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산/무등산이야기

곡성군지명유래

무등산자 2007. 10. 15. 22:12

선사 및 백제시대의 곡성

지면 제월리, 송전리 및 옥과면 주산리 지역에서 구석기시대의 유적이 발굴 보고된 바 있어 곡성지역에서는 이미 구석기 시대부터 인문활동이 이루어져 왔음을 알려주고 있다.

청동기시대유적인 고인돌은

목사동면 118기·

삼기면 57기·

오산면 37기·

석곡면 26기·

죽곡면 22기등 모두 320여 기가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한편 입면 서봉리·매월리·제월리에서 간돌검·간돌촉·뗀석기 등 유물이 출토된 바 있고, 오산면 연화리에서 작은 돌끌·칼자루끝장식·간돌살촉·민무늬토기 등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로서 곡성군일대 지역에 일찍부터 정치사회체가 형성되어 있었을 것임을 추정케 해준다.

역사기록상에 정치사회의 존재가 비교적 뚜렷이 나타나는 것은 이른바

마한소국의 존재들인데 곡성지역에도 마한소국중 일부가 존재하였다는 주장이 있다.

예컨대 지금의 죽곡면 지역에 일난국이 있었다고 비정하는 견해가 그것이다.

그러나 일난국의 위치에 대해 이를 영암지역에 비정하는 견해도 있어,

곡성·옥과지역에 마한 소국의 존재를 비정하는 것은 확실치 않다.

이러한 비정은 대부분 군현명의 변화나 발음의 유사성이 주요 논거가 되었다는 점에서 재고의 여지가 많다.

이런 점에서 근래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토대로 마한소국의 위치비정을 새롭게 시도하는 이영문의 방법은 주목 할 만 하다.

이영문에 의하면, 고인돌 밀집지와 마한소국의 위치비정지와는 17개국중 13개 정도가 일치하고 있다고 하여 적어도 마한소국들은 고인돌사회를 계승발전한것으로 볼 수 있다 하고 있다.

그런데 이영문의 연구에서는 곡성·옥과지역에 마한소국의 존재를 비정하지는 않았지만, 보성강 중류역 일대의 고인돌들의 분포상은 이 지역에 일찍부터 정치사회가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음을 말해준다 할 것이다.

마한 잔여세력을 극복하고

백제가 전남지방을 아우르는 것은 근초고왕24년(369)경으로 추정하는데,

곡성·옥과지역은 이보다 훨씬 뒤늦게 무영왕대(12·13년;512·513)에 이르러서야 섬진강유역의 여러 지역(예;상다리:여수,하다리:돌산,사타:사평-순천,모루:마노-광양,기문:남원,대사:다사-하동)들이 경략되는 것으로 보아 이 무렵에야 백제의 영역에 포함되지 않았을까 싶다.

백제의 영역에 포함되면서 현재의 곡성지역에는 곡내군이, 옥과지역에는 과지현의 존재가 찾아진다.

백제지방통치조직은 한성시대, 웅진시대의 22담로제와 사비시대이후의 방-군-현(성)제로 대별되는데,

『삼국사기』등에 보이는 곡성관련 백제군현명은 방-군-현(성)제 아래의 것으로 볼 수 있다.

백제 지방통치조직의 골간인 방-군-현 사이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구체적 자료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삼국사기』지리지 군현관계 기사 분석을 토대로 얻어진 통일신라시대 군현의 성격을 원용해 백제 방-군-현에 대해 이해해 볼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 군현의 성격을 보면

첫째, 주(백제의 방에 대비)는 독자적인 직할영역을 가지지만, 그 내부에 군, 현을 수직적으로 거느리는 행정구획은 아니고 지방행정의 거점에 대한 칭호였고,

둘째, 주,군,현은 실제로는 지방지배의 거점이지만 그 정치적·군사적 중요도에 따라 주,군,현의 칭호가 부여되었으며,

셋째,현은 주,군에 영속관계를 가지지만 주,군의 구성부분은 아니라 그 독자적 영역을 가지면서 주와 군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로 미루어 곡성지역내의 곡내군과 과지현은 군,현의 격의 차이가 있지만,각기 독립적인 군현단위의 성격이 강했지 않았나 하고 말할 수 있겠다. 이들 2군현의 위치는 대개

① 곡내군이 현재의 목사동면과 석곡면 일대

② 과지현은 현재의 옥과면,오산면 일대로 추정한다.

물론 이러한 위치비정은 개략적인 것이어서 수정될 여지가 없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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