 당산할머니께 빌었더니 떨어졌다.


15. 수곡동 수곡 당산제


                                                   조사일시 : 1993. 10. 13

                                                   조 사 자 : 정 기 진

                                                   조사방법 : 현지면담조사 (과거시행)

                                                   제 보 자 : 이형섭 (78)


 수곡은 마을 뒤쪽이 낮은 구릉이며 논이 있는 농촌이다. 400여년 전에 전주이씨가 들어와 16대째 거주하고 있으며, 예년에는 80여호가 거주하였으나 요즈음은 40여호로 전주이씨가 많으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한다.

 수곡의 당산제는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며 매년 정월 14일 밤 11시에 시작하여 새벽 3시까지 모셔왔으나 일제말기에 일본인들의 탄압으로 사라졌다.

 당산은 귀목나무로 마을 앞과 마을 뒤 2곳에 있었으며 아랫당산 윗당산으로 불리웠다. 아랫당산 부근에 공동샘이 있었는데 이 샘을 품어 깨끗이 청소한 다음 이 물로 화주가 목욕하고 제물 장만을 하였다.

 제관은 정초에 마을회의를 열어 화주 1명, 헌관 1명, 축관 1명 등 모두 3명을 뽑는데 깨끗하고 식구가 적은 사람으로 한다. 화주는 마을입구, 당산주변, 화주집 앞, 샘주변에 금줄과 금토를 하여 부정의 출입을 막았다. 제관들은 산고든 집이나 상가 등에는 가지 못했으며 또 제관에 선정되면서부터 제가 끝날 때까지 비린 것을 먹지 않았다. 특히 화주는 더욱 엄했다. 화주는 매일 마을 공동샘에서 물을 길러다 목욕을 했으며 장을 보아온 후에는 용변을 보면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 입었다. 그러므로 장을 보러 가는 날부터는 거의 음식을 먹지 안았다고 한다. 물론 화주 부인도 금기사항을 지켜야 했다.

 제비는 호당 거출을 했다. 제기는 매년 새것으로 구입하고 제물은 돼지머리, 과실, 채소 들 간단한 것으로 진설하며 비린 것은 절대 준비하지 않는다. 물론 채소 등의 준비시에는 간만 했으며 미리 먹어 본다거나 맛을 보는 일이 없었다. 제일에는 초저녁에 나발을 불어 제를 알리고 굿꾼들은 마을 앞 공터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굿을 한다. 시간이 되면 화주집에 가서 제관들의 뒤를 따르며 당산으로 향한다.

 수곡마을에서는 아랫당산에 먼저 제를 올렸다. 제의 절차는 일반 가정제사와 유사하며 아랫당산에서는 음복, 헌식 등을 하지 않는다. 윗당산에는 제관과 굿꾼들만 참여를 하는데 돼지머리를 통째 헌식을 한다. 제관들은 한복에 두루마기를 입었으며 부녀자들은 구경도 하지 못했다.

 수곡 당신 영험은 다음과 같다.

 ◦ 당산을 안 모시면 동네에 피해가 있고 해롭기 때문에 정성을 다하여 모셨다.

 ◦ 도둑이 솥 단지를 떼어 가다 당산이 세어서 당산 아래만 맴돌고 있었다.


16. 용전동 용전 당산제


                                                   조사일자 : 1993. 9. 23

                                                   조 사 자 : 정기진, 이순영

                                                   조사방법 : 현지면담조사 (과거시행)

                                                   제 보 자 : 김귀천 (77)

                                                              백재동 (76)


 용전마을은 본래 광주군 우치면의 지역으로, 풍수지리상 마을의 지형이 마치 배가 흔들리는 형국이라하여 해유로 불리우다 어느 해 홍수가 있는 후 물이 흔한 마을이란 뜻으로 낙촌, 용전이라 하게 되었으며, 1957년 광주시에 편입되어 우치동 관할이 되었다.

 마을의 성촌시기는 약 300여년 전에 진주정씨와 광산김씨가 처음으로 들어와 마을이 형성되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광산김씨 김영완씨의 6대조인 김상홍공이 과거에 급제하여 마을에 솟대를 세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마을이 형성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지금은 300여호 1,000여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으며 주로 농업과 인근의 갈대밭을 개간하여 하우스 농사를 겸하고 있다. 비닐하우스에서는 묘목과 원예, 딸기, 참외, 고추 등을 재배한다. 이 곳에는 일제시대때「소작회」라고 하는 마을조직이 있어 이 지방 소작쟁의 운동의 근원지이기고 하다.

 이 마을의 당산은 2군데에 있었는데 마을 중앙에 할아버지당산, 마을 아랫쪽에 할머니당산이 위치하였다.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당산제는 정월 14일 밤 자시에 모셨다.

 제관의 선정은 정월 초닷새날에 마을회의를 열어 깨끗하고 아들이 많고 학식이 있는 어르신으로 제관과 축관을 정하고 화주는 깨끗한 사람으로 뽑는다. 여기에서 사용되는 제비는 마을자본에서 나오는 이자로 충당했으며 제물은 삼실과, 나물, 돼지머리, 밥, 떡 등을 준비했다. 제상에 올릴 나물에는 간을 하지 않는다.

 14일 오전에는 마을입구와 당산목 주위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길목마다 뿌려 부정의 출입을 막았다. 밤 10시쯤에서 제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로 나발을 불었으며 제관의 복장은 백색 한복에 도포를 입고 유건을 썼다. 화주집에서 장만한 음식들은 깨끗한 사람들이 당산까지 가지고 가서 진설을 하게 된다. 당산제에 사용된 그릇은 마을제기가 따로 있어 목청에 보관해 두었다 사용했다. 한밤중에 제를 지내므로 화톳불을 피우는데 거기에 쓰이는 장작은 각 가정에서 거두어서 사용했다. 제상에 올리는 음식중 돼지머리의 윗턱은 할아버지당산에 아래턱은 할머니당산에 진설을 하며 유교식으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제를 모실 때 농악대도 함께 참여하며 제관, 축관, 화주와 성인남자에 한해서만 참여할 수 있었다. 소지는 마을소지, 개인소지 순으로 하며 헌식은 할머니당산에 헌식터가 있어 음식을 조금씩 떼어서 땅에 묻는다. 그리고 참가한 사람 모두가 차려진 음식을 음복한다. 당산제가 모두 끝나면 나발을 불어 마을사람들에게 알렸다.

 다음날 마을에서는 마당밟이가 시작되는데 동네 공동샘을 시작으로 당산나무를 거쳐 마을로 들어와 집집마다 굿을 친다. 그리고 정월 25일이 되면 이장선출 및 올해의 품삯을 정하는 마을회의를 연다.

 용전의 당산제는 해방직후 소멸되었으며 일제시대 소작회의 회장이었던 노남용씨에 의해 당산나무가 베어졌다고 한다.


17. 지야동 지야 당산제


                                                   조사일자 : 1993. 9. 23

                                                   조 사 자 : 정기진, 이순영

                                                   조사방법 : 현지면담조사 (과거시행)

                                                   제 보 자 : 김용길 (69)


 지야마을은 본래 광주군 갑보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대야리, 지산리와 우치면의 용전리, 지내리의 각 일부지역을 병합하여, 본촌(지야)면에 편입되었다가 1957년 광주시에 편입되어 본촌동의 관할이 되었다. 본촌공단을 거쳐 도로관리사업소를 지나면 도로변에 지산국민학교가 있다. 학교를 중심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이 지야마을이다. 이 곳은 19번, 16번 시내버스가 자주 다니고 있어 교통에는 불편이 없으며, 평야지대로 마을 앞과 뒤쪽에 많은 논이 있다. 최근들어 수도작을 줄이고 하우스농업이 늘어나는 추세인데, 토마토, 딸기, 배추 등의 고등채소를 재배하여 농가소득을 높이고 있다.

 이 마을에는 전주이씨, 해주오씨 등 180여가구에 600여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동심계」라고 하는 위친계가 조직되어 있다. 이 마을에서는 옛부터 당산제를 모셔왔으나, 6.25사변으로 마을이 시끄러웠고 또 주관할 사람도 없어 제를 모시지 않게 된 후 현재까지 지내지 않고 있다.

 당산은 귀목나무로 2개의 당산이 있었으나 현재는 1곳만 남아 있다. 동네 서편에 위치한 할아버지당산은 6.25때 불이 나서 타버렸으며 할머니당산은 지산국민학교 안에 있다.

 이 마을의 당산제는 마을의 안녕과 마을민의 건강을 빌고 풍년을 기원하며 1월 14일 밤에 모셨다. 제를 지내기 전 1월 5일경 마을회의를 열어 생기복덕이 맞은 사람중에서 제관 1명, 축관 1명, 화주 1명을 뽑는다.

 당산제를 지내기 위한 제비는 인구전으로 거두었으며 뱃속 아이까지 세어서 할당을 했었다. 제물은 유교식으로 푸짐하게 차리는데, 특히 돼지머리는 1개를 구입하여 머리의 윗턱은 할아버지당산에 아래턱은 할머니당산에 흰 종이에 싸서 차린다. 또 음식 중 비린 생선류는 제외된다. 제를 지낼 때는 화톳불을 지피며 여기에 사용되는 장작은 마을주민들 집에서 몇 개씩 거두었다.

 10일경에는 마을입구와 화주집, 제관집, 축관집 입구에 금줄을 치며, 12일경에 황토를 뿌리고, 선죽을 세운다. 이때부터 외부 사람들이나 부정한 사람들은 금줄이 쳐진 곳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우회해서 다녔다. 그리고 이 기간중에 초상이 나면 마을쪽으로 나가지 못하고 논으로 돌아서 나갔다고 한다. 14일 아침부터 화주 부부는 음식을 장만한다. 음식을 만들 때는 입마개를 하고 간을 보지 않으며 고춧가루를 넣지 않는다. 특히 화주부부는 정갈해야 하기 때문에 여러 벌의 깨끗한 옷을 준비해 두었다가 화장실에 다녀오면 목욕하고 옷을 갈아 입는 등 정성을 다해야 했다.

 당산제에 사용하는 제기는 삼푼지(까만제기)로 매년 새로 구입하며 제가 끝나면 화주가 사용하였다. 14일 오후에는 농악대를 구성하여 초저녁부터 굿을 치며 제를 알리는 신호로는 나발을 불었다. 제를 지낼 때는 여자는 따라가지 못했으며 제관들의 복장은 흰색 한복을 착용하였다.

 제는 진설-헌작-강신-독축-소지-헌식-음복의 순서로 진행하며 축관이 소지를 하면서 마을의 소원성취를 빌고 그 다음으로 화주, 제관, 개인적으로 축원을 하고 싶은 사람들이 소지를 올렸다. 제를 끝마치고 당산나무 옆에 작은 무덤처럼 생긴 헌식터에 차려진 음식을 조금씩 떼어서 묻고, 같이 온 마을 주민들과 함께 음복을 한다. 제를 끝마치면 끝을 알리는 나발을 불었고 그 소리를 듣고 각 가정에서는 차례준비를 했다.

 농악대는 당산나무앞에서 신명나게 굿을 쳐 드리고 마을로 돌아오면 제일 먼저 마을샘에 가서 굿을 치며 동네 각 가정을 다니면서 마당밟이를 시작했다.

 그리고 1월 20일쯤에 마을회의를 하여 그 해의 품삯과 동네의 여러 가지 행사를 논의한다.


18. 오룡동 치촌 당산제


 조선시대 저작을 지냈던 이규가 살았던 곳이라 「저작」이라고 부르고, 또는 마을에 재가 있어서 「잿말」로 부르는 치촌은 480여년전에 입향조인 광산이씨와 홍주송씨 등이 생활의 터전을 일군 이래, 조선 후기엔 장성군 남일면에 속했고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광주군 본촌면 오룡리에 편입되고, 1957년에 광주시에 편입, 북구 삼소동 관할이 된 이래, 광산김씨와 김해김씨, 의령남씨 등 몇몇 가구를 제외하고 34호 가운데 27호가 광산이씨 한림공파 후손들로 자작일촌을 이루며 농업에 종사한다.

 이 마을 입구 좌측에 「독당산」이라 부르는 높이 110㎝, 두께 45㎝, 둘레 195㎝인 입석이 있는데 이 부근은 조리 형국으로 이 마을이 부촌이 될 풍수지리적 여건을 갖추고 있다.

 또 하나의 당산은 마을 뒤 자리바위 옆에 있는 수령 백여년 된 버드나무로 그 당당함은 오늘날까지 여전하다.

 인근 마을 가운데 줄다리기가 성했던 치촌은 매년 1월말이 되면, 각 호당 일정량의 볏단을 거두어 마을의 공터에서 여러 장정들이 힘을 모아 삼합의 큰 줄을 외로 꼬아 30미터쯤 되는 줄을 만든다. 만들어 놓은 줄을 여자가 넘어가면 그 부분이 끊어진다는 속언이 있어서 상대편 여자들이 넘지 못하게 밤을 세워 줄을 지키기도 한다.

 1월 그믐날 밤에 햇불을 켜들고, 농악대를 앞세워 흥을 돋운 다음 줄을 당기는데 마을 안길을 기준으로 편을 가르고, 한쪽은 남자줄 다른 한쪽은 여자줄로 구분하여 외줄다리기를 하는데, 여자편이 이겨야 시절이 좋고 풍년이 든다지만, 막상 줄을 당기기 시작하면 그런 생각은 아예 없어지고, 이기기 위해 서로 밀치고 당기며 극렬해져서 풍ㆍ흉년 생각은 이미 잊고 만다.

 줄다리기 다음날인 음력 2월 1일 정년에 마을 입구 독당산(입석)부터 당산제를 지내는데, 제관은 마을의 연장자인 촌장이 맡는다.

 제물은 돼지머리, 시루떡, 삼실과, 메, 탕, 향, 초, 제주 등이며 정갈한 화주가 미리 준비한다.

 제차는 강신-초헌-개반삽시-아헌-종헌-소지 순으로 진행되는 유교식이며, 제의 시작과 끝에 농악대가 참여한다. 치촌 당산제에서는 축문이 없다.

 당산제가 끝난 뒤 어제 저녁 당겼던 줄을 입석 아래부분부터 감아가는 「당산 옷 입히기」를 한다. 독당산에서 옷 입히기를 끝낸 뒤에는 마을 뒤 나무당산으로 옮겨 또 한 차례 별도로 준비한 제물로 당산제를 지낸다.

 다른 곳에서 흔히 연행되는 바깥당산(할아버지당산)제를 먼저 지내고, 그 다음 마을안이나 들판에 있는 안당산(할머니당산)제를 지내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당산제가 모두 끝나면 농악대는 마을의 공동샘에서 샘굿을 맨 먼저 치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마당밟이를 시작하는데 이장 집을 시작으로 마을의 연장자 순으로 진행한다.

 문굿-장광(천룡)굿-조왕굿-곳간굿-마당굿 순으로 이어지는 마당밟이는 꽹과리, 징, 장고, 북, 태평소, 나발이 등장하고 양반, 포수, 초랭이, 중 등의 잡색이 뒤따라 다니며 흥을 돋군다. 이때 거두어진 모든 경비는 마을의 공동 경비로 삼는다.

 마당밟이가 끝나몀 올 해의 품삯을 결정하고, 효자를 표창하고, 불효자를 처벌하는 등 마을의 제반사항을 협의하는 마을회의를 연다.

 이러한 당산제나 줄다리기도 1950년대까지는 시행되었으나 60년대 이후부터는 중단되었고, 이제는 연로한 제보자들의 기억 속에만 남아 있을 뿐이다.

 마을입구의 독당산에 예전엔 가끔 아들 낳기를 기원하는 부녀자들이 과일과 시루떡 등을 차려 놓고 기자치성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요즈음은 보름이 되어도 금줄 한 줄도 치지 않고 관심조차 없어져 신체로서의 위엄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19. 월출동 해산 당산제


                                                   조사일자 : 1993. 9. 25

                                                   조 사 자 : 정기진, 이순영

                                                   조사방법 : 현지면담조사 (과거시행)

                                                   제 보 자 : 정갑주 (70)


 해산은 마을뒤에 작은 산이 있어 북풍을 막아주고 남쪽은 영산강 상류지역으로 넓은 평야지대이다. 과거에는 마을지명을 해산이라 했으나 지금은 해산이라 한다.

 약 300여년전에 김해김씨가 터를 잡았다고 하며 지금은 50여호가 혼성촌을 형성하고 있으며 수도작이 주를 이루나 일부 시설원예를 하는 농가도 몇호 있다.

 해산의 당산은 두 곳으로, 마을 뒷산 구릉의 할아버지당산은 고사했고 마을앞 정미소 옆에 있었던 할머니당산은 20여년전에 벌목되어 지금은 흔적이 없다.

 해산의 당산제는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며 정월 14일 밤 10시부터 모신다.

 정월 10일쯤 마을 어르신들이 회의를 하여 화주, 축관 등을 선정한다. 화주는 깨끗한 사람으로 생기복덕을 맞추어 선정하고 축관, 헌관 등도 화주의 몸가짐에 준한다.

 제비는 걸궁해서 모은 돈을 쓰며 제물은 돼지 1마리, 명태, 삼실과, 삼채 등 간단히 하고 제기는 매년 새로 구입하여 화주가 쓴다.

 제물준비는 화주집에서 하는데 수건으로 입을 가리고 말을 안하며 간도 보지 않는다. 돼지는 머리만 젯상에 올리는데 윗턱은 할아버지당산에 아랫턱은 할머니당산에 쓴다.

 금줄은 화주가 결정된 후 마을입구와 당산주변, 화주집 앞 등에 치며 금토는 제일 아침 일찍 뿌려 부정의 출입을 막고 마을민들은 비린 것(생선)을 먹지 않는다. 제는 저녁 10시쯤 시작되는데 초저녁에 굿을 한바탕하고 9시쯤 유사집에 가서 제물을 들고 할아버지당산에 올라 당산주위를 돌면서 굿을 친 후에 나발을 불어 제의 시작을 알리고 진설한다.

 제는 유교식 절차에 의하여 행해지고 소지는 제관들과 성인남자들이 한다.

 헌식은 차린 음식을 조금씩 백지에 싸서 당산나무 옆에 묻어 주며 끝을 알리는 나발을 불면 각 가정에서는 비로소 조상에게 메를 올린다. 이와같은 것은 할아버지당산이 마을의 어른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할머니당산에는 남녀노소 누구든지 나와 구경하고 제가 끝나면 음식 등을 먹고 논다. 이날 저녁은 잠을 자면 안된다는 속설이 있기 때문에 날이 새도록 논다.

 이 마을은 걸궁을 쳐서 마을자금을 마련하기 때문에 한 가정도 빼지 않고 마당밟이를 한다.

 마당밟이는 정월 그믐에 끝나게 되고 2월 초하룻날 마을회의를 하여 총결산을 하고 이장을 새로 뽑고 임금을 결정하는 등 마을의 제반사항을 토의한다.

 해산의 당산제는 해방직후 사라졌는데 신경을 쓰는 사람이 없어서라고 한다.


20. 매곡동 중외 당산제


                                                   조사일자 : 1993. 11. 18

                                                   조 사 자 : 이 순 영

                                                   조사방법 : 현지면담조사 (과거시행)

                                                   제 보 자 : 박용순 (39) : 통장


 전라남도 교육청의 뒷편에 위치하고 400여년전에 밀양박씨가 처음으로 들어와 성촌된 중외마을은 현재 50여호가 농업에 종사하며 살고 있다. 이곳에는 버드나무가 5곳에 있었다 하여 예전에는 오류동이라고도 불리었다고 한다.

 이 곳의 당산제는 오래전에 사라지고 마을주민들에 의해 구전되고 있을 뿐이다.

 현재 마을입구 도로 중앙에 당산나무가 있는데 이 나무는 원조 할아버지당산의 손자인데 마을주민들은 이 나무를 「당산」이라고 부르고 있다. 제보자가 어렸을 때 당산나무에 올라가서 놀다 마을 어르신들게 야단을 맞았던 기억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당산나무의 가지를 꺾지 못하게 했는데 이는 나뭇가지를 꺾으면 그 꺾은 집에서는 나쁜 일이 생기고 좋지 못한 일이 생겼기 때문이라 한다.

 당산제는 사라졌으나 마을민들은 아직도 당산의 영험함을 믿기 때문인지 지금도 마을주민중에 객사를 하거나 교통사고로 죽으면 상여는 당산나무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뒤로 돌아가게 한다.

 몇 년전 마을에 궂은 일이 있어 형식적으로 제를 한 번 모셨다. 이 곳에는 일심계라고 하는 모임이 있는데 하백, 어매, 중외, 오치, 삼각, 가작마을의 주민들로 구성되어진 모임으로 위친계와 비슷한 것으로 예전에는 돼지계라고 불리워졌다. 자식의 혼례 때 돼지를 주었기 때문이고 이 계는 상부상조와 계원의 애경사에 참여하는데 계원중 어떤 분이 작고하시면 강제성은 없지만 하얀 소복을 같이 입도록 되어 있다고 한다.

 10년전까지만 해도 이 마을에는 정월 대보름을 즈음하여 마당밟기를 정기적으로 했었고 여기서 거두어진 돈은 마을을 위한 공동기금으로 사용되었다.


21. 일곡동 일곡 당산제


                                                   조사일자 : 1993. 11. 15

                                                   조 사 자 : 정기진, 이순영

                                                   조사방법 : 현지면담조사 (과거시행)

                                                   제 보 자 : 노병무 (80)

                                                              노현채 (60)


 일곡마을은 오치에서 우치공원 중간쯤에 있는 일곡마을 진입로를 따라 1㎞정도 가면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하며 높지 않는 구릉성 산들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다. 풍수지리상 저울대 형국인 일곡은 광산허씨, 광산이씨, 광산김씨가 주된 성씨로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며 살고 있다.

 이 마을의 당산은 마을의 동쪽과 서쪽 2군데 있었으며 동쪽은 큰당산, 서쪽은 작은당산이라 했다. 동쪽의 큰당산은 일찍 고사하여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고 서쪽의 작은당산은 고목이 되어 속이 비어 있던 것을 1990년에 어린이들이 불장난을 하다 태워버렸다.

 제보자에 의하면 정월 14일 밤에 당산제를 모셨는데 비용은 가구당 거출하나 산도가 있거나 상을 당한 집은 제외했다. 굿을 치기 위하여 상쇠를 담양에서 모셔왔다 한다. 요즈음 가끔 마을 어른들이 자주 모이는 일신제에서 명절이나 마을내의 행사가 있을 때마다 가끔 풍물을 치곤 한다.

 당산제가 끝나면 보름날 아침에 줄을 만들어 남녀 편을 갈라 마을 앞 공터에서 줄다리기를 하여 여자편이 이기면 풍년이 든다고 믿었다.

 일곡마을은 2월 1일에는 마을총회를 열어 당산제를 결산하고 그 해의 품삯 등을 결정하는데 이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마을사람들은 큰당산의 잎이 나는 것을 보고 모낼 시기를 결정했는데, 잎이 일찍 피면 모를 일찍 심고, 잎이 늦게 피면 모를 늦게 심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22. 문흥동 대문산 당산제


 문흥동의 문산마을과 평교마을은 1991년 문흥지구 택지개발사업 편입에 따라 사라졌다. 이 마을은 짓봉이라 부르는 야트막한 야산을 뒤로하고, 마을 정면에 문흥동 대주아파트가 자리잡아 있고 마을을 빙 둘러 감싼 형국으로 광주로 진입하는 호남고속도로 동광주 교차로가 있다. 문헌에 조사되어진 바에 의하면 대문산마을 입구에 할머니당산이라 부르는 귀목나무 숲과 당산의 좌우에 용과 호랑이라 부르는 선돌 2기가 지키고 있으며, 소문산마을에는 할머니당산이라 부르는 귀목나무가 있으며 평교마을에는 수령이 70년쯤 되는 귀목나무인 당산할아버지와 독영감이라 부르는 80㎝ 높이의 입석 하나가 있다.

 조사를 나간 당시 아파트 공사가 시작되어 이 마을은 사라지고 없었다.

 이 마을의 당산제는 음력 정월 7일이나 8일경에 주민들이 모여서 그 해의 제관, 축관, 화주, 집사 등을 뽑으면서 시작된다.

 제관의 선정은 엄격한 법도가 있어서 산고나 상을 당하지 않았고 3년이내 성주를 하지 않았던 사람으로 생기복덕이 맞는 남자를 선정하고 금기에 들어간다.

 당산제의 비용은 마을주민 모두의 정성을 모은 인구전으로 충당한다. 당산제 당일에 차릴 제물의 준비는 원화주가 했으나, 제의 비용이나 제에 쓰일 쌀 등은 제미화주가 거둔다. 당산제의 준비는 1월 12일 양동시장을 이용했으며  할아버지당산과 할머니당산에 쓸 제물은 성격이 다라라 각각 따로 구입한다. 제물에 쓸 물건 값은 깎지 않으며 제기는 매년 사기그릇을 새로 사는데 제가 끝난 뒤 화주에게 주었다.

 주요 구입물품은 돼지머리, 삼실과, 제기, 소고기, 나물류, 북어, 조기, 김, 초, 향, 소지종이 등이며 제주는 미리 담근 청주를 쓴다.

 제물 준비를 할 때에는 청결을 유지하기 위해서 머리에는 수건을 쓰고 입에는 입마개를 했으며 음식의 간을 보지 않는다.

 화주와 제관 등은 당산제 전날, 당산 주변과 마을입구, 각자의 집안팎을 정결히 하고 13일에 큰무등 등에서 파온 황토를 놓고 왼새끼에 백지를 끼운 금줄을 쳐서 잡인의 출입을 막았다.

 당산제를 잘 지내기 위해 제관, 축관, 화주, 집사 뿐만아니라 온 마을 주민이 온갖 정성을 다 기울였는데 특히 제 지내기 삼일전부터는 비린 음식을 일체 먹지 않고 심지어 젓갈이 들어간 김치도 먹지 않는다.

 제관, 제주, 화주로 선정된 사람들은 화장실만 다녀와도 찬물로 손발을 씻거나 목욕을 하는 정결함을 유지하며 부정한 일이나 장소에도 가지 않고 잡인과의 상면도 피했다.

 당산제의 순서는 할아버지 당산에서 14일 자정쯤에 제를 먼저 지낸 다음, 닭이 운 뒤에야 마을 앞 할머니 당산에서 제를 올린다.

 마을 뒤쪽에 있는 할아버지 당산은 둘레가 열두아름이 넘는 튼실한 귀목나무였는데 8.15 해방 전 태풍으로 인하여 밑둥이 부러진 뒤, 그 뿌리에서 다시 자란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한다.

 할아버지당산은  당산의 성격이 강해 금기사항이 많은데 그중 당산제의 제물도 가려서 비린 생선류는 일체 쓰지 않는다. 화주집에서 준비한 제물을 당산으로 옮길 때에는 횃불을 들거나 떡시루, 찰밥시루 등을 각각 든 18명의 남자들만 참여한다. 제물은 시루떡, 삼실과, 나물, 돼지머리 등을 진설하고 메를 올린다. 제의 순서는 유교식인데 향을 피우고 초를 켜 제단을 정화시킨 뒤 강신-참신-초헌-독축-개반삽시-아헌-종헌-소지-재배-헌식 순으로 진행된다.

 독축문의 내용은 당신에게 마을의 무사태평과 재앙을 막아주며 풍년이 들도록 기원한다. 축문의 구체적 문안은 중단된지가 오래되어서 찾아 볼 수 없었다. 할아버지 당산에서 제를 마친 뒤, 마을 앞 할머니당산에서 따로 준비한 제물로 진설을 하는데 할아버지 당산에 비해 제물도 생선류가 추가되어 다양하고 넉넉하며 풍물도 흥겹게 친다.

 할머니당산의 진설과 제의 절차는 할아버지 당산과 동일하나 시작과 끝부분에 풍물이 있는 점만 다르다. 할머니 당산나무 밑에는 제단처럼 쓰이는 밑부분을 파고 돼지머리와 함께 제물을 조금씩 나눠 한지에 싸서 묻는다. 당산나무 밑둥에는 높이 136㎝, 너비 70㎝, 둘레 165㎝인 입석이 박혀 있다. 당산제가 끝난 뒤 15일 오전중에 당산제 때 준비한 제물의 음복을 겸하여 마을의 중요한 안건을 결정하는 목청계를 열어 그 해의 품삯이나 공동관심사 또는 머슴의 새경 등 마을의 크고 작은 일들을 논의하고 결정하였다.

당산제가 끝난 15일부터는 가가호호를 방문하여 마당밟이를 하였는데 이때 거두어진 돈과 곡식 등은 마을의 공동기금으로 사용하였다.

 엄격한 금기를 지키며 모든 주민들의 정성을 모아 지내오던 대문산 당산제가 어느날 하남양반이라는 분의 거부로 단절되었는데 당산제를 열심히 주도해 오던 이 분의 돌연한 행동의 변화는 주민들에게 적잖은 영향을 미치고 이 후 매년 차일피일 미루다 당산제는 단절되고 말았다.

 당산제 후 집집마다 일정량의 볏짚을 내어 마을안 사거리에서 줄을 드리는데 괴목나무에 3합의 줄을 걸고 50미터쯤 되는 큰 줄을 만든 다음 마을을 양지와 음지로 편을 갈라 풍년을 기원하는 외줄다리기를 2월 초하루에 실시했으나 이제는 보기 힘든 민속이 되어 버렸다.

 당산제에 얽힌 속언과 금기사항은 다음과 같다.

 ◦ 마을에 초상이 나서 상여가 나갈 때는 할아버지당산쪽으로 넘어갈 수 없다.

 ◦ 당산제에 쓸 제물을 준비하다 음식의 간을 보거나 먹으면 입이 부르튼다.

 ◦ 도둑이 마을에서 물건을 훔쳐 나가질 못하고 당산 주위만 맴돌다 물건을 버린 후에야 겨우 몸만 빠져 나갔다.

 ◦ 당산제 지내는 저녁에 합궁하다 몸이 떼어지질 않았는데 할머니당산 앞에서 덕석몰이를 당한 뒤에야 정상이 됐다.

 ◦ 제관으로 선정되면 여러 가지 불편한 규제사항이 많아 감기를 핑계삼아 제관되기를 거부했던 주민 한 분은 당산제가 끝난 뒤 할머니 당산에서 음복할 때 술 한잔을 마시고 절명함.



23. 문흥동 소문산 당산제


 소문산은 현재의 대주아파트 자리에 있던 여술마을과, 6.25때 피난와서 정착한 월남민들의 정착마을(혹은 수용소) 그리고 현재 터의 송정마을을 통틀어 소문산이라 부른다.

 소문산의 주요 성씨는 경주김씨로 22호이고, 상주인구는 386명, 총 호수는 98여호로 농업이 대부분이다.

 송정이란 마을 명칭은 지금은 없어졌으나 회동댁(양규율씨 조모)집 앞에 있던 마을의 할아버지당산인 커다란 소나무 때문에 생겼다고 구전된다. 밑둥이 성인 5명이 손을 맞잡아야 안을 만큼 커다란 소나무가 해방 이후 큰 바람에 부러진 뒤 없어져 버렸다.

 할머니당산은 현 통장인 김치호씨 집 앞에 있었는데 수종은 귀목나무이며 둘레는 성인의 6발정도 되는 거목이었다.

 소문산의 당산제는 중단된지 20여년이 지났으며 이 곳 또한 당산제에 온갖 정성을 다해 지내왔다고 전한다.

 당산제의 준비는 음력 1월 10일 저녁 마을회의에서 그 해의 운세와 생기복덕이 많고 궂은 일이 없는 사람을 선발하는데 제관은 헌관 3명, 축관, 화주 3명을 뽑아서 각각의 임무를 부여하면서 시작된다.

 제의 비용은 용머리돈이라 부르는 호구전으로 충당했으며 제물은 음력 1월 12일 양동장에서 구입하는데 화주내외를 포함하여 4명이 구입했으며 물건값은 절대로 깎는 법이 없고 잡인과의 접근을 피하기 위해 제물을 구입한 뒤 저녁 늦게야 동네에 돌아온다.

 주요 제물은 생선으로 부서와 북어, 대추, 밤, 곶감, 배, 소고기, 돼지머리, 시루떡, 3채나물과 초, 향 등이며 당산제에 쓸 제기는 마을에서 보관하고 있는 목기를 쓰며, 제주는 화주집에서 준비한 청주를 쓴다. 1월 13일이 되면 화주와 제관집 그리고 마을입구와 당산주변에 왼새끼 금줄을 치고 마을 뒤 북덕산에서 파온 황토를 소복하게 세 군데씩 놓아 잡인의 출입을 막는다.

 제관과 화주 축관들은 선정된 이후 철저히 금기생활을 하는데 매일 찬물로 목욕하고 상가 출입을 하지 않고 잡인과 접촉도 피하는데 대소변 후 목욕재계하는 등 정성을 기울인다.

 1월 14일 밤 10시쯤 제관과 축관들이 화주집에 모여서 할아버지 당산과 할머니당산에 쓸 제물을 각기 나눠 제 지낼 준비를 한 다음, 자정에 쇠, 징, 북, 장고, 나발, 소고 2명으로 짜여진 풍물패를 앞세우고 남자들만 할아버지 당산으로 간다. 부정탄 사람은 지골 맞는다는 속신 때문에 당산에 가질 못했다고 한다.

 제순은 유교식 절차를 따르는데 진설-인사굿-초헌-개반삽시-풍물-아헌-축문-종헌-소지-풍물-헌식 순으로 이어진다.

 헌식은 돼지머리를 한지로 싸서 당산밑에 묻고 나머지 음식은 화주집으로 옮겨 보름날 아침에 나눠 먹는다.

 당산제의 축문은 전하지 않으나 마을의 무사태평과 풍농을 기원하는 내용이다. 1924년 호열자가 창궐하여 부득이 당산제를 한번 중단한 적은 있었으나 그 후 일제의 중지령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당산제를 지내오다 광복이후 몇 차례 지낸 뒤 6.25를 전후하여 중단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할아버지 당산에서 제를 마친 뒤 닭이 울고나야 따로 제물을 가지고 할머니 당산에서 제를 지낸다. 축문의 내용 일부만 다를 뿐 기타 제례 절차는 할아버지 당산과 동일하다. 당산제를 모두 마친 제관, 화주, 축관 등은 이레동안 출입을 삼가고 근신한 뒤 대문에 두른 금줄을 거둬 당산 밑에 가서 불에 태워 묻는다.

 보름날 아침 화주집에서 준비된 제물로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음복을 한 뒤, 그 해의 당산제를 결산하고 마을의 공동안건을 논의하며 품삯과 머슴의 새경, 공동작업을 결정하는 마을회의가 열린다. 회의를 마친 뒤 화주집에서 풍물을 지치고 즐겁게 하루를 보낸다.

 16일부터는 마을 안 샘굿을 시작으로 가가호호를 방문하여 문굿-마당굿-조왕굿-천룡굿 등을 치며 잡귀 잡신을 쳐내고, 명관 복을 빌어 그집의 태평을 기원하는 마당밟이를 한다. 이때 거둬진 경비는 마을의 공동계에서 관리한다.


24. 문흥동 평교 당산제


 평교는 현재의 두암동과 각화동, 문흥동이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도 맞물려 있다. 대문산과 소문산 마을을 평교와 구분짓는 남해고속도로가 뚫리기 전에는 대문산과 송정마을의 진입로에 해당되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마을 터가 배형국인지라 보름날 아침 동네사람 몇이서 20자 남짓의 가죽나무 짐대 2개를 준비하여 그 꼭대기에 각각 오리 1마리씩을 앉히고 입에는 대를 쪼개어 물린다. 당산제는 매년 음력 1월 14일 저녁에 간단한 제물을 준비하여 지냈다.

 할아버지당산 옆에 1기를 세우고, 하나는 현재의 남해고속도로 한 복판쯤에 동네 좋으라고 세웠으나 8.15 해방 후 단절되어 버렸다. 이로 인해 마을의 당산근처를 짐대거리라고 불렀으며 현재의 청과물시장 건너편 교도소 옆은 장승이 서있었기 때문에 장승배기라 불렀다고 한다.

 음력 1월 14일 자정쯤에 풍물패를 대동하고 삼실과와 북어 몇마리를 제물로 갖추어 소주를 제주로 하여 동네의 평안을 기원하는 약식의 당산제를 유교식 절차에 따라 지낸다. 정결한 몇 사람을 제관으로 선출하고 당산에 금줄을 두르고 황토를 깐 다음 생쌀과 조를 제물로 하여 정성껏 제를 지낸 뒤 밤새워 굿을 친다.

 대정팔년(1919)에 호열자(콜레라)가 크게 번져 이 마을에 큰 피해가 속출하자 음력 8월 3일 날을 받아 천제를 지냈는데 정결한 몇사람을 제관으로 선출하고 당산에 금줄을 두르고 황토를 깐 다음 생쌀과 조를 제물로 하여 정성껏 제를 지낸 뒤 밤새워 굿을 치다가 술을 마시고 모두 당산 부근에서 쓰러져 잠이 들었는데, 「이 동네는 시끄러워 도저히 더 있을 수 없으니 이제 도동고개(마을 인근 고개)로 넘어가자고 하더니 월봉댁만 데리고 병귀들이 마을을 떠나는」 것이 당산옆에서 잠을 자던 사람들에게 현몽되어 깜짝 놀라 일어났는데 과연 그 다음날 꿈에 말한대로 월봉댁만 호열자로 죽고 나서는 마을에서는 더 이상의 피해자가 없었으며, 그 다음해는 대문산과 소문산에 열병이 유행했으나 평교에서는 당산의 영험으로 한사람도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25. 용강동 원용강 당산제


 원용강 마을은 광주의 최북단에 위치하며 영산강 주변의 평야와 접해 있는 마을로 북쪽에는 산이 가리고 있고 앞에는 넓은 들이다. 여러 성씨들이 모여 50여호가 되는데 논농사를 주업으로 하고 겨울철에는 딸기농사를 하여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

 이 마을의 당산은 마을 앞에 있는 당산나무인데 정월 보름에 모셨다. 제비는 마을자본으로 충당했으며 걸궁을 했었다 한다. 당산제가 오래 전에 사라졌으므로 적절한 제보자가 없었다.


26. 용강동 하신 당산제


 영산강변에 위치한 마을로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며 마을입구에 당산나무와 모정이 있다. 제보자 김낙규님에 의하면 선친으로부터 당산나무에 제를 모셨다는 이야기를 여러차례 들은바 있다고 한다. 이 마을의 당산제는 사라진지가 오래되어 제를 모셨거나 보았던 제보자는 찾을 수 없었다.


27. 효령동 우곡 당산제


 우곡마을은 죽지봉에서 북쪽으로 뻗어내린 말단부와 영산강주변에 위치한 조그마한 마을로 농업에 종사한다.

 이 마을의 당산은 마을입구(앞)의 공동샘과 당산나무가 있어 이곳에 정월 보름이면 제물을 차려 놓고 굿을 쳤다하나 사라진지 오래 되어 제보자가 없다.


28. 풍향동 당산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