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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의역사2

무등산자 2006. 4. 7. 13:15

남원의

 

가야 관련 유적은 상백리, 월산리, 백천리 고분군이 있다.

김해를 중심으로 강력한 철기와 말을 타는 기마 민족이었던 가야는 분명히 살아있었다.

남원은 백제와 가야의 소유권을 두고 각축전을 벌이던 전쟁터였다.

 

국시대는 크게 고구려, 백제, 신라가 대립하던 시대였고

삼국시대에 섬진강은 백제의 영역권에 속하게 된다.

가야와의 각축전 끝에 백제에 속하게 되었는데

진안군은 백제의 난진아 현으로 완산주(지금의 전주) 99현 가운데 한 현이었으며,

월랑이라고도 불리었다.

임실은 임실현,

장수는 우평현과 백해군.

순창은 도실,

곡성은 475년 백제 문주왕때 욕내,

남원은 백제의 5방중 남쪽에 위치한 대방군이었다.

구례는 구차례현,

하동은 한다사군,

광양은 마로현으로 불리었다.

 

통일신라시대는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 의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무너뜨리고 성립한

최초의 한반도 통일 국가였다.

섬진강은 신라와 백제의 최전방으로 많은 산성을 만들고 전쟁을 하던 곳이며

하동 송림은 백제와 신라의 장군들이 협상을 벌이던 장소이다.

통일신라의 영토가 된 이후에는 무진주와 완산주에 편입되게 된다.

진안은 서기 757년 진안으로 개칭하여 장계군의 속현이 되었다.

임실은 만원부에 속하는 임실부,

장수는 우평현을 고택현으로 백해군을 벽계군으로,

순창은 순화,

곡성은 757년 곡성으로 개칭된다.

남원은 940년 5현을 관할하는 남원부를 설치하였고,

구례는 구차현으로 개칭되었다가 757년에 구례현으로 개칭하여 곡성군에 속하게 되었고,

하동군은 한다사군에서 757년에 하동군으로 개칭되었다.

광양은 희양현이라 하였다.

 

고려말 섬진강유역은 왜구의 침입으로 피해를 많이 본 지역이다.

 

섬진강의 이름은

본래 고운 모래가 많아 가람, 사수천, 사천, 다사강으로 불이었다가

고려 초기부터 두치강으로 불렸으며

고려우왕(1385년 경)때 섬진강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 때에는 왜구의 침입이 많았던 시기인데

광양만과 섬진강에도 왜구의 침략이 극심하던 때로 왜구들이 경남 하동쪽에서 강을 건너

광양쪽으로 침입하려 하자

진상면 섬거에 살던 두꺼비 수십만 마리가 8킬로미터나 떨어진

지금의 다압면 섬진마을 나루터로 떼를 지어 몰려와 진을 치고 울부짖어

왜구들이 놀라 도망쳤다고 한다.

이때부터 당시 두치강으로 부르던 강을 두꺼비 "섬(蟾)"자를 따서 섬진강으로 부르고 있다.

 

고려시대에 진안은 전주의 속현으로 감무를 두었으며

공양왕 3년 1391년에는 마령현까지 겸무토록하여 월랑현이라 부르고 현령을 두었다.

임실은 진주목밑의 임실군이 되었고,

장수는 태조 23년 고택현을 장천현으로 벽계군을 벽계현으로 개칭하였고,

순창은 순창현으로 남원부에 속하게 되었다.

곡성은 현종 9년에 나주목의 속군으로 이속되었고,

남원은 5현을 관찰하는 남원부가 설치되었고,

구례는 초기에는 남원부에 속하다가 1143년 인종 21년에 주현으로 승격되었다.

하동은 하동현이라 불리면서 진주목에 속하였고,

광양은 광양현으로 개칭되어 1108년 예종 3년에 감무가 파견되었다

 

선시대 섬진강 유역은 왜구의 주요 침입로가 되었다.

 

정유재란시 왜구의 전라도 공략으로 많은 피해를 본 곳으로 석주관에서 왜적과 맞서 싸우다 전사한

칠의사 묘가 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섬진강 유역의 전 지역에서 농민 항쟁이 일어나게 된다.

1894년 동학혁명 이후

임실에서부터 순천, 광양, 하동까지 농민군이 크게 활동하고,

일제의 침략 후 반일의병 투쟁이 전개된다.

***** 후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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